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의 논리와 자발적 복종
여러분은 이제 국가가 국민을 위해 온갖 정책을 펼치는 이유를 알았을 겁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마치 선물인 것처럼 온갖 정책을 시행한다고 자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마치 축산업자와 소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를 기르고 있는 한 축산업자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소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그들의 잠자리를 청결하게 유지합니다. 가끔 그는 소들의 정서 안정을 위해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음악도 자장가처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의 소 사랑은 너무나 지극해서, 어떤 소가 병이라도 나면 밤새도록 간호해줄 정도지요. 자!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소가 주인의 정성에 감동해서 주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를 다지는 장면을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소들이 축산업자 주인의 음흉한 속내를 알게 된다면,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그들은 주인의 목적이 결국 자신들을 살찌우고 마침내는 도살하여 팔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런 사실을 의식적으로 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주인의 사랑을 단호하게 거부할 것입니다. 그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들은 결국 죽게 된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다면 축산업자가 기르던 소들은 점점 말라갈 것이고, 주인 자신도 끝내는 파산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들을 살찌우기 위해서, 그는 소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진짜 이유를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될 겁니다. 노자가 간파했던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사실 국가의 논리를 숙고하는 데 있어서는 동서양의 구분이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두 문명권 모두 국가 형식을 근본으로 해서 출현했기 때문이지요.
오므라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펴주어야만 한다.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야만 한다. 제거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높여주어야만 한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微明]’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 36장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노자의 생각은 다음 한 구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만일 가축업자가 노자의 말을 들었다면, 그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좋은 육질의 소고기를 얻기 위해서, 그도 정성과 사랑으로 소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노자는 이 원리가 ‘은미한 밝음’, 즉 미명(微明)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은미함(微)‘은 국가가 국민에게 시혜하는 목적이 국민에게는 은미해야 한다는 것, 즉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밝음[明]’은 통치자나 통치 계층이 자신이 국민에게 시혜하는 목적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국가가 재분배하는 이유를 국민이 알게 된다면 국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國之利器, 不可以示人]”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정치철학을 통해서 노자는 국가나 통치자들에게 일종의 우민(愚民) 정책을 제안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것은 노자의 정치철학적 통찰로부터 동양 특유의 논리, 즉 덕(德)의 논리가 파생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덕이 있다거나 혹은 덕이 없다고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덕이 있다 혹은 덕이 없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도덕성을 갖추고 있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는 말일까요?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한 실마리는 사실 ‘덕(德)’이라는 글자 자체에 있습니다. 이 한자는 두 글자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것은 ‘얻는다’는 의미의 ‘득(得)’이라는 글자와 ‘마음’을 의미하는 ‘심(心)’이란 글자입니다. 그렇다면 ‘덕’이란 글자의 의미는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 될 겁니다. 그래서 이미 한비자(韓非子, ?∼BC 233)라는 사상가도 ‘덕은 얻는 것’을 말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이 점에서 ‘덕’이란 개념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도덕성을 의미하는 ‘virtue’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동양에서는 덕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로 흔히 누구를 떠올릴까요? 이를테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대하 역사소설의 주인공 유비(劉備, 161~223)【유비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통해서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군주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덕이 있는 인물로 평가되며 아직도 외적인 통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자 상징으로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유비는 삼국 시대를 연 주역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마침내 삼고초려를 통해서 제갈량이라는 뛰어난 재상을 얻음으로써 촉나라를 창건하여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마음을 얻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을 보도록 합시다.
“저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미 부인께서는 중상을 입으셨는데, 제가 아무리 청해도 말에 오르지 않으시더니 그만 우물 속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저는 겨우 토담으로 우물을 메운 다음 공자(公子)를 갑옷 속에 품고서 간신히 포위를 뚫고 달려왔습니다.”
雲喘息而言曰: “趙雲之罪, 萬死猶輕! 糜夫人身帶重傷, 不肯上馬, 投井而死. 雲只得推土牆掩之, 懷抱公子, 身突重圍, 賴主公洪福, 幸而得脫. 適纔公子尙在懷中啼哭, 此一會不見動靜, 想是不能保也.”
말을 마치고 조자룡이 급히 갑옷을 끌러 품 안에서 아두(유비의 아들)를 꺼내보니, 아두는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아두를 받들어 유비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유비는 자신의 아들을 받아들자마자 땅바닥에 내던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나의 큰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
遂解視之. 原來阿斗正睡著未醒. 雲喜曰: “幸得公子無恙!” 雙手遞與玄德. 玄德接過, 擲之於地曰: “爲汝這孺, 幾損我一員大將!”
조자룡은 황망히 허리를 굽히고 팽개쳐져 우는 아두를 끌어 안고서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였다.
“제가 이제 간뇌도지(肝腦塗地)하더라도 주공(유비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국지연의』
趙雲忙向地下抱起阿斗, 泣拜曰: “雲雖肝腦塗地, 不能報也!”
여러분은 방금 유비가 어떻게 조자룡이란 용맹한 무장의 마음을 얻었는지 보았을 겁니다. 유비는 조자룡에게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조자룡은 엄청난 적병 속에서 유비의 부인과 아들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만약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는 유비의 어떤 책망도 감수해야 할 판입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는 유비의 아들, 즉 유선(劉禪)을 구하는 데는 성공합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지요. ‘아두(阿斗)’라는 아명으로 불리는 유선은 훗날 촉나라의 황제가 되는 유비의 장남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주군(主君)인 유비의 부인을 지키지 못한 죄 때문에 조자룡의 마음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죽음의 형벌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비는 조자룡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의 죄를 따지기라도 했습니까? 유비는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장남을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조자룡에게 이야기합니다.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나의 큰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 이로써 유비는 조자룡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는 데 성공한 셈입니다. 자신의 대권을 물려받을 장남보다 조자룡을 아낀다는 마음을 그에게 분명히 보여주었으니까요. 유비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아마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방금 살펴본 조자룡과 제갈량(諸葛亮, 181~234) 정도일 것입니다. 유비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시혜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마치 자본가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에만 투자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유비는 조자룡에게 뜻밖의 은혜를 베풂으로써, 그가 평생 동안 유비와 그의 아들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이제 유비는 조자룡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지요. 조자룡은 자신의 충성이 외적인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유비의 은혜는 조자룡으로 하여금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주어야만 한다’는 노자의 원리, 즉 수탈하기 위해서는 재분배해야 한다는 국가의 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비는 아마 이 원리를 가장 성공적으로 실행에 옮긴 정치가였을 겁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유비의 자(字)가 ‘현덕(玄德)’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현덕’이란 말은 노자가 지은 『도덕경』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로, ‘검은 덕’은 다른 사람이 그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일견 어두워 보이는 덕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유비만큼 스스로 ‘은미한 밝음’의 논리를 잘 실현시킨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