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보다 강한 칼②
여기서 잠시 1392년 건국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보자. 갓 탄생한 새 왕조가 한시바삐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권력의 승계가 분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장성한 여섯 아들이 모두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들이었으므로 이성계는 어느 아들을 특별히 편들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나름대로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방책을 마련한다. 여섯 아들은 모두 지난해에 죽은 첫 아내(신의왕후)의 소생이다.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온전한 왕위계승자라고 볼 수 없다【왕위계승자의 신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였는가, 아닌가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당대에는 무척 중요한 기준이었다. 참고로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현역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한다. 아버지가 건국자인 경우 아들은 대개 그런 신분이 아니다. 따라서 개국공신들, 쉽게 말해 건국자의 부하들은 건국자의 아들에 대해 특별히 왕자로서의 예우를 갖춰 대하지는 않았다(물론 건국자의 아내, 즉 왕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르긴 몰라도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은 아마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정도전(鄭道傳)이나 조준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지금의 아내 강씨(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번(李芳蕃, 1381 ~ 98)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마음먹는다(강씨는 고려 말 권문세족인 강윤성의 딸인데, 아마 이성계는 처가로부터 받은 도움에 보답할 겸, 명문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을 겸 해서 방번을 후계자로 낙점했을 것이다).
물론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1354~98)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일단 찬성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여섯 아들이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는 정도전은 권력의 경쟁자인 그들이 왕권마저 장악하면 자칫 국가 대사는 물론 그 자신의 개인적 야망마저도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음직하다. 하지만 공신들은 이성계에게, 그럴 바에는 오히려 막내인 이방석(李芳碩, 1382~98)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한다. 기록에는 방번이 경솔한 성품이기 때문이라고 전하지만 겨우 열한두 살짜리 아이가 경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공신들은 필경 막내를 계승자로 삼아 왕권을 더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이성계의 의도와 일치하므로 1392년 8월에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방석의 배다른 형들, 즉 신의왕후의 여섯 아들은 입이 잔뜩 부을 수밖에 없다. 막상 조선 건국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뛴 것은 자기들인데, 엉뚱하게도 열한 살짜리 배다른 막내동생이 세자가 되었으니 죽 쒀서 개 준 격이란 바로 그들의 처지를 뜻하는 말이리라. 특히나 정몽주(鄭夢周)를 죽여 사실상 건국의 길을 닦은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 1367 ~ 1418)은 기가 막힌 심정이다. 정몽주에 이어 또 하나의 정씨(정도전)가 그의 타깃이 되는 계기는 여기서 나온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노래 짓고 천도하고 책 쓰고 군사 조련하면서 사실상의 왕권을 행사해온 그였으니 알았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직하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