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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2장 병든 조선, 당쟁의 사상적 뿌리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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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2장 병든 조선, 당쟁의 사상적 뿌리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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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의 사상적 뿌리

 

 

사실 선조(宣祖) 때 정치적인 당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명종(明宗) 때부터 사상적인 당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법 철학적인 양상을 띠며 진행되었는데, 대표적인 게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1527 ~ 72)이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이다. 사단이란 인(), (), (), ()로 대표되는 유교적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단서, 즉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를 뜻하며, 칠정이란 인간 본성이 사물을 접했을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 감정, 즉 희(), (), (), (), (), (), ()을 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사단은 주로 이성적 측면이고 칠정은 감정적 측면인 데, 중요한 것은 양자가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는 문제다.

 

이에 관해 이황은 처음에 사단은 이()의 발현이고 칠정은 기()의 발현이라고 도식화했다()와 기()의 관계도 독자적인 쟁점이 되지만, 쉽게 봐서 이는 형이상학적인 본질이고 기는 형이하학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이가 원리이고 존재라면, 기는 그 원리의 양태이며 그 존재의 생성이다. 이가 없으면 당연히 기가 발현될 수 없지만 이는 또한 기의 발현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게 되므로 양자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렇듯 인간과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둘이므로 둘 중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학자들 간에 의견이 대립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를 강조하면 주리론(主理論)이 되고 기를 강조하면 주기론(主氣論)이 된다(흔히 동양 철학은 일원론이라고 보기 쉬운데, 실은 이원론적 경향이 강하다). 서양 철학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플라톤 철학에 가깝고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후배인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그렇듯 확연히 분리하는 게 옳으냐고 공박한다(인간에게서 이성과 감정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을 연상하면 쉽다). 그러자 이황은 사단과 칠정, 이와 기를 온통 뒤섞어 놓으면서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기대승은 그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이황에게 명확한 개념 정립을 요구하면서 사단과 칠정은 둘 다 기에서 발현된다는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 그가 죽자 이번에는 이이가 대타로 나선다. 이황의 중심이 실은 기보다 이에 있음을 간파한 이이는 이가 아니라 기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기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사단을 칠정에 포함시킨다. 여기에 대해서 다시 이황의 제자인 성혼(成渾, 1535~98)이 나서 주리론적 입장에서 사단을 이에, 칠정을 기에 귀속시키며 이이와 2차 논쟁을 전개한다.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히 생각하면 인간의 이성과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이와 기의 배분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양측의 논쟁은 치열했으나 그래도 철학 논쟁답게 서신을 매개체로 할 만큼 점잖았으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는 식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철학 논쟁치고는 쟁점이 지나치게 소박하고 조악해진 이유는, 성리학이 그 생리상 심성론과 연관된 철학으로서 출발한 게 아니라 유교 이념에 입각한 사회ㆍ정치 질서를 구축한다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출발했던 탓에 추후에 철학적 옷을 입혀 체계화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주희성리학을 창시한 본래 목적은 금나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게 된 중국의 상황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단칠정에 관한 논쟁은 이후 18세기까지도 무릇 학자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거드는 주제가 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며 성리학은 어느 정도 철학적 체계화를 이루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의 본바탕은 사라지지 않는다(현대의 동양 철학이 철학적으로 서양 철학에 비해 크게 뒤진 이유는 그런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사상적 당쟁이 정치적 당쟁으로 이어지는 접점에 해당하는 인물은 이이와 성혼이다. 비록 학문적 견해는 달랐어도 두 사람은 이황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지방색을 떼어 버리려면 이황의 호를 딴 퇴계학파退溪學派라고 불러도 된다)에 맞서 기호학파(畿湖學派), 즉 경기와 호서(충청도) 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를 구성했다. 어디까지나 학파였던 만큼 정치적 당파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학문의 영역에서조차 무리를 이루어 대립하는 양태는 당쟁의 시대가 본 궤도에 올랐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원래 학문의 발전이란 주로 학자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학문을 문화의 한 부문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학문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주목할 만한 학문적 성과는 학자 개인의 관심과 연구를 통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 집단적인 학파가 형성된 이유는 유학의 근저에 놓인 정치 이데올로기적 속성 때문이다(그래서 사대부를 학자-관료라고 부른 바 있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의 학술 문헌들이 대부분 집단 창작물인 것도 개인의 연구 작업이 중시되지 않은 데서 나온 전통이다. 개인 연구든 집단 창작이든 장단점이 있겠지만 그런 전통 때문에 오늘날에도 학맥이 판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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