전란에의 초대③
강력한 라이벌인 대량원군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김치양과 헌애 부부는 그를 절에 보내 승려로 만들어 놓고도 안심이 안 돼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한다. 위험을 감지한 목종은 서북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장수 강조(康兆, ? ~ 1010)를 불러들였는데, 그것은 대량원군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었으나 목종 자신에게는 오히려 목숨을 앞당기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개경의 혼탁한 정세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강조는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와서 김치양 일당을 잡아 죽였다. 목종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는 거기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내친 김에 강조는 대량원군을 왕으로 옹립하고는 이내 목종마저 살해해 버린 것이다.
개국 초기의 내전 이후 오랜만에 재발한 킹메이커의 쿠데타다. 더구나 그 킹메이커는 예전처럼 여러 명이 아니라 강조 한 명이었으니, 우여곡절 끝에 1010년 팔자에 없던 왕위를 물려받은 대량원군 현종(顯宗, 재위 1010 ~ 31)에게 실권이 있을 리 없다.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데 일생을 바친 광종(光宗)과 성종의 피땀 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왕권은 또 다시 지방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요의 성종이 그 사건을 응징의 빌미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 해 11월 성종은 강조의 쿠데타를 문죄한다며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온다. 요나라가 고려의 상국이라는 게 명분이었으니, 일찍이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구실 삼아 고구려를 쳐들어온 당 태종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실제로 강조가 호기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전쟁의 진행마저도 거의 그 복사판이 될 뻔했다.
개전 초기에 요의 성종은 10여 년 전 고려에게 강동 6주를 허용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거란이 고려를 침락한 근본 원인이 그것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당 태종도 랴오허를 건넌 다음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을 정복하는 데 애를 먹었듯이, 요 성종도 압록강을 넘는 데까지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으나 곧바로 강동 6주의 수비망에 걸려버린 것이다. 가만히만 있었어도 강조는 연개소문처럼 승리를 낚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연개소문보다는 고혜진(高惠眞)이나 고연수(高延壽)를 본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쿠데타의 책임자답게 강조는 30만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달려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검증을 받고자 했으나 그건 지나친 만용이었다. 병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으나 원래 공성(攻城)에는 약해도 전면전에는 강한 게 대륙의 군대다. 어쨌든 강조는 책임을 질 줄은 아는 인물이었다. 통주에서 패해 사로잡힌 그에게 성종은 자기의 신하가 될 것을 권했으나 강조는 그 권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그것을 계기로 고려의 수비망은 구멍이 뚫려 버렸다. 고려의 주력군을 격파했으니 이제 거란군은 굳이 강동 6주를 함락시키려 애쓸 필요 없이 그냥 우회해 버리면 된다. 심지어 그들은 서경마저도 그냥 지나쳐 곧장 개경을 향해 남진한다. 이 소식에 놀란 현종은 황급히 개경을 빠져나와 이듬해 1월에 멀리 나주까지 대피하는데, 왕이 백성을 버리고 가는 것이니 사실 대피라기보다는 도피다【나중에도 보겠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이렇게 최고 지도자가 자기 한 목숨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몽골의 침략 때 강화도로 도망친 고려의 고종, 임진왜란 때 식솔들만 거느리고 의주까지 야반도주한 조선의 선조, 정묘호란 때 역시 강화도로 내뺀 조선의 인조, 1895년 마누라가 일본 낭인들에게 죽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서 1년간이나 살았던 조선의 고종, 1950년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팽개치고 한강 다리를 건넌 다음 다리마저 끊어 버린 이승만 등등을 꼽을 수 있겠다】.
요 성종은 개경의 왕궁을 유린하는 것으로 분을 풀었으나 나주까지 추격할 힘과 의지는 없다. 그래서 그는 명분만 얻으면 철수하겠다고 결심하는데, 마침 현종이 그 명분을 준다. 군대를 돌린다면 곧 현종이 직접 요의 황궁으로 가서 입조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거창하게 시작된 전쟁 드라마는 두 달여 만에 싱겁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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