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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1장 모순된 출발, 킹메이커들의 내전②: 광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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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1장 모순된 출발, 킹메이커들의 내전②: 광종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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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들의 내전

 

 

만약 왕규가 혜종을 암살했다면 그건 죽 쒀서 개 준 격일 것이다. 광주원군은 단독 대권후보가 아니었고 또 다른 막강한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 호족인 유씨를 외가로 둔 왕자 요()는 외가만이 아니라 장인도 든든한 이다(그의 장인은 바로 견훤의 사위로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운 박영규였는데, 왕건도 박영규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적이 있으니 왕요도 배다른 형인 혜종처럼 아버지 왕건과 부자간이자 동서간이 된다). 게다가 그는 혜종에 이어 왕건의 차남이므로 형식상의 서열로 봐도 광주원군보다 앞선다. 사실 혜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왕규가 진정한 적수로 여겼던 것은 혜종이나 박술희가 아니라 바로 충주 세력이었다. 과연 왕규가 걱정한 것처럼 혜종이 남긴 왕위는 광주원군이 아니라 요에게로 돌아가서 그가 정종(定宗, 재위 946 ~ 949)으로 즉위한다. 아마 이 과정에는 혜종의 사후에도 킹메이커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박술희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 왕규가 맨먼저 살해한 인물도 바로 박술희였다. 하지만 충주 세력은 작은 갱단이 아니라 이미 서경(평양) 세력과도 연계되어 있는 빅패밀리' 였다. 왕규의 반란이 일어나자 왕건의 종제이자 서경의 실력자였던 왕식렴(王式廉, ?~949)은 즉각 군대를 몰고 개경(개성)으로 내려와 반란을 진압하고 왕규 일당 300여 명을 대거 처형한다.

 

왕식렴의 충성에 감격한 탓일까? 아니면 중부 지방의 호족들이 판치는 개경에 신물이 난 탓일까? 아무튼 정종은 내친 김에 왕식렴의 의견을 좇아 서경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개경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서경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즉위한 왕답게 그는 개경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서지만, 오히려 그게 화근이 되어 결국 재위 3년 만에 친아우인 소()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죽는다(정종에게도 경춘원군이라는 왕자가 있었으나 혜종의 아들들처럼 그도 역시 왕위계승을 주장할 입장은 못되었다). 소가 즉위하면서 비로소 고려의 왕권은 안정을 찾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4대 왕 광종(光宗, 재위 949 ~ 975)이다.

 

앞서 왕건이 뿌린 모순의 씨앗이 초기의 혼란을 빚었다고 말한 바 있듯이, 이처럼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을 넘어 내전까지 치르게 된 데는 왕건의 책임이 크다. 943년 그가 죽으면서 유언 삼아 자신의 후손들, 즉 후대의 왕들에게 남긴 훈요 10에는 왕위계승에 관해 충분히 논란을 부를 만한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이 도리지만, 맏아들이 어리석을 경우에는 둘째 아들이 왕위를 잇고, 둘째 아들 역시 불초한 경우에는 나머지 형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추대하는 자가 왕이 되게 한다.” 이것이 훈요 10조의 제 3항인데, 개국 초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권력 승계의 원칙이 이렇듯 무원칙할 수 있을까? 도대체 스스로 어리석다거나 불초하다고 인정할 만큼 어리석고 불초한 왕자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보면 왕위계승 분쟁은 이미 왕건 자신이 자초한 셈이다.

 

그러나 왕건이 남긴 모순된 유훈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훈요 10조의 첫 항에서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의 힘을 입어야 한다면서 불교 장려를 촉구하는가 하면, 마지막 항에서는 옛 경전과 역사서를 많이 읽어 나라 다스리는 일에 거울로 삼으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유학을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권장한다. 이 엇갈린 가르침은 이후 고려 사회의 성격을 귀족제와 관료제가 뒤섞인 잡탕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데, 이것이 광종(光宗) 때 나타난 둘째 모순이다.

 

 

모순에 찬 유훈 왕건이 남긴 훈요 10조는 고려의 건국 이념을 담고 있으나, 실상은 고려가 처한 대내외적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면이 많았다. 고려 왕조는 그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했기에 오히려 혼란을 자초한 인상이 짙다. 위의 그림에는 훈요 10를 받아 적게 한 박술희의 이름이 보이는데, ‘()’ 자 대신 ()’ 자를 쓴 게 이채롭다. 아마 발음이 같아서 그랬겠지만 이처럼 공식 문서에 이름을 달리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은 고려시대에도 이두를 많이 썼음을 말해준다. 아래 그림에는 훈요 101항부터 5항까지의 내용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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