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②
『조선책략』의 방침이 전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을 계기로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이 개화의 모델로 채택되었으며, 김홍집의 견해가 가장 권위 있는 개화론으로 인정되었다. 이제 개화의 과제는 민씨 가문에서 김홍집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그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부터 개화정책의 구체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청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종합 행정기관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됨으로써 향후의 개화를 주도할 제도적 중심이 생겼다. 이 길고 괴상한 이름의 기관이 맨처음 착수한 업무는 일본과 청나라의 개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홍집(金弘集)은 1881년 1월 홍영식, 박정양(朴定陽, 1841 ~ 1904), 어윤중(魚允中, 1848 ~ 196) 등 소장파 개화론자들 열두 명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구성해서 일본으로 파견한다【이름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신사유람단은 ‘신사들이 유람하는 단체’와는 전혀 무관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산업시찰단쯤 되는데, 이름이 그렇게 애매해진 이유는 당시 전국 유생들을 중심으로 개화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명의 ‘신사’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지인 부산까지 가야 했는데, 공식 직책도 그에 어울리게 ‘동래부 암행어사’였다(이들이 한양을 떠난 뒤에야 김홍집은 일본공사와 함께 ‘유람단’의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인사를 트는 게 주 목적인 수신사와는 달리 유람단원들은 각자 전문 분야를 맡고 있었고 일본에서도 실무자들과 접촉했으므로 유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성격에서 보듯이 신사유람단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정부가 유럽과 미국으로 보낸 서양 시찰단의 축소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개화 정부가 취하는 노선도 메이지 정부와 닮은꼴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과연 개화 정부는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군사적인 부문의 개혁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는다(부국강병의 대원칙이 있는 이상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예기치 못한 걸림돌이 등장한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돌아온 뒤 개화의 절차와 단계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동시에 조선에서는 기존의 유림 세력을 중심으로 개화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도 개시되었다. 대원군이 실각하고, 개화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개항이 이루어지는 등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태 속에서 한동안 망연자실했던 수구 세력은 개화가 대세로 자리잡아가는 시점에 이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절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이황의 후손으로 유림의 원로였던 이만손(李晩孫, 1811 ~ 91)이 『조선책략』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은 그 신호탄이다. 뒤이어 신사유람단이 일본으로 출발하자마자 그는 영남 지역유생들을 모아 개화를 비판하고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영남 만인소(萬人疏)다【만인소란 말 그대로 만 명이 상소장에 연명했다는 뜻이다. 1792년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탄원했던 게 최초의 만인소인데, 그때도 만 명이 넘었으니 이번 만인소는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차례의 만인소는 모두 영남 유생들의 집단창작이었다. 이황 이래 조선의 성리학계는 영남 유생들이 지배했으므로 중기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도 영남 출신의 발언권이 압도적이었던 것이다(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 정권은 사실상 내내 영남 정권이었다). 바꿔 말하면 이는 영남 지역이 그만큼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개화에 가장 앞장 서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록 도화선은 영남 지역이고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적 배경을 가진 수구적 운동이었지만, 그동안 외세의 집요한 공략으로 득보다 실이 많았다고 판단한 일반 백성들까지 지지를 보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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