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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중화세계의 막내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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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중화세계의 막내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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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세계의 막내

 

 

그래서 후금은 황해도에 주둔한 채 강화도의 피난 정부에 화의를 제안한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간단하다.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고 조선 왕실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인데, 그들이 침략해 온 이유가 뭔지를 명백히 말해주는 요구다. 즉 후금은 장차 명나라를 칠 때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다. 승전국의 입장에서 요구하는 게 그 정도라면,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다. 그러나 강화도 정부는 그것을 수락하는 데도 난항을 겪는다. 명과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라는 대의명분이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반정공신 1등인 최명길이 나서서 매듭을 푼다. 일부 주전론자가 있었지만 실력자가 주화론으로 기울면서 노선이 결정된다. 후금군이 철수하는 조건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관계가 되었고, 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 왕족 가운데 한 명을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가장 미묘한 사안인 명과의 관계 문제는 애매하게 합의된다. 기존의 사대관계는 단절하되 명에 적대하지는 않겠다는 게 조선의 입장이다. 물론 그 뜻은 장차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군대까지 동원해 가면서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인데, 후금으로서는 후방 다지기에만 성공하면 되니까 일단은 통과된다.

 

여기까지만 봐도 600년 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왔을 때와 너무도 흡사하다. 당시에도 거란은 중국의 송나라를 치기 위한 후방 다지기의 일환으로 고려를 침략했고, 고려에게 송의 연호를 쓰지 말라면서 중국과의 관계 단절을 요구했으며, 고려 정부가 그것을 수락하자 철군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의 사태 전개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거란이 물러간 뒤 고려 정부가 다시 거란에게 적대적인 자세로 돌아갔듯이 조선도 본심에서 형제관계를 맺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후금을 형의 나라로 받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전란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사실 서인 정권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정한 데다 워낙 후금의 힘이 막강해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성리학적 세계관에 골수까지 젖어 있음에도 그것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후금의 강화 조건에 크게 반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적이 물러가자 그들은 얼마 전에 닥쳤던 위기를 어느새 잊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조선의 사대부들은 기억력도 형편없다). 마치 전쟁을 유도하기라도 하듯, 조선의 그런 태도를 더욱 부추긴 것은 후금이었다.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착각한 후금은 걸핏하면 조선에게 군량을 보내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조선 북변을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오가며 백성들을 약탈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후금은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업그레이드하자고 요구해 왔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여기서 꼭지가 돌았다.

 

부모를 버리는 아픔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도 끊었다. 또 중국 침략에 사용될 걸 뻔히 알면서도 후금이 요구하는 조공도 바쳤다. 그런데 16362월 인열왕후(仁烈王后, 인조仁祖의 비)의 문상 차 조선에 온 후금의 사신들이 군신의 예를 갖추라고 강요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이 터져나왔다. 사대부(士大夫)들은 일제히 일전 불사를 외쳤고 겁쟁이 인조마저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기개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차라리 서서 죽겠다는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고결한 자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으로서 칭찬받을 덕목이지 위정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였던 레닌이 말했듯이, 정치란 환자 한 명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기술이 아니라 수백만의 목숨을 좌우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굴욕을 참지 못하겠다고 해서 이기지 못할 전쟁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기술(craft)예술(art)차이를 착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자존심은 실상 중화세계에 대한 비굴한 존경심과 비중화세계에 대한 오만한 경멸감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니, 참된 기개라 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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