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2. 지향점과 교육
교육이란 판단의 체계
교육이라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옛날과 오늘이 다르죠. 많은 사람들이 교육이란 게 뭔지 몰라요. 교육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새끼를 훈련시키는 것이지만, 역시 인간사회의 교육은 동물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즉, 교육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판단(judgement)의 체계입니다. 사실 교육이라는 것은 순간순간 내 자식이 이러이러한 행동을 할 적에 내가 그 상황에 맞춰 어떠한 판단을 내리느냐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근데 상황에 맞춘 판단이라는 것은 상당히 감성적이고 즉각적이예요. 부모가 자식을 가르친다는 것은 순간순간 닥치는 상황에 대해 감성적 체계에 의해 매순간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지배적입니다. 이성적으로 따지고 하는 것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느릴 때가 많단 말이죠.
그런데 동물이 새끼를 교육시키는 것은 감성적인 판단력 체계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거든요. 어떻게 뭘 먹고 먹이를 어떻게 낚아채고 하는 것을 순간순간에 가르치고 따라서 하고 그러다보면 크는데. 이것은 사실 상당히 자연적입니다. 이에 비해 이성의 체계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걸 넘어서는 차원이에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러한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는 이성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결국 문명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게 되지요. 고오베 문제도 나왔지만, 만약 그 지진 난 곳이 자연 속의 숲이었고 거기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떨어져 살았다면 그 정도로 엄청난 피해는 없었겠죠. 그런데 인간은 땅위에다 문명을 건설했고 어차피 그 문명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길러내야 하는 것은 그 문명 속에 사는 인간 아닙니까? 이게 교육이 아니예요. 교육은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것만이 아니라 문명 속에 사는 인간을 기르는 문제까지 아울러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희랍의 교육, 전사 육성
그러면 교육적 판단의 기준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정해지겠습니까? 이 문명이 어떠한 모습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겠지요. 근데 그 문명이 지향하는 모습은 시대에 따라 항상 달라요. 생각해 보세요.
희랍사상에서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 나오는 교육론을 보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론과 전혀 다릅니다. 왜? 플라톤이 살고 있던 시대가 지향하려던 모습이 뭐예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전쟁을 완벽하게 수행하느냐?’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폴리스(police) 전쟁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이 고민을 통해서 희랍교육의 최대의 목표가 정해졌겠죠? 가장 위대한 워리어(Warrior), 전사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거예요. 갓(god)이 아닌 워리어를 말이지요. 그러니까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보면 실제로 어떻게 교육하라고 나와 있습니까? 새끼 낳은 걸 갖다가 절벽에서 떨어뜨립니다. 새끼부터, 싹부터 시원찮은 녀석들 싹 죽여가지고 자연도태 시켜라! 이런 뜻으로 말이예요. 지금도 그때처럼 한다면 나 같은 놈은 벌써 옛날에 갔겠지요. 난 워낙 난산으로 태어나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살 가망이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나를 쓰레기통에 내버렸었는데 내가 우는 걸 보고 다시 꺼냈거든요. 어떻게 보면 모두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살아났으니, 그런 의미에서 나도 쎈 놈이긴 하네요. 하여튼 희랍교육을 보면 그들이 생각하는 교육의 개념과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의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남녀를 발가벗기고 말이지.
이러한 희랍교육 사상의 잔영을 여전히 지금도 서구라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버트란드 럿셀이 교장할 적에 애들을 모두 사그리 발가벗기고 농구를 시키는 따위의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기자들이 와가지고 그 교육현장을 취재하는데, 애들이 농구하다가 우루루 발가벗은 채로 달려 나가니깐 기절초풍을 해가지고 신문에 대서특필하고 이래서 러셀이 영국에 쫓겨가게 된 일도 있어요. 이렇게 서구라파에는 상당히 교육에 대한 래디칼한 실험(experimentation)이 많습니다. 알아두세요, 희랍문명과 War!
교육엔 그 시대의 지향점이 담긴다
자, 이러다가 중세기에 오면 어떻게 되요? 모든 중세기 교육의 이상적인 목표라는 게 어떻게 돼있겠어요? 중세기 교육은 종교적으로 완벽한 목사를 길러내는 게 전부예요. 그러면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조 교육의 이상이라는 게 뭐가 되겠습니까? 알고 보면 조선조의 교육이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조선조가 지향하던 사회의 모습에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게 전부가 되니깐요. 그럼 조선조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뭐예요? 선비지요. 그러면 그 선비란 뭡니까? 행정관료죠. 그러니깐 조선조가 지향하는 교육의 이상은 선비를 길러내는 것이 됩니다. 사(士), 선비라는 것은 관료이고 요새말로 하면 공무원인데, 공무원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타락하지 않아야 하겠죠? 얘네들이 타락하지 않으려면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질서를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관료에게 어떻게 하면 도덕적 질서를 줄 것인가 하는 고민은 그 시대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가진 문명 속에서 나온 유교, 중용론(中庸論), 이런 걸 보면 모두 도덕주의에 기초해서 인간을 기를려고 하지요. 이렇게 조선조의 도덕주의에 기초한 교육론은 요즘의 교육론과는 아주 다릅니다.
어떤 시대의 교육론을 알려면, 우선 역사적 맥락에서 그 시대가 지향하는 문명의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우리가 지향하는 교육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 문명이 어떠한 모습을 지향하고 있느냐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겠지요. 즉 현대문명이 지향하는 모습이 결국 현대교육의 기준을 결정한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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