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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어느 부부의 희비극②: 을미사변&단발령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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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어느 부부의 희비극②: 을미사변&단발령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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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부의 희비극

 

 

18957월 민비 정권은 마침내 박영효를 내쫓고 친러파인 박정양과 어윤중을 내세워 3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했다민비 정권의 친일 - 친청 - 친러로 이어지는 눈부신(?) 노선 변화에서 철저한 무원칙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정권이 노선을 바꾸었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민비 정권의 변신은 자체 이념에 따른 게 아니라 언제나 적에 대한 반대로 취해졌다는 데서 일관성이 없다. 처음에는 대원군을 반대했기에 친일이었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한 급진적 개화파를 반대했기에 친청으로 돌았으며, 일본이 청나라를 제압하자 친러를 택했으니, 그 변화는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보겠다는 안간힘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 단독 주인이 된 마당에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일본이 아니다. 더욱이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얻은 랴오둥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 때문에 곧바로 토해내야 했던지라 러시아라면 원한이 깊을 수밖에 없다. 조선 정부를 친러로 선회하게 만드는 데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활약이 컸다면, 이번에는 일본 공사가 활약할 차례다. 그런 의도가 있었기에 그 무렵 일본이 조선에 새로 파견한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1846 ~ 1926)는 전의 공사들과 달리 무관 출신이었다.

 

부임한 직후 그는 승려의 신분이라고 자처하며 남산의 일본 공사관에 은거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그랬다뿐이고 비공식적인 활동은 무척 활발하다. 우선 그는 민비 정권에 반대하는 조선의 내부 세력과 접선해서 해고 직전에 있던 조선군 훈련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훈련대의 수준이 형편없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한양에 와 있던 일본의 양아치들과 상인, 기자, 통신원들까지 긁어모아 얼기설기 조폭 같은 군대를 편성했다. 그 용도는 바로 다음 달인 18958월에 드러난다. 느닷없이 경복궁을 기습한 것이다.

 

일개 깡패들을 당해내지 못할 정도라면 궁성 수비대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어쨌든 경복궁 수비대는 19791212일 새벽에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처럼 별다른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깡패들의 입성을 허락했다. 왕의 침실로 들어간 깡패들은 고종(高宗)의 옷을 찢었고 세자의 목을 칼로 후려쳤다. 다행히 세자는 죽지 않고 기절한 덕분에 살아남아 나중에 왕위까지 이을 수 있었지만 그 행운은 그의 어머니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왕비의 침실로 간 깡패들은 앞을 막아서는 궁녀들을 죽인 다음 민비(閔妃)마저 살해했다. 더욱이 그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민비의 시신을 불에 태우고 재마저 여기저기 흩뜨려 놓아 찾을 수 없게 했다. 허수아비 남편을 주무르면서 20여 년간 권세를 누리는 동시에 조선의 몰락을 재촉했던 민비는 결국 이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역사를 거스른 대가일까?

 

 

 신데렐라의 최후 한미한 가문의 딸이었다가 일약 일국의 왕비가 된 민비(閔妃)의 삶은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황후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결국 그녀는 일본 하급 무사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위 사진은 민비의 국장 장면.

 

 

일본 정부는 사건 직후 미우라와 관련 인물들을 급히 소환하고, 우발적인 범행이라며 발뺌했지만 사전 승인 또는 적어도 묵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가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에서 알아차리는 바람에 관련인물들을 재빨리 철수시켰기 때문이다(게다가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어쨌거나 숙적인 민비(閔妃)를 제거하고 뜻을 이루었다고 판단한 일본은 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김홍집(金弘集) 내각에게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속 추진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국모였던 민비를 비참하게 잃은 조선 백성들이 그 개혁을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그런 분위기에서 11월에 시행된 단발령(斷髮令)은 조선 백성들의 반일 감정을 극에 달하도록 만들었다(단발령이 시행된 날짜는 18951117일이었는데, 하필 이 날짜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날을 기해 조선은 그때까지 쓰던 음력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양력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18951117일은 양력으로 189611일에 해당한다)단발령의 표면상 이유는 위생에 좋고 편리하다는 것이었으나 어쩌면 일본이 조선 백성의 저항적 분위기를 테스트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상했던 대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손할 수 없다는 유교 예법에 따라 단발령에 대한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났는데, 주목할 것은 사대부(士大夫)들은 물론이지만 일반 백성들까지도 그랬다는 점이다. 반일 감정도 원인이겠으나 500년 동안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면서 조선사회가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으로 도배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래서 고종(高宗)과 정부 관료들이 이발을 해서 시범을 보였음에도 성리학의 골수 분자들은 문명을 야만으로 바꾸려는 조치라며 결사 반대했다. 특히 최익현은 머리를 잘릴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골수 분자답지 않게 재치있는 명언을 남겼다.

 

그 직후 조선 전역에서 일본에 반대하는 의병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조선 백성들은 아마도 전 해부터 전개된 조선의 일본화 작업보다 단발령(斷髮令)에 더 큰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다.

 

 

 단두 같은 단발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종과 세자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상투를 잘라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잘리는 것처럼 통곡했으며, 잘린 상투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는 사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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