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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1장 잠행자 혹은 외로운 늑대, 달빛 그리고 고독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1장 잠행자 혹은 외로운 늑대, 달빛 그리고 고독

건방진방랑자 2021. 7. 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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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그리고 고독

 

 

대상을 투시하는 예리한 시각, 끈적하게 들러붙는 촉감적 능력은 잠행자만의 특이성이다. 대열을 일탈하여 솔로로 움직이고, 대열이 잠들 때 깨어 움직이는, 말하자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리듬 속의 엇박같은 존재. 그는 새벽을 도와 먼저 떠나거나 아예 뒤떨어져 떠난다.

 

사행단의 또 다른 책임자인 부사(副使) 및 서장관과는 압록강에서 120리나 되는 책문을 지나 어느 민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인사를 나눌 정도이다. 연암답게 타국에 와서 이렇게 서로 알게 되니 가히 이역(異域)의 친구로군요[定交於他國 可謂異域親舊].”라는 농담을 잊지 않는다.

 

그뿐인가. 설령 함께 거리에 나섰다가도 온갖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면밀히 주시하다 보면 일행들이 버리고 떠나기 일쑤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무리 속에서 움직이고, 무리와 더불어 웃고 떠들고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어내지만, 늘 혼자다. 무리 가운데 홀로 떨어진 외로운 늑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뒤, 열하에 도착한 날 기진맥진한 몸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나 달이 밝은데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으랴. (중략) 홀로 뜰 가운데 서서 밝은 달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담 밖에서 할할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장군부에 있는 낙타가 우는 소리다. (중략)

月明如此 不飮而何? (중략) 獨立庭中 仰看明月 有聲喝喝牆外 此駝鳴將軍府也

 

오른편 행각(行閣)에 들어가 보니, 역관 셋과 비장 네 명이 한 구들에 엉켜 자는데 목덜미는 엇갈리고 정강이를 서로 걸친 채, 아랫도리는 가리지도 않고 있다. 모두들 천둥 소리를 내며 코를 골아댄다. 어떤 놈은 고꾸라진 병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 같고, 어떤 놈 은 나무를 켤 때 톱니가 긁히는 소리 같고, 또 어떤 놈은 혀를 차며 사람을 꾸짖는 소리 같고, 어떤 놈은 킁킁거리며 남을 원망하는 소리 같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入右廊 三譯四裨 同宿一炕 交頸連股 不掩下軆 無不雷鼾 或如倒壺水咽 或如引鋸齒澀 或嘖嘖叱人 或喞喞埋怨

 

 

모두들 정신없이 잠에 골아떨어진 걸 보고서, “뜰 가운데를 거닐기도 하고, 달려보기도 하고 혹은 간격을 맞춰 걸어보기도 하면서 그림자와 더불어 한참을 희롱하였다[徘徊庭中 或疾趨或矩步 與影爲戱].” 천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자기 그림자와 노는 자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때는 바야흐로 삼경이고 명륜당 뒤의 늙은 나무들은 그늘이 짙고, 서늘한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서 잎마다 구슬을 드리운 듯, 구슬마다 달빛이 어리었다. 그의 서글픈 탄식소리. “아아, 슬프구나.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可惜良宵好月 無人共翫].”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녹초가 될 대로 된 몸이건만 달빛을 그저 놓치기 아까웠던 것이다.

 

그는 정말 달빛을 좋아한다. 열하일기곳곳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달빛 소나타를 음미해보라. “저녁 뒤에 달빛을 따라 가상루에 들러서 여러 사람을 이끌고 함께 예속재에 이르렀다. 마침 전생이 손에 붉은 양각등을 들고 들어와서 곧 가기를 재촉하므로, 이생과 함께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문을 나섰다. 한길이 하늘처럼 넓고 달빛은 물결처럼 흘러내린다[田生手持紅色羊角燈入來 促余偕行遂與李生 含烟出門 大道如天 月色如水].” “이날 밤 달빛이 낮같이 밝고 더위는 이미 한물간 모양이다. 저녁 뒤에 곧 밖으로 나가서 아득히 먼 들을 바라보니, 푸른내는 땅에 깔리고 소와 양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중략) 이상스런 화초가 달빛 아래 얽히어 있다[是夕月色如晝 暑氣已退 飯後卽出 瞭望遠野 蒼烟鋪地 牛羊各歸 (中略) 奇花異艸 交映月中].”

 

열하에서 만난 중원의 선비들에게 월세계나 자전론 등 논변을 펼치는 것도 달빛 아래서였다. 기공(奇公, 기풍액)이 연암을 이끌고 나와서 달을 구경하는데, 이때 달빛이 대낮같이 밝았다. 연암은 만일 달 속에도 세계가 있다면, 오늘 이 밤에 어떤 두 명의 달 세계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지구를 바라보면서 땅빛의 차고 기우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月中若有一世界 自月而望地者 倚立欄干下 同賞地光滿月邪]?”하니, 기공이 난간을 치면서 기이한 말이라 감탄해 마지않는다. 이어지는 연암의 대구, “제 친구 홍대용(洪大容)은 지식이 한량 없이 깊고 넓어서 일찍이 저랑 달구경을 하면서 장난삼아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답니다.” “나 역시 오늘 밤 달구경을 하다가, 문득 그 친구 생각이 나서 한바탕 말을 늘어놓았을 뿐입니다.”

 

열하를 떠날 때, 중국의 선비 통상대부 윤가전(尹嘉銓)은 술잔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서 훗날 선생이 그리울 적에 저 달을 보며 만 리 밖에 계신 선생을 본 듯하겠노라고 한다. 이렇듯 달빛은 그의 벗이자 철학적 필드이며, 만남과 이별의 배경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달빛을 함께할 친구들은 정말 흔치 않았다. 그래서 달빛이 밝을 때면 그의 고독 또한 더욱 깊었다.

 

 

달밤

연암은 달밤을 사랑했다. 달빛 속에서 친구를 만났고, 달빛을 받으며 술잔을 기울였고, 달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춤을 추기도 했다. 고독한 잠행자 연암에게 있어 달빛보다 더 든든한 은 없었을 터, 때론 그 자신이 달빛의 일부이기도 했다.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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