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사위들②
기대와는 달리 즉위 초부터 일본 정벌 뒷바라지에 시달린 충렬왕이었으나 사위로서 장인의 뜻을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감내할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재위 기간 중 그는 열 차례 이상이나 원의 황실을 방문할 정도로 정성스럽고 충성스런 사위였다. 따라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을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를 감찰사(監察司)로 바꾸고 6부를 4사(司)로 개편한 데는 원의 요구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 충렬왕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속국이므로 6부六部라는 이름도 6조六曹로 격하되었는데, 이 명칭이 조선시대까지 계속된다). 기관들의 기능은 그대로지만 이름에서 보듯이 성(省)이 부(府)로, 원(院)과 대(臺)가 사(司)로 한 급씩 격하된 것은 속국 행정부의 체제임을 말해준다. 여기에 일본 정벌이 포기된 이후에도 정동행성이 계속 남아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한 것은 부마국임에도 믿을 수 없다는 원나라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랄까?
그러거나 말거나 충렬왕에게 더 중요한 신분은 고려의 왕보다 황제의 사위다. 1297년 아내인 제국대장공주가 죽었을 때 그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몽골에 가 있던 세자가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고려로 달려왔는데, 자신의 슬픔을 달래는 방식이 좀 색달랐다. 아버지가 아끼는 애첩과 그 배후 세력을 모조리 잡아죽인 것이다. 아마도 세자는 어머니가 마흔 살도 못 되어 죽은 탓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었겠지만, 졸지에 아내와 애인을 모두 잃은 충렬왕은 만사에 흥미를 잃고 이듬해 왕위를 세자에게 넘겨준다. 하긴, 요즘 정치인들이 골프라면 미치는 것처럼 몽골에 있을 때 익힌 매 사냥에 빠져 있었던 그였으니 왕위 따위에 초연(?)한 태도가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왕위에 오르게 된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은 적어도 아버지처럼 무기력한 인물은 아니었다. 즉위 직후 그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마련하고 대대적으로 실행하고자 했다. 정방을 폐지하고 한림원을 사림원(詞林院)으로 고쳐 인사권을 부여한 것이라든가, 귀족과 호족들의 권력형 비리와 부패를 척결하고자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자들이 출세하는 루트를 차단한다든가, 새 행정기관들을 신설해서 속국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려는 제스처를 보인 것은 당연히 모국의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다. 때마침 아내인 계국대장공주가 질투까지 하는 바람에 그는 개혁의 시동도 제대로 걸지 못한 채 드라이브를 중단하게 된다【몽골의 공주는 충선왕과 왕비 조씨의 금슬이 좋은 것에 불만을 품었는데, 실은 조씨가 먼저 충선왕과 결혼했으니 후처가 전처를 시기한 셈이다(그래도 정실은 엄연히 몽골 공주였으므로 그녀가 낳은 아들만 세자가 될 수 있었다). 충선왕은 1292년에 고려에서 조씨와 결혼했고, 3년 뒤 원나라에 가서 계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들였다. 그러나 귀국하고 나서 충선왕이 조씨와 더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고 공주는 원 황실에 서신을 보내 조씨가 자신을 저주한다고 모함했다. 일개 아녀자의 질투라면 모르겠으되 몽골 공주의 불평이었기에 문제가 되었다. 결국 조씨는 친정아버지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대도로 압송되는 비극을 당했고 충선왕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당시 개경 궁궐에는 조씨가 공주를 저주한다는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는데, 여기에는 아마 친원파 귀족들의 책동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7개월 만에 그는 원나라에 소환되었고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아들의 왕위를 이어받은 경우는 아마 세계사적으로도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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