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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중국식으로 살자(쿠빌라이, 원세조)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중국식으로 살자(쿠빌라이, 원세조)

건방진방랑자 2021. 6. 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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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식으로 살자

 

1211년 금을 공략하면서 시작된 몽골의 정복은 몽케 칸에게서 끝났다. 서유럽 입성을 눈앞에 두고 바투의 원정군이 유럽 전선에서 철수한 게 마지막이다. 몽케 칸은 왜 정복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남송 때문이었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때도 남송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몽골은 서쪽으로만 진군했을 뿐 100여 년 전부터 금에 눌리면서도 강남에 버티고 있는 남송의 숨을 끊지는 않았다. 언제든지 손만 대면 집어삼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정복을 늦추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몽케 칸에 이르러 몽골의 대외 정책은 크게 바뀐다. 몽골 제국이 분열되어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바투의 킵차크 칸국이 사실상 독립했다. 이런 마당에 몽케 칸은 자기도 독자적인 영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툴루이 가문이었으므로 몽골 본토밖에는 물려받은 게 없었다. 명색이 몽골 제국의 황제인데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남은 한 곳, 남송을 노리게 된 것이다. 막상 남송에 눈을 돌리고 보니 그 가치가 새삼 새롭다. 물자가 풍부한 데다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과 번영을 누려야 할 몽골 제국이 근거지로 삼기에 딱 알맞은 곳이다. 그전까지 몽골은 중국 대륙을 단순히 조세를 징수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는 곳으로만 여겨왔으나 이제는 직접 지배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몽케는 먼저 남송의 주변국들인 윈난의 대리국과 티베트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일 칸국을 세우는 것으로 서역 원정을 완료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남송 왕조를 접수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1259년 남송을 공격할 즈음 그는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유지는 동생인 쿠빌라이가 받들었다. 형의 뒤를 이어 칸이 된 쿠빌라이는 맨 먼저 남송을 완전히 멸망시켰다(이후 명이 들어설 때까지 100여 년간 중원에는 한족 왕조의 대가 끊겼는데, 그때까지의 역사상 가장 긴 이민족 지배였다). 그런 다음에 그는 한반도의 고려를 정복하고, 안남과 캄보디아, 타이 등 인도차이나도 복속시켰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칸국들까지 합쳐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게 되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몽골 제국의 영토가 아닌 곳은 서유럽과 인도, 이집트, 일본, 동남아시아의 섬들뿐이었다이 지역들은 어떻게 몽골의 지배를 모면할 수 있었을까? 서유럽은 몽골이 원정을 중단했기 때문에 정복을 피했고, 인도와 이집트는 더운 기후 때문에 정복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인도와 이집트는 동서 무역로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지역들은 몽골이 정복 자체를 시도하지 않은 곳들이다. 그러나 일본과 자와는 몽골이 원정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드문 경우에 속한다. 둘 다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의 덕택이었다.

 

 

툴루이 가문의 왕자들 막내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몽골 관습에 따라 칭기즈 칸은 막내 툴루이에게 몽골 본토를 물려주었다. 오고타이에게 권력을 빼앗겼던 툴루이 가문은 오고 타이의 사후에 권력을 되찾았다. 그림의 윗부분에 있는 세 사람은 각각 몽케, 쿠빌라이(원을 세움), 훌라구(일 칸국을 세움)의 모습이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즉위는 툴루이 가문의 재집권이었으므로 당연히 오고타이 가문의 반발을 샀다. 제국은 정상에 오른 순간부터 내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언뜻 보면 제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인 듯하지만, 실상 여기에는 몽골 제국의 성격과 향후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숨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중국에 영지를 소유했고 주변에 중국의 유학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쿠빌라이는 유목 사회와 농경 사회가 융합된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 반면 오고타이 세력은 유목 사회를 중심으로 몽골의 전통 지배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빌라이가 즉위했다는 것은 제국이 장차 어떤 노선을 취할지를 예고하고 있었다.

 

과연 그는 즉위한 즉시 자신의 구상을 실천으로 옮겼다. 우선 국호를 중국식 원()으로 고치고,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 상도(上都, 내몽골 지역)와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로 정했다(상도는 여름 수도이고, 대도는 겨울 수도다). 이로써 쿠빌라이는 원 제국의 건국자가 되었다. 그는 나중에 시호도 중국식으로 고쳐 세조(世祖)가 된다.

 

원 제국은 비록 영토의 면에서는 이전 몽골 제국의 일부분에 불과했으나 이것만 해도 중국 전체와 만주, 몽골, 인도차이나 일대를 포함하는 대제국이었다. 세조의 중국화 노선은 행정제도에도 나타난다. 그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기본 통치 기구로 삼았다. 중앙 행정을 총괄하는 중서성, 군정의 최고 기관인 추밀원, 감찰 기관인 어사대는 모두 중국의 전통적인 통치기관들이었다. 그러나 지방 행정은 중국식 주현제(州縣制)를 따르지 않고 행성(行省)과 다루가치라는 몽골 특유의 제도를 도입했다.

 

행성은 중앙 정부의 지방 출장 기관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는 임시로 설치하는 것이었으나 영토가 확대되면서 항구적인 행정기관으로 재편되었다(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도 이 행성 제도의 일부다). 이 행성들이 훗날 중국의 성()으로 발전하게 되어 오늘에까지 이른다. 또한 다루가치는 원래 칭기즈 칸이 어느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그곳의 행정관으로 두었던 직책인데, 쉽게 말하면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총독이라 할 수 있다. 다루가치에는 상위 신분인 몽골인과 색목인(色目人)만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중앙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몽골의 신분제에서는 몽골인이 서열 1위였고, 색목인이 2위였으며, 이들이 함께 지배층을 구성했다. 그 아래 피지배층으로는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이 있었는데, 한인은 금의 치하에 북중국에서 살았던 한족과 여진, 거란, 고려인을 가리키며, 남인은 몽골에 끝까지 저항한 남송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구 비례로는 몽골인과 색목인이 각각 100만 명이 넘지 않았던 데 반해 한인과 남인은 7000만 명이나 되었다. 불과 3퍼센트의 지배층이 97퍼센트의 피지배층을 다스린 것이다. 색목인은 위구르, 탕구트, 나이만, 티베트, 이란, 아랍 등 중앙아시아와 서역의 여러 종족을 가리킨다. 그들은 문화적 자질이 우수하고 중국 문화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국의 중요한 협력자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제국의 재정과 경제, 조세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의 건국자인 이성계의 조상이 바로 고려에 파견된 다루가치였다는 사실이다. 다루가치가 될 수 있는 신분은 몽골인과 색목인이었으니 이성계는 그 혈통을 지녔을 가능성이 있다. 색목인은 서역 출신을 가리킨다. 당 제국을 세운 이연(李淵)도 한족이 아닌 북방 군벌이었고, 몽골의 첫 정복 대상이었던 서하의 왕도 이씨였다. 중국의 이씨 중에는 중앙아시아계가 많았다. 그렇게 보면 이씨 조선의 가계에도 중앙아시아 혈통이 포함되었을지 모른다.

 

 

중국식 몽골 황제 몽골 제국을 중국식 제국으로 바꾸고 원 제국을 세운 쿠빌라이다. 그는 한화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는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뜻에 어긋났으나 동서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서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슈퍼스타의 등장

불세출의 정복 군주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중국식으로 살자

동서 문화의 교류

깨어나라, 한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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