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부담스런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
▲ 10월 5일(월) 대구 달성군 하빈면 → 상주시 / 88.06KM
퀴즈를 통해 ‘사육신’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을 살펴봤다. 물론 퀴즈라는 것이 토막지식을 묻는 것이기에, 아이들이 토막지식을 어떤 내용으로 스토리텔링하느냐가 ‘영화제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 아이들이 함꼐 모여 속닥속닥 얘기를 하고 있다.
사육신 영화 만들기, 사실물 & 창작물
드디어 본래 하려던 미션인 ‘사육신 소재로 영화 만들기’를 하게 되었다. 조건은 첫째 15초~30초 분량의 영화, 둘째 찍어 놓은 영상 소스를 나중에 학교에서 편집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직접 만들어본 경험이 많지 않으니 황당한 미션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창작품이라는 것은 어떤 의식의 흐름을 담고 있게 마련이다. 그건 곧 사실과 사실들에 어떤 뼈대를 입혀 ‘나만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때 착각하기 쉬운 것이 ‘창작이라 하지만 결국 사실과 사실을 이어붙인 것이 아닌가요?’하는 점이다. 즉 그저 짜깁기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사실의 나열은 단순한 팩트이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이에 대해 김용옥 선생님은 명확하게 집어주신다.
정확한 학문에는 약속이 있다. 해석도 그런 기본 논리 위에서 해야 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기술된 팩트다. 1961년에 몇몇 군인이 한강을 건넜다는 것은 팩트다. 그러나 그건 역사가 안 된다. 그들이 한강을 건너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우리가 해석해야 비로소 역사다. -『한국일보』, 2015년 11월 16일
국정교과서 이슈가 한창일 때, 김용옥 선생은 『중국일기』라는 책을 펴내며 ‘중원 패러다임’을 넘어선 ‘고구려 패러다임’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위의 말에서도 팩트와 역사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팩트는 있었던 일 그대로를 기술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어떤 해석을 내리면 그게 바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해석이란 결국 스토리이고 그 스토리는 각자의 관점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창작물을 만드는 일이 바로 사실들에 해석을 입히는 일이다. 그 해석은 자신의 관점이 투영된 해석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관점만 부각시킬 경우 누구에게도 공감을 주지 못하는 ‘자폐적 창작물(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쓰레기)’이 만들어질 뿐이다. 그러니 해석에도 공동의 이해에 기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자신만의 스토리를 입히되 거기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미션을 통해 ‘어떻게 스토리를 입혀 영화를 완성할 것인가?’를 보고 싶었다.
▲ 단편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 시나리오도 없지만 말이다.
‘죽음’이란 단어만 남은 ‘사육신 소재 영화’
그래서 사육신의 핵심내용인 ‘충절’이나 ‘신의’에 대한 것을 부각시키는 스토리를 엮어낼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이상적으로나 가능한 얘기였다. 솔직히 나에게도 갑자기 이와 같은 미션이 주어진다면, ‘뭥미~’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을 테니 말이다.
팀은 두 팀으로 나누어 민석&준영이가 한 팀, 재욱&현세가 한 팀이 되었다. 준영이는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만들고자 노력은 했지만, 민석이는 별로 흥미가 없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준영이도 지쳐서 하지 않게 되었다. 재욱&현세팀은 처음부터 ‘우리 일이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귀찮아하며 그냥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눠 스토리를 만들고 어떻게 제작할지 논의를 하길 바랐는데, 아이들은 철저히 ‘하기 싫다’는 자세만 보여주고 있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간다 해도 전혀 찍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이때는 내가 개입해야만 했다. “찍어야만 출발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으니, 그제야 뭔가를 찍기 위해 일어나더라.
고민도, 논의도 없었으니, 그들이 만든 사육신 영화는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사육신의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신하가 죽었다→누군가 죽는 이야기→죽거나 맞는 영상만 담으면 된다’라는 의식의 흐름 말이다. 아이들이 찍은 영상은 ‘죽었다’는 단어만 남고, 역사적 사실은 완전히 휘발되어 날아갔다. ‘왜 죽었는지?’, ‘무슨 상황인지?’는 전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영상의 한 장면. 시작도 하기 전에 의욕을 상실한 아이들.
부담스러운 상황에 대응하는 자세
어떤 부담스러운 상황이 있다. 하지만 그런 부담스러운 상황을 피할 순 없다고 해보자. 그때 보이는 반응은 대략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극복하던지, 소극적으로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뭐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 결과에도 미련이 없어’라고 하던지 말이다. 상황에 따라 두 가지의 반응 중 적절한 것을 선택할 테지만, 이때 아이들이 택한 반응은 후자였다.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 것, 최소한의 힘만 들였기에 그 결과에도 초연할 것.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어디에도 고민의 흔적이나, 잘 만들어보자는 생각 자체가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그러니 편집할 때 찍은 영상을 어떻게든 꾸며내기 위해 ‘개그물’로 희화화시켜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상황으로 만든 나를 탓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영화를 만들어라’라고 말하며 의욕을 상실하게 했으니 말이다. 차라리 어제 저녁에 미리 팀별 과제임을 공지하여 사육신에 대한 역사를 공부하게 하고 준비하게 했어야 했다. 물론 쉬어야 할 시간에 과제를 내준다고 열심히 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처럼 아예 대충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상황들을 겪어나가며 나도 아이들도 함께 배워가고 있다.
▲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영상의 한 장면.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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