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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서설 - 9. 주희의 사서운동(四書運動)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서설 - 9. 주희의 사서운동(四書運動)

건방진방랑자 2021. 9. 1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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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9. 주희의 사서운동(四書運動)

 

 

주희, 대학중용을 장구화하다

 

그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잘못되어가는 문명을 바로잡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 문명을 만들어야겠다는 근본적인 걱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아주 강력한 윤리주의를 들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중용(中庸)의 첫머리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주자가 이것저것 고민하면서 십삼경(十三經)을 들여다보다가 예기31장에 있는 중용(中庸)의 첫머리를 보고 쇼크를 받은 거예요. 하늘(Heven)이 명령하는 것, 그것이 성()이라는 거예요. 이때 주자의 눈에 들어온 성()이란 것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moral nature)입니다. ‘하늘이 인간에게 도덕성을 이미 부여했다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불교의 초윤리적인(trans-ethical) 메시지와는 전혀 달라요.

 

그래서 중용(中庸)을 본 주자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했고 중용(中庸)으로 문제를 다시 풀어서 문명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ㆍ당()에서 비롯하여 주자가 살고 있던 송()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영향으로 지성인들이 너무 타락하고 너무 풀어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주자는 어떠한 새로운 질서(order)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주자에게 어필된 것이 예기(禮記),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인데 논어(論語), 맹자(孟子)에는 집주를 했고 대학(大學), 중용(中庸)은 장구(章句)를 했습니다.

 

()이라는 것은 챕터(Chapter)이고 구()라는 것은 단락(Paragraph)을 말하는데, 예기(禮記)에 있던 대학과 중용(中庸)이란 텍스트를 보니 쭉 붙어있고 너무 복잡해서 주자가 직접 장()과 구()로 나누어 분류를 해서 편집한 것이죠. 여러분들은 장구(章句)라는 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의 장구(章句)라는 말은 주자 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주자가 비로소 장구화(章句化) 함으로써 성립한 주자의 고유명사인 것입니다.

 

 

[대학]과 [중용]은 [예기]의 한 편으로 주희는 이걸 빼내어 단행본으로 재편집하며 만들었다. 

 

 

 

집주작업을 통해 변혁을 꿈꾸다

 

중용(中庸)을 자세히 보면 장구(章句)의 장()처럼 나누어질 만합니다. 1장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부터 만물육언(萬物育焉)’까지가 1장이 될 수밖에 없는 내용과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옛날 예기(禮記)를 쓴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구의 개념은 없었지만, 중용(中庸)의 내부구조에 있는 리듬을 주자가 잘 파악해서 재정립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는 논어(論語), 맹자(孟子)에 대해서 이전의 모든 주를 모으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집주(集註)라는 것도 주자의 고유명사이므로 일반명사처럼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앞에 사서(四書)라는 말이 없이 집주(集註)라고만 해도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말하는 줄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집주(集註)라는 말은 다른 경우에는 쓸 수 없거든요.

 

주자라는 사람은 사서집주(四書集註)를 통해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며 결국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사서집주(四書集註)가 거의 7세기동안 동아시아 문명을 지배한 것입니다. 실지로 여러분들에게 고전으로서 다가온 것은 당대에 성립된 13경이 아니고 주자가 재정립한 사서집주(四書集註)아닙니까? 그러므로 사서(四書)라는 것은 완전한 새로운 운동(New Movement)이며 지성사에서 아주 유일(unique)한 새로운 문명의 굴레바퀴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자는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내면서 자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해석학(hermeneutics)적인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이른바 해석학적 제2기원)해석학적 제1기원 : 공자가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술이부작(述而不作)’한 사람일 뿐이라고 했지만, ()’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사실상 새로운 ()’을 했으며, 그 작()을 한 것. / 해석학적 제2기원 : 사서(四書)운동이라는 ()’을 통하여 신유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한 것.

 

 

주를 모았다는 뜻의 집주라는 말도 주희가 만든 말이다.

 

 

 

주희의 해석을 전범으로 삼지 말고 사서운동의 정신으로 읽어라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읽을 때에는 어디까지나 주자의 생각을 나타내는 패러다임으로 봐야지 거꾸로 이것을 사서(四書)에 대한 유일한 해석(the interpretation)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서집주(四書集註)는 사서에 대한 하나의 해석(a interpretation)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서집주(四書集註)의 해석을 사서에 대한 유일한 해석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 전형적인 때가 조선시대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이 ‘the’‘a’로 바꾸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사서(四書)를 읽는다는 것은 주자의 것을 단지 읽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주자가 일으켰던 것과 같은 우리의 혁명을 일으켜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역사라는 게 돌고 돌거든요? 주자가 불교라는 외래문명에 대해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려고 노력한 운동이 바로 사서운동이었고 7세기동안 동아시아문명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다시 서구의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외래문명에 의해 깨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에 의한 찬란한 수()ㆍ당() 문명과 같이 서구의 계몽주의 패러다임으로 대한민국 문명을 만든 것이죠. 그런데 여기 살고 있는 우리는 또다시 이것을 비판하고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서 사서(四書)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럴 적에는 주자가 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집주(集註)’가 나오겠지만 또한 우리는 주자의 집주(集註)도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에는 이런 식으로 리드미컬한 반복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면 역사라는 게 너무 반복을 되풀이해서 재미가 없는데 다 때려치우고 완전히 쌩으로 새 것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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