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과 참상②
하지만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처음부터 임진왜란(壬辰倭亂)과는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일본군의 사기가 전만 못했으며, 개전 초부터 명나라 군이 출동했다. 또 1차전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조선의 관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적극 대처하여 충청도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순신이 해상에서 버티고 있었다. 결국 1598년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일본군이 철수하는 것으로써 7년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은 끝났다.
유혈의 파티가 끝난 뒤 일본과 중국은 그냥 손을 툭툭 털고 가버리면 되었지만 파티장을 제공한 조선은 얘기가 다르다. 우선 오랜 전란으로 한반도 전역이 거의 폐허처럼 변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다. 임진왜란의 ‘종군기’라 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앙과 지방 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데 지쳐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둑이 되었으며, 게다가 전염병으로 죽어 넘어지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
더욱이 전쟁 전에 전국적으로 170만 결에 이르던 경지가 종전 후에는 불과 1/3로 줄어들었으니 전쟁으로 빚어진 엄청난 재앙을 복구할 재정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현실적 피해뿐 아니라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건축물들이 잿더미로 변했고 사서들을 보관한 춘추관이 불타 없어지는 등 문화적 피해도 막심하다. 아울러 수많은 백성들이 일본으로 잡혀가 노예가 되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도공이나 인쇄공들도 있어 일본 문화의 창달에도 기여했으니 이런 것도 문화 전파라고 할 수 있을까【그러나 주목할 것은 강제로 잡혀간 사람들도 있지만 스스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따라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쟁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당시 조선 측에 투항한 일본 병사들도 많았고, 조선의 지방 관리나 백성들 중 자발적으로 일본군 측에 협력한 부일배(附日輩)들은 더 많았다(주권국가 개념과 민족의식이 더 분명했던 20세기 초에도 자발적 친일파들이 많았으니, 400년 전에야 말할 것도 없다). 종전 후인 1604년 사명당은 일본으로 가서 전후 일본의 실력자로 떠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포로 송환 문제를 협상하는데, 자기 발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으려 했으므로 불과 3500명의 조선군 포로와 백성들을 송환해 오는 데 그쳐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조짐이 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누가 어떤 이유로 도발하느냐는 따위의 명분을 찾기보다는 어떻게든 전쟁을 막거나, 최소한 전장이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 측의 요구대로 중국 공격의 길을 내주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고 현명했다. 물론 중국에 사대하는 처지에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국익을 고려한다면 중국 측에 나름대로 변명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이를테면 조선에 현실적으로 일본의 대군을 막아낼 병력이 없다는 것은 중국으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니까). 일본군이 곱게 조선을 가로질러가지 않을 테니 나름대로 부작용은 발생하겠지만 적어도 조선이 두 열강 사이에 벌어진 대리전의 전장이 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화세계에 속했다는 허황한 자부심과 일본에 대한 근거없는 경멸감으로 가득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나라와 백성들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할 만큼 무능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20세기 초 속절없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도 그들의 그런 무능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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