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 왕래에도 애초의 입장을 유지하다
그러나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은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려 8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니까요. 논쟁이 심화되자 이황은 자신의 입장을 보다 명확히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개념의 문제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이황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이론적으로 엄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럼, 이황이 8년 동안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정리한 ‘사단칠정론’의 핵심 부분을 검토해보도록 하지요.
사단이 외부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진실로 칠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날 때 이가 타는 것입니다. (…) 대개 이가 드러날 때 기가 따른다는 것은 이를 주로 하여 말했을 뿐, 기 밖에 따로 있는 이를 말한 것이 아니니, 사단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가 드러날 때 이가 타는 것은 기를 주로 하여 말했을 뿐, 이 밖에 따로 있는 기를 말한 것이 아니니, 칠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퇴계선생문집』(16권) 「답기명언론사단칠정제이서(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二書)」
四端感物而動 固不異於七情 但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耳 (…) 大抵有理發而氣隨之者 則可主理而言耳 非謂理外於氣 四端是也 有氣發而理乘之者 則可主氣而言耳 非謂氣外於理 七情是也
사단감물이동 고불이어칠정 단사즉이발이기수지 칠즉기발이이승지이 (…) 대저유리발이기수지자 즉가주리이언이 비위리외어기 사단시야 유기발이이승지자 즉가주기이언이 비위기외어리 칠정시야
이황은 사단이나 칠정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 인간이 외부 사물에 감응했을 때 마음에서 발생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즐거움’을 예로 들어볼까요?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측은지심이라는 선한 감정이 발생합니다. 또 좋아하는 그림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즐거움이라는 현실적인 감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모두 동일한 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두 감정 모두 외부 사물이나 사태에 직면해야만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지 못하거나 좋아하는 그림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어떤 감정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황은 외부 사태에 반응하여 감정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사단과 칠정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황은 측은지심과 같은 사단의 순수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理)의 순수성을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황이 기대승의 타당한 주장, 다시 말해 인간의 감정에는 이(理)와 기(氣)의 계기가 모두 공존한다는 생각을 철저히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사단과 칠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미묘한 주장입니다.
“사단은 이가 드러날 때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날 때 이가 타는 것입니다.”
이황이 사단이나 칠정 모두 이와 기라는 두 가지 범주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이황의 입장이 일부 변경된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드는 까닭은 그가 사단은 이가 드러나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기존의 이해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확인해둘 것이 있습니다. 이황이 생각했던 이기론(理氣論)에는 이미 모종의 가치평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황이 기(氣)라는 개념을 상당히 폄하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지요. 그는 사단은 이(理)가 먼저 드러나고 기(氣)가 그것을 따르는 경우라 말하고, 반면 칠정은 기(氣)가 먼저 드러나고 이(理)가 그것을 올라타는 경우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따르다[隨]’는 표현과 ‘타다[乘]’는 표현에 주목해보세요. 두 표현에서 모두 이가 주인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기는 마치 몸종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령 이가 드러나는 경우 기는 이를 따라 복종해야만 합니다. 그와 반대로, 기가 드러나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는 기를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황은 이가 올라탄다[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표현을 사용했지요. 결국 기대승과의 서신 왕래를 하면서도 이황은 자신의 애초 입장을 나름대로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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