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침묵한 때②
1920년대 후반 한때 유화 분위기를 보였던 일본은 전쟁 일정이 가시화되면서 다시금 탄압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다. 그 다급한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이 유사 이래 어느 억압자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교활하면서도 치졸하다는 게 문제다. 어떻게든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던 총독부는 이를 위해 우선 일본과 조선이 한몸이라는 일체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내건 구호가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와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라는 것이다(‘皇國’과 ‘內’란 물론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선일체라면 일본과 조선이 차별과 구별이 없는 공동체라는 뜻일 텐데, 어찌 보면 취지는 괜찮은 듯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공동체란 삶과 행복을 함께 하자는 게 아니라 다같이 황국의 신민으로서 공동의 의무, 즉 전쟁의 의무를 함께 나누자는 것이니 눈 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로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라면 굳이 말과 글을 따로 쓸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총독부는 1935년부터 한글 교육을 일체 금지하고,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아예 일상생활에서도 일본어만을 사용하라고 명령한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비롯하여 한글을 사용하는 신문과 잡지는 당연히 폐간되었다. 그보다 더 심한 조치는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즉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한글을 쓰지 말라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성씨를 바꾸라는 건 참을 수 없다. 조상 숭배의 오랜 전통과 유학 국가의 오랜 역사를 지녀 온 조선 사람들에게 성씨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45년 전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됐을 때보다도 더 강력한 반발이 따라야 했겠으나, 식민지의 처지인 데다 전시였으므로 그 맹랑한 조치는 그런 대로 먹혀들었다.
그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교육과 취업에서 제한을 받은 것은 물론 각종 징용과 노역을 당해야 했으므로 어지간한 강골이 아니고서는 이름을 바꾸지 않고 버티기가 어려웠다【이런 강제성이 있었기에 1940년 8월의 마감 기한까지 대상의 약 80퍼센트가 창씨개명을 했다. 해방 직후 한때 창씨개명을 했는지의 여부로써 ‘친일파’의 지표를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만약 그렇다면 한국인의 대다수가 친일파의 딱지를 붙이게 되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2의 단발령’에 용감하게 맞선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단발령(斷髮令) 때처럼 자살로 항거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자기비하적 인 뜻의 이름을 지어 불복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 글과 말을 잊어라 이름을 바꾸게 하고 조선어를 쓰는 것마저 금지할 정도라면 일본이 직전 얼마나 말기적 증상을 보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사진은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일본어를 교육하는 장면인데, 그밖에도 학생들을 시켜 집에서 부모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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