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군과 용병②
애초에 배중손이 믿었던 것은 미처 강화도에서 나오지 못한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왕족인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옹립하는 등 부산 떠는 틈을 타 인질들은 재빨리 육지로 도망쳐 나온다. 그렇다면 삼별초(三別抄)도 더 이상 강화도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멀리 남쪽으로 가 진도에 근거지를 트는데, 그들이 기세를 떨치는 것은 이때부터다. 선박을 이용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제주도에서 거제도까지 남해상의 섬들을 점령하니 옛 장보고(張保皐)가 부럽지 않다. 특히 항구들을 장악하고 중앙으로 가는 조운을 방해한 것은 개경 정부에게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준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반란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의 건국이 될 판이니, 개경 정부는 장보고 시대 경주 정부의 심정이 어땠을지 공감할 수 있었다.
더구나 무기력한 면에서는 개경 정부도 9세기의 경주 정부에 못지 않다. 염장(閻長)의 역할을 해준 것은 역시 몽골군이었다. 하긴, 고려의 군대는 반란군이 되었으니 개경 정부로서도 달리 도리가 없었겠지만, 몰락한 무신들 대신 다시 문신으로 군 사령관이 된 김방경(金方慶, 1212 ~ 1300)은 몽골군의 지원을 받아 1271년 총공세를 펼친 끝에 마침내 진도를 함락시키고 배중손을 잡아죽였다. 이후 삼별초(三別抄)는 김통정(金通精, ? ~ 1273)을 우두머리로 삼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저항을 계속하다가 2년 뒤에 최종적으로 진압된다.
명백한 반란임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난이 고려 민중의 지지를 얻은 이유는 일단 몽골에 대한 반감 때문이지만 그밖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당시 고려 백성들은 몽골의 가혹한 징발에 시달렸던 것이다. 무엇을 위한 징발이었을까? 바로 쿠빌라이, 즉 원 세조(世祖, 재위 1260 ~ 94)가 시도한 일본 정벌이다.
1260년 몽골의 제위에 오른 쿠빌라이는 정복왕조에서 벗어나 중국식 제국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민족 왕조로서 장기적인 생존과 발달을 위해서는 백 번 옳은 선택이다. 국호를 원(元)으로, 황제의 시호를 중국식으로 고치고(그래서 그는 몽골제국으로 보면 5대 황제이지만 원나라로 따지면 초대 황제가 된다) 이름만 남아 있던 남송을 멸망시켜 대륙을 통일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쿠빌라이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 전까지의 어느 중화 제국도 이루지 못한 동아시아 전역의 통일을 시도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일본마저 정복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천 앞바다의 물살조차 부담스럽게 여겼던 몽골군이 거친 현해탄을 건너기란 불가능하다. 뱃멀미는 물론이고 당장 병력 수송에 필요한 선박을 건조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고려의 합포(지금의 마산)에서 선박을 건조하도록 명한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진압된 뒤 1274년 드디어 몽골군은 남송군과 고려군을 거느리고 현해탄을 건너는데(당시 고려군 사령관은 김방경이었다), 무려 900척의 대선단이었으니 선박을 만들고 군량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고려 백성들의 원성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 무엇을 위한 항전인가 삼별초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제주도의 항바두리 토성이다. 흔히 삼별초는 몽골 침략에 최후까지 항전한 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망명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게 됨에 따라 실업자가 된 강화도 수비대가 ‘구조조정’에 반대해서 파업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 동병상련의 심정인 고려 백성들이 그들의 반정부 쿠데타를 지지해준 덕분에 그들의 허명이 후대에 과대포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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