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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분열 속의 발전: 고대의 강남 개발(팔왕의 난, 5호16국)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분열 속의 발전: 고대의 강남 개발(팔왕의 난, 5호16국)

건방진방랑자 2021. 6. 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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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의 강남 개발

 

권력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위는 삼국을 통일하고도 오래가지 못했다. 위는 비록 선양의 형식으로 한 제국의 뒤를 이었지만, 한 황실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받은 게 아니라 실력으로 패권을 잡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힘센 자가 나올 경우 위나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강적 촉한을 물리치는 데 빛나는 공을 세운 호족 가문인 사마씨가 곧 그 실력자로 떠올랐다. 과연 그 가문의 사마염(司馬炎, 236~290)265년 위의 원제(元帝)에게서 다시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진()을 세우고 초대 황제 무제(武帝)가 되었다.

 

춘추시대의 옛 제후국들 가운데도 서열 1위를 자랑하는 진이라는 국호를 재활용했다면 사마염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새 왕조의 최대 문제는 정통성의 확립이었다. 진 무제는 애초에 없는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 일가붙이들을 한꺼번에 제후로 봉했는데, 이게 엄청난 무리수였다. 정통성이라면 내가 근본 없는 황실과 다를 게 뭐냐? 신참 제후들은 자기 영지를 제멋대로 운영하고 아예 독립국으로 행세했다. 건국자인 무제가 죽자 그들은 즉각 팔왕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후들이 10년 넘도록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눈들이 있었다. 어느새 중원의 맞수로 떠오른 북방 민족들이었다.

 

일찍이 전국시대의 구도에서 북방 민족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한족으로 규정하고 한 제국이 세워진 이래, 북방 민족들은 오랑캐이자 한족의 영원한 적이 되었다. 한 무제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이들은 수백 년 동안 힘을 키워왔다. 4세기 초반 북방 민족들 중 강성했던 흉노와 선비(鮮卑), (), (), ()의 다섯 민족을 중국 역사서에서는 5(五胡, 다섯 오랑캐)라고 부른다. 5호는 삼국시대 60여 년간 위나라에 다소 눌렸으나 이제는 중원이 예전 같지 못하다. 이들은 차츰 자신감을 회복하고 호시탐탐 중원을 노린다.

 

중원 진출의 계기는 엉뚱하게도 초청의 형식이었다. 팔왕의 난을 일으킨 진의 어느 제후가 흉노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친다)의 전략이라고 여겼겠지만 실은 안방을 적에게 내준 격이었다. 흉노의 지도자 유연(劉淵)한 고조의 화친책으로 당시 흉노는 한 황실과 통혼해 중국 황실의 성인 유씨를 가지게 되었다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와 진을 접수하고 한 제국의 뒤를 이었노라고 선포한다. 316년 진 황실은 속절없이 흉노 앞에 무릎을 꿇고 50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 사건은 최초로 북방의 이민족에게 중원을 내준 계기였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흐름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흉노에 뒤이어 북방 민족들은 본격적으로 중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하는 439년까지 100여 년 동안 서로 다투면서 10여 개의 나라를 세운다. 다섯 오랑캐가 모두 열여섯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이 시기를 516국 시대라고 부른다.

 

 

한편 흉노에게 멸망당한 진의 귀족과 백성 들은 이듬해인 317년 강남으로 건너가 오나라의 도읍이었던 건업(建業, 지금의 난징)을 수도로 삼고 새 나라를 열었다. 뒤이어 중원이 북방 민족들의 놀이터가 되자 중원의 명문 세가와 호족 들도 속속 남하해 새 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사서는 이때부터의 진을 동진(東晋)이라 부르고, 이전까지의 진을 서진(西晋)으로 기록한다.

 

동진은 일찍이 삼국시대의 오나라가 닦아놓은 터전을 밑천 삼아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착수했다. 양쯔강 이남은 원래 기후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한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진ㆍ한 시대부터 원시적 농업을 해왔을 뿐 물을 이용한 선진적인 관개농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북에서 내려온 호족들은 이러한 유리한 환경에다 선진 농경 기술과 함께 데려온 이주민의 노동력을 결합시켜 습지와 호수만 즐비하던 강남을 비옥한 농토로 바꾸었다.

 

기술은 새것이라도 옛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토지가 늘어나자 호족들은 중원에서처럼 다시 토지 겸병에 나섰다. 그나마 이 경우에는 남의 토지를 빼앗는 게 아니라 새로 개척한 토지를 차지하는 것이므로 비교적 건전한 토지 겸병이라 하겠다. 이러한 경제적 토대 위에 중원의 선진 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강남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중원에 필적할 만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동진은 지배층이 항상 불안정하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주민 출신인 북방 귀족층과 오나라 이후 거의 토착민이 된 남방 귀족층은 수시로 대립했다(물론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뒤진 남방 귀족들이 대체로 눌려 지냈다). 게다가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생겨난 문제도 있었다. 화북을 장악하고 있는 이민족 국가들이 걸핏하면 남침해온 것이다.

 

휴전 상황에서는 자연히 군인의 입김이 세어지는 법이다. 끊임없는 남침 위협에 시달리자 동진 북부 국경의 요충지에 터전을 가진 군벌들의 발언권이 점차 강화되었다. 결국 이들이 황권(皇權)에 도전하는 일까지 터졌다. 진 한 시대부터 왕조의 말기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농민 반란이 때마침 일어나자 반란의 진압을 구실로 환현(桓玄)이라는 군벌이 제위를 찬탈했다.

 

The winner takes it all(이긴 이가 모든 것을 다 가지지)! 사랑을 묘사한 이 노래 제목은 그대로 난세의 법칙이 된다. 힘센 자가 최고라면 환현이 권력을 계속 유지할 가능성은 적다. 이윽고 북방 군벌 휘하에서 여러 차례 무공을 세운 바 있는 무장인 유유(劉裕, 363~422)가 반란들을 모조리 진압하고, 420년에 진 황실의 선양을 받아 송()을 건국한다(더 유명한 송 제국은 훨씬 후대인 10세기에 건국되는데, 중국 역사에서는 이처럼 국호가 반복되는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중원을 노리는 민족들 중원이 분열되고 약해지면서 수백 년간 눌려 지내온 북방 민족들이 기지개를 켰다. 삼국 정립기에 위의 통제를 받은 그들은 중원에 진()이라는 약한 통일 국가가 들어서자 중원을 넘보기 시작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삼국지의 막후에는

고대의 강남 개발

따로 또 같이

문화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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