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기능의 지나친 중시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식의 기준을 세우는 일은 사고(思考)를 주 기능으로 할 때, 사상의학 용어로는 지방(地方)의 기능이 가장 잘 발달한 사람에게만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학식이 높은 소음인들 중에 이 부분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사람과 토론할 때, 상대방에게 기준을 제시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것을 못하면 “기본도 안 돼 있으면서”라며 상대를 무시한다. 그러면 상대는 그 소음인을 ‘기본이 확실히 선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할까? 천만에. ‘저런 꽁생원’하며 무시하고 넘어간다.
소음인에게는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주 기능인 사고가 다른 사람에게는 보조 기능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고는 직관, 감성, 감각을 보조하는 기능에 불과하기에, 사고 기능이 좀 약하더라도 얼마든지 바르게 인식하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고 기능을 단련시키는 학문으로 대표적인 것이 철학이다. 그러나 철학자도 모두 소음인은 아니다. 서양철학을 공부한 뒤에 사상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칸트 같은 경우는 확실히 소음 기운이 가장 우세하다고 한다. 그러나 헤겔은 태음 기운이, 마르크스는 태양 기운이 가장 두드러져 보인다고 말한다【물론 직접 본 적이야 없는 것이고 주로 저작들을 분석해서 내린 결론이다】. 사상의학을 처음 창시한 동무(東武)만 해도 단순한 의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 사상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나 동무(東武)도 태양인이다.
구체적인 일을 해결할 때는 소양 기운인 세회(世會)에 대한 감각과 태음 기운인 인륜(人倫)에 대한 감각이 서로 보완작용을 하며, 이치를 따질 때는 태양적인 천시(天時)의 기능과 소음적인 지방(地方)의 기운이 서로 보완작용을 한다. 총괄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과정에서는 이 네 가지 기능이 서로 보완작용을 한다. 사람에 따라 각각 자기가 능한 것을 주 기능으로 삼고 약한 것을 보조 기능으로 삼아, 세상을 헤쳐 나가고 남과 교류하고 그렇게 어울리는 것이다.
앞에서 사무(事務)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요즘 쓰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으냐 동무(東武) 시대에 쓰던 대로 송사라는 개념으로 국한해서 쓰는 것이 옳으냐는 이야기가 잠깐 나온 적이 있다. 그런 부분도 사고를 주기능으로 할 때는 민감한 문제가 된다. 각각의 용어는 정확하게 한 뜻만을 정의하고 있어야 사고의 전개가 가능하다. 그래서 태양 기운을 설명하면서 사무(事務)라는 용어를 그냥 요즘의 사무라는 용어 개념으로 설명하면, ‘짜아~식, 그 당시에는 사무라는 용어가 송사(訟事)라는 뜻으로 사용됐다는 것도 모르면서 뭘 설명한다고 설치기는’ 하며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고를 보조 기능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단어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또 한 단어가 여러 뜻으로 쓰이는 경우에는 그 여러 용법에서 공통되는 부분에 관심을 두지, 그 중의 어느 용법이 가장 옳으냐 하는 것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이런 부분들이 소음인이 용어의 정의를 지나치게 따지면 다른 체질이 질색하는 이유이다. 동무(東武) 시절에 송사라고 썼던 단어를 요즘의 사무(事務)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도 동무(東武)가 설명하려고 했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무리는 없기 때문이다.
소음인을 너무 흉보는 것으로 보이는가? 이해하기 바란다. 사고 기능이 특히 중시되는 것이 학자들 사이인데, 요즘 우리 사회가 지나친 학벌 사회가 되다보니 그럴 필요가 없는 영역에서조차 사고 기능이 지나치게 강조된다. 그래서 균형을 잡자는 의미로 트집을 좀 잡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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