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1. 고베 대지진 애도사(哀悼辭)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신문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시피 지금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지진을 직접 겪어봐서 잘 아는데 그 지진이라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죠. 우리가 서있는 땅을 믿을 수 없다는 것,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참. 여러분들은 실제로 경험을 한 번 해봐야 이해할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 지진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일본 문화, 그리고 일본사람들의 국민성이라는 것은 지진을 빼놓구선 이해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그렇게 지진이 자주 일어나도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흔들리거나 망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일본은 지진을 당하면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죠. 하여튼 관동대지진 때, 일본은 그 지진 속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한국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 이래 가지고 한국인을 엄청나게 죽였는데, 그런 과거를 생각하면 ‘요번 지진 때도 그런 관동지진 때와 같은 학살이 일어나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어느 정도 개화되어 일본이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리는 없고 신문에서도 보도하듯이 질서정연한 구조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학생들은 이런 참사를 볼 때 민족감정을 앞세워서, 남의 일처럼 대할 게 아니라 항상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지고 죄 없는 사람들이 자다가 하루아침에 당한 고통스런 현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수돗물이 하루 안 나와도 엄청나게 불편한 문명의 현실을.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 봤을 적에 우리는 모두 문명을 걸머지고 사는 하나의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그들의 괴로움을 나눠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강의 들어가기 전에 고베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두 묵념을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다 같이 일어서서 묵념하도록 하지요. 묵념.
이웃나라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4천여 명이 생명을 잃고 도시전체가 폐허가 돼 버린, 전후 최대의 피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원래가 지형적으로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생각과 함께 묘한 민족감정이 얽혀있어,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소박한 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왠지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지 않는 것을, 부끄럽지만 어쩌면 솔직한 심정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원폭 수십 개분의 힘으로 밀어닥친 대지진은 전쟁 상황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참사임에도, 이미 끔찍한 대형사고를 사흘이 멀다하고 겪어온 우리들의 딱딱하게 굳은 감성은, 남의 나라 일에 경악하고 혀를 차는 것조차 새삼스럽게 여길 만큼 불인(不仁)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 도올서원의 사람들은 이번 지진의 참화를 계기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이 어디로 진행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고자 합니다. 자연과 문명이 부딪치는 가장 곤혹스런 접점에서, 우리 삶의 양식을 깊이 돌이켜 보고 성찰하는 자세를 익힐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사회를 개변(改變)해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천지(天地)가 열리면서, 위에서 세상을 덮고 있는 하늘과 짝하여 아래에서 만물을 싣고 있는 어머니의 땅이 생겨날 때, 그 속에는 자연의 힘이 항상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그 힘은 인류의 곁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고, 삶의 기초적 조건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인류가 모듬살이를 시작하고 지혜가 쌓이게 되자, 사람들은 자연을 관찰하고 예측하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다스릴 줄도 알고 피할 수 없는 사태는 미리 대비할 능력도 키웠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룩한 문명의 울타리 속에 안주하면서 인간 전체의 몸뚱이는 점점 비대해졌고 동시에 자기 몸뚱이를 지탱하기 위한 지혜도 늘어만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 끔찍한 대지진을 보십시오. 일본문명이 인류가 추구하는 과학기술에 뒤떨어져서가 아닙니다. 일본 국민이 급작스런 천재지변에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현대 인간의 지혜의 결정인 첨단과학 문명을 기반으로 거의 완벽한 대비책을 구축했다고 자타가 인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번 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을 더욱 당혹스럽고 더욱 두렵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우리가 목표로 하는 현대도시문명의 상징이던 고층빌딩, 밀집된 인구, 거대한 고가도로망, 많은 인구를 부양키 위해 도심에 집중된 에너지 탱크는 한번 터져 나온 재앙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팽팽한 고무풍선을 바라보는 긴장감마저 느끼게 되는 우리 문명의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비대한 공룡을 연상합니다. 미세한 자극에도 적응하기가 어려운, 허약체질의 현대문명을 발견합니다.
우리 도올서원의 사람들은 동일한 문명의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지진의 참화에 고귀한 생명과 삶의 구체적 환경을 잃어버린 수천, 수만의 고베 시민들, 그리고 우리 교민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괴로움과 절망감을 한 자락이라도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바꾸어보는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같은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문명 속의 삶의 양식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출발점이 되리라 믿습니다.
1995.1.18 도올서원 재생
자, 재생 전종욱 군의 애도사를 끝으로 묵념을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열시부터 황병기 선생님의 국악강좌가 있겠습니다. 상당히 좋은 강좌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전까지 중용(中庸)을 잠깐 하겠어요. 그리고 지난번의 귀신장(鬼神章)은 여러분들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여깁니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충분한 강의는 못했어도 기본. 핵심적인 내 생각은 전달했는데, 귀신장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니깐 내 지난번 강의를 깊게 검토를 해보도록!
17장 2. 지향점과 교육
교육이란 판단의 체계
교육이라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옛날과 오늘이 다르죠. 많은 사람들이 교육이란 게 뭔지 몰라요. 교육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새끼를 훈련시키는 것이지만, 역시 인간사회의 교육은 동물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즉, 교육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판단(judgement)의 체계입니다. 사실 교육이라는 것은 순간순간 내 자식이 이러이러한 행동을 할 적에 내가 그 상황에 맞춰 어떠한 판단을 내리느냐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근데 상황에 맞춘 판단이라는 것은 상당히 감성적이고 즉각적이예요. 부모가 자식을 가르친다는 것은 순간순간 닥치는 상황에 대해 감성적 체계에 의해 매순간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지배적입니다. 이성적으로 따지고 하는 것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느릴 때가 많단 말이죠.
그런데 동물이 새끼를 교육시키는 것은 감성적인 판단력 체계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거든요. 어떻게 뭘 먹고 먹이를 어떻게 낚아채고 하는 것을 순간순간에 가르치고 따라서 하고 그러다보면 크는데. 이것은 사실 상당히 자연적입니다. 이에 비해 이성의 체계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걸 넘어서는 차원이에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러한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는 이성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결국 문명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게 되지요. 고오베 문제도 나왔지만, 만약 그 지진 난 곳이 자연 속의 숲이었고 거기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떨어져 살았다면 그 정도로 엄청난 피해는 없었겠죠. 그런데 인간은 땅위에다 문명을 건설했고 어차피 그 문명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길러내야 하는 것은 그 문명 속에 사는 인간 아닙니까? 이게 교육이 아니예요. 교육은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것만이 아니라 문명 속에 사는 인간을 기르는 문제까지 아울러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희랍의 교육, 전사 육성
그러면 교육적 판단의 기준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정해지겠습니까? 이 문명이 어떠한 모습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겠지요. 근데 그 문명이 지향하는 모습은 시대에 따라 항상 달라요. 생각해 보세요.
희랍사상에서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 나오는 교육론을 보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론과 전혀 다릅니다. 왜? 플라톤이 살고 있던 시대가 지향하려던 모습이 뭐예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전쟁을 완벽하게 수행하느냐?’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폴리스(police) 전쟁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이 고민을 통해서 희랍교육의 최대의 목표가 정해졌겠죠? 가장 위대한 워리어(Warrior), 전사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거예요. 갓(god)이 아닌 워리어를 말이지요. 그러니까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보면 실제로 어떻게 교육하라고 나와 있습니까? 새끼 낳은 걸 갖다가 절벽에서 떨어뜨립니다. 새끼부터, 싹부터 시원찮은 녀석들 싹 죽여가지고 자연도태 시켜라! 이런 뜻으로 말이예요. 지금도 그때처럼 한다면 나 같은 놈은 벌써 옛날에 갔겠지요. 난 워낙 난산으로 태어나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살 가망이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나를 쓰레기통에 내버렸었는데 내가 우는 걸 보고 다시 꺼냈거든요. 어떻게 보면 모두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살아났으니, 그런 의미에서 나도 쎈 놈이긴 하네요. 하여튼 희랍교육을 보면 그들이 생각하는 교육의 개념과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의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남녀를 발가벗기고 말이지.
이러한 희랍교육 사상의 잔영을 여전히 지금도 서구라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버트란드 럿셀이 교장할 적에 애들을 모두 사그리 발가벗기고 농구를 시키는 따위의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기자들이 와가지고 그 교육현장을 취재하는데, 애들이 농구하다가 우루루 발가벗은 채로 달려 나가니깐 기절초풍을 해가지고 신문에 대서특필하고 이래서 러셀이 영국에 쫓겨가게 된 일도 있어요. 이렇게 서구라파에는 상당히 교육에 대한 래디칼한 실험(experimentation)이 많습니다. 알아두세요, 희랍문명과 War!
교육엔 그 시대의 지향점이 담긴다
자, 이러다가 중세기에 오면 어떻게 되요? 모든 중세기 교육의 이상적인 목표라는 게 어떻게 돼있겠어요? 중세기 교육은 종교적으로 완벽한 목사를 길러내는 게 전부예요. 그러면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조 교육의 이상이라는 게 뭐가 되겠습니까? 알고 보면 조선조의 교육이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조선조가 지향하던 사회의 모습에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게 전부가 되니깐요. 그럼 조선조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뭐예요? 선비지요. 그러면 그 선비란 뭡니까? 행정관료죠. 그러니깐 조선조가 지향하는 교육의 이상은 선비를 길러내는 것이 됩니다. 사(士), 선비라는 것은 관료이고 요새말로 하면 공무원인데, 공무원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타락하지 않아야 하겠죠? 얘네들이 타락하지 않으려면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질서를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관료에게 어떻게 하면 도덕적 질서를 줄 것인가 하는 고민은 그 시대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가진 문명 속에서 나온 유교, 중용론(中庸論), 이런 걸 보면 모두 도덕주의에 기초해서 인간을 기를려고 하지요. 이렇게 조선조의 도덕주의에 기초한 교육론은 요즘의 교육론과는 아주 다릅니다.
어떤 시대의 교육론을 알려면, 우선 역사적 맥락에서 그 시대가 지향하는 문명의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우리가 지향하는 교육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 문명이 어떠한 모습을 지향하고 있느냐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겠지요. 즉 현대문명이 지향하는 모습이 결국 현대교육의 기준을 결정한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17장 3. 도덕주의화 되기 전의 성(聖)
현재의 교육 목표, 시민 양성
자, 그렇다면 오늘날 인류문명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모습이 과연 뭐냐? 현대 문명이 지향하는 모습에 걸맞는 인간상이란 도대체가 뭡니까? 선빈가요? 한마디로 말하면, ‘시민(citizen)’입니다. 현대사회, 근세국가에서는 시민이라는 이 시티즌을 기르자는 것이 교육의 목표예요. 때문에 교육의 목적이라든가 방법은 시티즌이 어떠한 덕성을 함유하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하겠죠. 그러나 다시 강의 내용으로 돌아가자면, 여기서 말한 바대로 효, 이 효라는 개념은 과거에 조선조가 기르려고 했던 인간의 모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성이었습니다.
“순 기대효야여 덕위성인 존위천자(舜 其大孝也與 德爲聖人 尊爲天子)”
야(也)는 아시겠죠? 야(也)는 일단 단정하듯 말해놓은 것이고 여(與)는 약간 감탄적으로 이 말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그 다음, ‘존위천자(尊爲天子) 하시고’에서 존위(尊爲)를 보면 높을 존(尊)자니깐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깐 순이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이 되겠죠. 근데 ‘존위천자(尊爲天子)’ 앞의 ‘덕위성인(德爲聖人)’에서 내가 중요한 얘기를 하나 해야 겠습니다. ‘덕위성인’에서 성인(聖人)이라는 말이 중요하거든요.
사마천의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보면 사마천이 공자의 집안 내력을 읊는데 “공자라는 사람은 들판에서 아버지 숙량흘이랑 안씨녀하고 야합해가지고 낳은 사생아같은 놈이다[紇與顔氏女野合 而生孔子]”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깐 이 공자라는 사람은 ‘형편없는 집안의 볼품없는 놈’이라고 사마천은 있는 그대로 리얼하게 씁니다. 또, 사마천은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뭐라고 하냐면 “공자의 조부(祖父)가 성인(聖人)이었다[孔丘, 聖人之後]”는 말을 합니다. 공자의 조부(祖父)가 성인(聖人)이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아요? 공자의 조부가 성인이었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냐고? 내가 2림때 강의를 했었던 것 같은데, 암튼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조부가 성인이었다”는 말에서 성인(聖人)이라는 단어의 용법을 여러분은 잘 유념해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성인이라는 개념과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성인이라는 개념은 다르기 때문이예요. 현대 우리가 생각하는 성인의 개념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man of moral perfection)’이라는 말이잖아요? 그런 모랄 퍼펙션((moral perfection)으로서의 성인은 후대에 와서는 보통 공자로 생각한단 말예요. 그렇다고 해서 「공자세가(孔子世家)」 전대(前代) 작품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엄연한 공자 후대(後代) 작품인데, 그 책에서 공자의 조부가 성인이었다는 말이 도대체가 이상하다고.
공자는 무당집안에서 태어났다
좀 우습기도 한데, 그때 성인이라는 말은 직업이예요, 직업! ‘공자의 조부가 성인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다’는 이런 얘기예요. 그러면 도대체 성인이라는 직업이 뭐냐? 우선 ‘성(聖)‘이라는 글자를 보면 이(耳)가 있잖아요. 갑골문에서도 나오지만 성인의 ‘성(聖)’에서 이(耳)를 보면 성인은 귀가 밝은 사람, 귀로 뭐를 듣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즉, 무슨 말이냐 하면 성인은 시탁(神託)을 듣는 사람, 무당이다 이 말이예요. 한마디로 말해 공자 집안사람들은 그 조부로부터, 무당 집안에서 나온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공자의 집안이 무당 집안이었기 때문에 “공자라는 아이는 들판에서 무당끼리 야합해서 낳은 애다”라고 사마천은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공자’의 이름이 짱구가 된 것도 뭐겠어요? 무당들의 자손들은 대개 어려서 머리 위를 깎는 데 그렇지 않아도 머리 위가 편편하게 생긴 공자는 머리카락까지 깎았으니 더 편편하게 생긴 짱구처럼 보였겠지요. 사실 공자가 짱구니 뭐니 하는 것도 다 무당집안과 관계가 있는 겁니다.
자, 이렇게 공자의 집안을 고려해 보면, 공자가 예(禮)에 관심을 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김금화씨라든가 하는 사람들을 보면 상례(喪禮)와 같은 상당히 복잡한 예(禮)를 많이 알고 있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무당집 자손이었던 공자는 집안의 영향을 받아 자꾸만 예(禮)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겁니다. 요새 유가(儒家) 형성과정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아규먼트(Argument, 논쟁)로서 “공자가 예(禮)에 관심을 보인 기록들이 훗날 유가(儒家)가 형성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어요.
어찌되었든 간에 과거 문헌에서 나오는 이 성인이라는 말은 유교가 후대에 도덕주의화하기 전의 무당이라는 의미임을 머리 속에 집어넣으세요. 그럼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인의 뜻이 무당이라는 의미에서부터 점점 변화되는데, 후대에 와서 성인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무당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떤 문명의 최초 질서를 만든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사실, 제정일치 시대의 무당이라는 것은 요새 생각하는 무당이 아니라, 그 시대 ‘문명의 질서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덕위성인(德爲聖人)하시고’에서 나오는 성인이라는 것은 문장의 톤(Tone)으로 볼 적에 무당으로 보기는 어렵단 말이지요. 그러니깐 이 문장 자체로 봐서는 어떻다는 말이 되겠어요? 중용(中庸)의 문체가 후대에 유가(儒家)가 덕치주의화된, 그러니까 유가(儒家)가 모랄라이즈(Moralized)된 후의 문체니깐, 중용(中庸)이라는 책은 공자 시대보다 상당히 역사적으로 시간이 흐른 후대에 완성되었다고 봐야겠죠.
17장 4. 효를 통해 유지된 질서
子曰: “舜其大孝也與! 德爲聖人, 尊爲天子, 富有四海之內, 宗廟饗之, 子孫保之. 공자가 말하기를, 순임금은 대효이실 것이다. 덕으로서는 성인이 되었고 지위로서는 천자가 되었고 부는 사해의 안을 소유하시어, 종묘가 舜을 흠향하고 자손이 舜을 보존했다. 子孫, 謂虞思ㆍ陳胡公之屬. 자손이란 우사와 진나라 호공과 같은 순임금의 자손들을 말한다. |
‘자왈 순 기대효야여(子曰 舜其大孝也與).’ 바로 이 부분에서 나오는 효(孝)라는 것이 내가 전번에 얘기한 교육이라는 문제와 함께 얘기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유교의 가장 중요한 파라곤(Paragon, 표본)으로 규정되는 순임금을 보면, 이 순임금이 순임금다울 수 있도록 하는 덕성의 내용이 바로 대효(大孝)입니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여기서 효라는 것은 단순히 자식이 아버지께 효도한다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니예요. 유교사회에서는 사회제도의 가장 궁극적인 질서를 훼밀리(Familly)로 본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문명 속의 패밀리라는 것은 자연 속의 패밀리와는 아주 달라요. 자연 속의 패밀리는 전번에 말했듯이, 새끼가 사회화(socialize)될 동안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해체되는 것이지만, 문명속의 패밀리라는 것은 하나의 제도예요. 즉, 인간이 만든 인위적 질서입니다.
그러니깐 유교문명에서 패밀리를 가장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 뭐냐 하면 바로 처치(Church)예요. 쉽게 기독교 문명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교회라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그 교회의 목사가 누구죠? ‘아버지’가 되겠지요. 그런데 기독교의 교회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개념을 무엇으로 볼 수 있습니까? 신앙이라는 ‘빌리프(belief)’가 핵심이지요. 하나님이 나의 구주라는 것을 내가 믿는다는 그런 전제가 신앙인데, 예를 들어 세례를 받을 때를 보세요. 이런 신앙을 내가 믿는다는 약속을 하고 들어가잖아요? 그런 약속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교회라는 공동체의 에토스(Ethos)는 빌리프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효라고 하는 개념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단순히 어버이께 효도하는’ 그런 게 아니예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효라는 개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빌리프와 같습니다. 효가 우리 전통 유교사회의 모든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근원적인 빌리프 시스템(Belief system)이라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효가 깨지면 모든 게 다 깨지고 말죠. 이러니깐 효라는 것은 가정에만 국한되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 유교사회를 보면 효라는 게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까? 바로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모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효라는 것은 반드시 종교적인 예식을 포함합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움막 틀고 무덤 옆에서 삼 년을 지내야 상례(喪禮)로 쳐준단 말예요. 근데 막상 어느 미친놈이 무덤 옆에서 삼년씩이나 움막 짓고 살 수가 있겠어요. 여러분이라면 그런 삼년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해서 삼년동안 움막 짓구 요즘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역시 그러한 삼년상을 거의 안 했답니다. 근데 어쩌다 한 놈이 하거든요. 그러니깐 그놈한테 효자. 열녀비를 세워주는 거죠. 거꾸로 해석하면, 효행을 했다는 걸 기려서 효자비를 세운다는 것은 아무도 효자비 세울 만한 행동을 좀처럼 안 한다는 뜻입니다. 알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왜 마을 공동체에 효자ㆍ열녀비가 서는 거죠? 아무도 효자비 세울 만한 행동을 안 한다는 말이예요. 다만 불가능할 정도로 그 마을공동체의 도덕적 가치(moral value)를 높게 잡고는, 그걸 가지고 그 마을의 에토스를 유지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깐 효자ㆍ열녀비를 세우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아, 청상과부로 혼자된 여자가 어떻게 그대로 계속 살 수 있겠어요? 열녀가 될 수가 없죠. 눈길 한 번 맞으면 그냥 가는 게 여잔데, 어지간해서는 도저히 혼자 살 수가 없습니다. 알고 보면 열녀다ㆍ효자다,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이 아닌 인위적 제도예요. 강렬한 에토스의 기준이란 말입니다. 과거 유교사회는 이런 거를 통해서 그 사회제도 질서를 유지했던 거죠.
근데 지금은 이게 깨졌어요. 대신에 현대사회는 이것을 시민의 자유라든가 하는 다른 개념으로 바꿔갔습니다. 근대사회에서는 이렇게 에토스 개념이 바뀌어졌지만 과거 유교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에토스를 지탱해왔느냐 하면 바로 이 효예요. 그래서 순임금이 천자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순임금이 자기 아버지에게 엄청난 효도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이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죠. 지금 여러분들은 이러한 것이 이해되지 않을 거예요. 예를 들어, 총리를 뽑는데 효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암만 생각해봐도 역시 이해가 잘 되지 않죠. 근데 옛날에는 효라는 것이 상당한 이유가 됐단 말이예요. 지금은 행정관료로서 그 사람이 상당히 유능하다든가 해야 하는데, 옛날에는 그런 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깐요. 이렇게 전통 유교사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적체계가 지금과는 너무 다릅니다.
이에 자세한 얘기는 앞 강의를 참고하고 계속 본문을 봅시다. “舜其大孝也與 德爲聖人 尊位天子 富有四海之內 宗廟饗之 子孫保之” 이 문장에서 순(舜)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근데 종묘향지 자손보지(宗廟饗之 子孫保之)를 성백효 선생은 “순임금이 종묘에 제사를 흠향하시며 자손을 보존하셨다”고 해석을 했는데, 나는 성백효 선생과는 다르게 해석하겠어요. 그분과는 다르게 오히려 거꾸로 ‘지(之)’가 순(舜)을 받는 걸로 보구선 “종묘가 순(舜)을 향제(饗祭)하고 자손이 순(舜)을 보지했다”고 해석해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순(舜)이 주어니깐 “순(舜)이 자손을 보존했다”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역시 내가 해석한 “자손이 만만대대로 순의 덕성을 이어받았다”가 더 낫다고 생각해요.
17장 5. 악한 이들이 더 잘 사는 세상
故大德必得其位, 必得其祿, 必得其名, 必得其壽. 고로 큰 덕은 반드시 그 위를 얻으며 반드시 그 녹(祿)을 얻으며 반드시 그 이름을 얻으며 반드시 그 수(壽)를 얻는다. 고로 하늘이 물건을 낼 적에는 반드시 그 재질을 따라서 돈독히 한다. 舜, 年百有十歲. 순임금은 110세까지 살았다. |
“고대덕 필득기위 필득기녹 필득기명 필득기수(故大德 必得其位 必得其祿 必得其名 必得其壽)” 고로 큰 덕은 반드시 그 위(位)를 얻으며 반드시 그 녹(祿)을 얻으며. 자, 여기서 필득기수(必得其壽)까지 보면 위(位)·녹(祿)·명(名)·수(壽), 지위도 높고, 봉록도 많고, 이름도 날렸고, 오래 살았고 하는 이런 걸 딱딱 나눠서 쓰고 있죠? 이런 문장이 쓰여졌다는 것은 이 글을 쓸 당시가 벌써 상당히 제도화되어 있는 후대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확실히 한대(漢代)의 의식구조를 반영한다고 여겨져요.
수(壽)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순(舜)임금의 나이가 주자 주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백십세라고 되어있죠? 놀랍게도 순임금은 젊은 사람이 아니라 나이 백세가 넘어서 왕의 자리에 오른 노인이란 말입니다. 근데 나는 순임금이 백 살 먹은 노인이라도 아마 정정했을 거라고 봅니다. 옛날 사람들은 전염병만 안 걸리면 오래 살았을 것 같아요. 대신에 그들한테는 전염병이 무서웠겠죠. 요새 사람들은 전염병을 막은 반면에 내과질환 땜에 많이들 죽지만, 옛날 사람들은 전염병이 정말 무서운 존재였을 겁니다. 뭐 전염병만 걸렸다하면 속수무책이었을 테니까.
근데 대덕은 ‘필득기위 필득기록 필득기명 필득기수(必得其位 必得其祿 必得其名 必得其壽)’라는 여기에 굉장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구요? 생각해보세요. 지금은 대덕자(大德者)라 할지라도 빨리 죽을 수도 있고, 위(位)를 못 얻고 명성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중용(中庸)에서는 ‘필득(必得)∼’이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유가(儒家)들이 나중에 이 필득(必得)이라고 말한 것을 번역할 적에 엄청난 아규먼트(Argument, 논쟁)가 생겨요. 이 아규먼트로 인해서 “원칙은 그런데, 리(理)로 말하면 필득인데 그러나 기(氣)는 개별성이 있기 때문에 필득이라는 원칙이 반드시 보장되지는 않는다”라는 따위의 이론이 나온단 말이죠. 이런 문제들은 신유가(新儒家)에서 논쟁화됩니다.
근데 대덕자(大德者)가 필수명(必受命)하지 못하는 문제를 고민하기는 칸트도 마찬가지였어요. “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하는데, 악한 놈들이 복을 받고 선한 사람들이 불행하게 죽어가는 상황이 왜 인간사회에서는 이렇게도 많은가?”하는 문제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착한 사람들이 불행하게 죽어가는 데 대한 어떤 보상 없이 도덕법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사실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게 착한 사람은 못살고 나쁜 놈들은 배 터지게 잘 살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게 마련이거든요. 그 다음 구절로 넘어가죠.
17장 6. 자연의 상반된 덕성
故天之生物, 必因其材而篤焉. 故栽者培之, 傾者覆之. 고로 하늘이 물건을 낼 적에는 반드시 그 재질로 인하여 돈독하게 하나니, 고로 심은 것은 북돋워주고, 기울어진 것은 아예 없애버린다. 才, 質也. 篤, 厚也. 栽, 植也. 氣至而滋息爲培, 氛反而遊散則覆. 재(才)는 돈독하다는 것이다. 독(篤)은 두텁다는 것이다. 재(栽)는 심는다는 것이다. 기가 지극하여 자라나는 것을 배(培)라 하고, 기가 되돌아가 흘러가 흩어지는 것을 복(覆)이라 한다. |
“고천지생물 필인기재이독언(故天之生物 必因其材而篤焉)” ‘하늘이 물건을 낼 적에는’에서 나오는 생물(生物)은 어떤 물(物)을 새로 창조한다, 크리에이트(Create)한다는 말입니다. 생물(生物)은 ‘창조의 뜻이다’고 생각하고 뒷부분을 계속 보면, 하늘이 생물(生物)할 적에는 필인기재이독(必因其材而篤)한다고 그랬는데 이 문장은 여러분들이 뭐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구태여 설명하진 않겠어요.
그런데 ‘고재자배지 경자복지(故栽者培之 傾者覆之)’라는 이 구절이 재미있지 않아요? 여기 재자(裁者)라는 것은 우리가 뭘 재배한다는 것, 그래서 심은 것이 이렇게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고 경자(傾者)는 기울어진다는 것인데, 이게 상당히 재미납니다. 자꾸만 우리는 만물을 생한다, 천지생물지심이다 하면 이 생(生)이라는 의미를 다 좋은 거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노자(老子)』 51장에 보면 도는, ‘萬物 生之育之 亭之毒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보면 아시겠지만 천지가 만물을 생(生)한다고 하면 우리는 생(生)하고 육(育)한다, 낳아 기른다는 생각만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옛날 훈고하는 사람들도 생(生)이라는 말을 좋은 걸로만 생각했는지, 정지독지(亭之毒之)라는 말을 잘 이해를 못해가지고 전부 주석을 잘못 달아서, 이 독(毒)자는 잘못 들어간 거래든가, 뭐의 오자라든가 하는 식으로 해석을 바꾸지만 넌센스입니다. 도(道)는 만물에게 독을 줘요, 아시겠어요? 실제로 만물은 정지(停止)시키고 독을 주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항상 정독(亭毒)하는 도(道)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여러분들, 어디 비행기를 타도 그렇구, 서양 사람들이 무지막지하게 넛츠같은 걸 그렇게 많이 주죠? 넛츠. 응? 살구씨 같은 거. 생각해봐요. 우리가 먹는 약재라는 게 대부분 왜 약인줄 알아요? 독이 있기 때문에 약이예요. 근데 여러분들이 씨라는 게 말이죠, 식물이 말을 안 하니깐 우리가 우습게 아는데, 사실 씨라는 게 얼마나 엄청난 가능성을 함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거대한 나무도 손톱 만하게 작은 씨에서 나오잖아요. 이걸 보면 씨라는 게 엄청나게 소중한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이렇게 씨는 아주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잘 보호하기 위해서 대개 씨 껍데기 표피 밑에 독을 코팅해요. 그렇게 독을 코팅해 놔야 씨가 자연상태에서 안 썩구 잘 나오는 겁니다. 살구씨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청산가리라는 무서운 독으로 코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살구씨 많이 먹는 거는 청산가리를 많이 먹는 거와 같은 게 되지요. 그러니 씨를 많이 먹는 건 당연히 몸에 좋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들 살구씨 같은 거 무지막지하게 먹지 마세요. 독이 있으니까 씨 같은 거 조심하라구요. 이렇게 자연은 만물에 독을 줍니다.
여기 중용(中庸)에서도 재자(裁者)는 배지(培之)하고, 심은 것은 북돋고, 경자(傾者)는 복지(覆之)하고, 기운 거는 아예 없애 버린다고 했잖아요. 예를 들어 낙엽이 질 적에는 과감하게 낙엽이 지게 만드는 게 자연이지 낙엽이 안지도록 미련 갖구 잎을 안 떨어지게 하는 게 자연은 아니예요. 자연이라는 것은 재자배지(裁者培之)하고 경자복지(傾者覆之)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꼭 정확하게 해석하시도록. 자연이라는 것은 이렇게 상반되는 덕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17장 7. 대덕자가 인정 받지 못하는 세상
詩曰: ‘嘉樂君子, 憲憲令德. 宜民宜人, 受祿于天. 保佑命之, 自天申之.’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아, 아름다운 군자여, 영덕이 드러나고 드러나는 도다. 백성들에게 마땅하고 사람들에게 마땅하다. 하늘에게서 복을 받아, 하늘로부터 녹(祿)을 받아, 보우하여 명(命)하시고 하늘로부터 또다시 그것을 거듭한다.’ 詩, 「大雅假樂」之篇. 假, 當依此作嘉. 憲, 當依詩作顯. 申, 重也. 시는 「대아가락」의 편이다. 가(假)는 마땅히 『중용』에 의거하여 ‘가(嘉)’로 바꿔야 한다. 헌(憲)은 『시경』에 마땅히 의거하여 ‘현(顯)’으로 바꿔야 한다. 신(申)은 거듭한다는 뜻이다. |
“시왈 가락군자 헌헌령덕(詩曰 嘉樂君子 憲憲令德)” 주자 주를 보면, 여기의 시(詩)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가락(假樂)」편이라고 나와 있죠? ‘헌헌(憲憲)’이라는 것은 드러나는 모습,
‘영덕(令德)’이라는 것은 훌륭한 덕입니다.
“의민의인 소록우천 보우명지 자천신지(宜民宜人 受祿于天 保佑命之 自天申之)” 주자 주를 보면, “신(申)이라는 것은 중(重)이다[申重也]”라고 되어있죠? 여기서 명지(命之)와 신지(申之)는 대학에 있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故大德者必受命.” 고로 대덕자(大德者)는 반드시 천자의 명(命)을 받는다. 受命者, 受天命爲天子也. 수명(受命)이란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된다는 것이다. 右第十七章. 此由庸行之常, 推之以極其至, 見道之用廣也. 而其所以然者, 則爲體微矣. 後二章亦此意. 여기까지가 17장이다. 여기서는 평범한 행동의 일상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미루어 지극한 데에 나아가게 하면 도(道)의 용(用)이 넓다는 걸 보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된 원인은 체(體)의 은미한 것이다. |
“고 대덕자 필수명(故 大德者 必受命)” 주자는 이 문장에 대해 ‘수명자 수천명위천자야(受命者 受天命爲天子也)’라고 주를 달고 있습니다. 즉, 대덕자(大德者)는 필수명(必受命)인데 그 필수명(必受命)은 천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는 주장이지요.
그런데 ‘대덕자(大德者)는 필수명(必受命)’이라는 것을 가지고 “그러면 왜 공자는 대덕자(大德者)임에도 불구하고 천자의 명(命)을 받지 못하고 육국(六國)을 방랑하다가 죽었느냐?”라는 질문이 있게 됩니다. 앞에서 ‘대덕 필득기위 필득기록(大德 必得其位 必得其祿).’하는 문장에서도 이런 비슷한 질문이 있었지요? 여기서도 역시 앞부분과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유가(儒家)에서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공자와 공자의 일생을 두고 아규먼트(Argument, 논쟁)가 상당히 많이 전개됩니다. 이 많은 아규먼트 중에서 근세유학의 아규먼트는 ‘대덕자가 천자의 명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리(理)의 세계와 기(氣)의 세계 즉, 어떠한 리(理)의 원칙성과 기(氣)의 개별성의 원리가 다름에 있다’라고 하지요. 근세유학에서는 공자가 천자의 명을 받지 못한 문제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였는데 임마누엘 칸트같은 사람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도입했습니까? 칸트에게는 리기(理氣)의 프레임웤(Framework)이 없기 때문에 갓(God)을 도입했어요. 칸트는 ‘대덕자(大德者)는 필수명(必受命)’이라는 하나의 원리를 반드시 보장하기 위해서는 신(神)이 요청되어야만 한다는 논리를 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17장은 어떤 도덕적 아규먼트(Argument, 논쟁)가 얽혀있다는 장이라는 것만 아시고, 내가 오늘 몸이 불편해서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 강의를 마쳐야 되겠어요. 그리고 18장부터 요다음에 내가 강의를 계속 하도록 하지요. 오늘은 예정됐던 대로 황병기 선생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좀 쉬었다가 다시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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