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항쟁③
이 명백한 사기극에 몽케는 당연히 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위기와 정권의 위기를 혼동하고 있는 최항은 1253년에 몽골군이 침략해 오자 또 다시 사기극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강화도 맞은 편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고종이 마치 뭍으로 나온 것처럼 꾸며 거기서 몽골 사신을 영접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온 것은 그게 처음이긴 했으나 같은 사기에 두 번 속을 바보는 없다. 결국 이듬해 여름부터 시작된 몽골의 6차 침략은 사상 최대의 피해를 가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이 해에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백성은 무려 20만 6천 800여 명이고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몽골군이 지나간 지방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고 되어 있으니 사기의 대가는 엄청나다.
국제 사기극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음에도 이를 뉘우치기는 커녕 자신의 집권에만 여념이 없었던 데다 강화도에서도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던 최항이 병으로 편안하게(?) 죽은 것은, 신이 없거나 아니면 신의 업무 중에 권선징악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최항의 서자로 뒤를 이은 최의(崔竩, ? ~ 1258)에게는 그런 은총이 베풀어지지 못했다. 노비를 어머니로 둔 탓인지 일찍이 ‘신분해방’에 눈을 뜬 그는 선비보다 노비를 측근에 두고 중용했으며, 아직 몽골의 전란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권력의 맛을 즐기는 데만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적이 많을 것은 당연한 일, 1258년 김준(金俊, ? ~ 1268)과 유경(柳璥, 1211 ~ 89)이라는 자들이 최의의 집을 습격해서 그를 암살함으로써 60년에 걸친 최씨 정권은 끝났다. 김준은 무신이고 유경은 문신이므로 시대가 시대인 만큼 권력상 서열은 김준이 위다. 그래서 아직 무신정권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으나 ‘최씨 고집’이 무너졌으므로 어처구니없는 대몽 항쟁' 이 더 이상 지속될 이유가 없다. 이듬해 고종이 몽골과의 타협으로 태자를 대신 입조시키면서 28년에 걸친 무모한 항쟁은 최종적으로 끝난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고려는 전란의 피해를 입기 전에 진작부터 몽골에 대해 확실한 사대관계를 취해야 했을 것이다. 결과론일까? 그러나 처음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으니 결과론은 아니다. 권력 수호 차원에서 무모하게 버틴 무신정권과 뿌리깊은 중화 사상으로 ‘오랑캐’에 대한 항복에 망설였던 개경 귀족들이 합작으로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급기야는 나라마저 빼앗기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더욱이 항복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영토에서 나타난다. 1258년 동북부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이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그것을 빌미로 화주(和州,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해 함경도 땅을 고려에게서 빼앗았다. 또 1269년에는 서경의 반란 세력이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두고 평안도 땅을 차지했다. 서경을 중시하라는 왕건의 유시는 애시당초 포기한 터였지만, 초기부터 내내 관리에 애를 먹던 북부의 영토를 떼어준 것에 아마도 왕과 개경 귀족들은 시원섭섭해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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