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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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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3부 뿌리② -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②

건방진방랑자 2022. 1. 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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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그래도 파이가 워낙 크다 보니 평민들 중에도 정복의 열매를 맛본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들과 달리 토지 소유보다 정복의 부산물로 부를 늘렸다. 몸이 커지면 살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로마의 몸이 커짐에 따라 순환기 계통도 더욱 방대해졌다. 일부 부유한 평민들은 무역과 도로 건설, 각종 군납업과 토목공사 등을 독차지하면서 더욱 큰 재력가로 성장했다. 특히 귀족들이 신분상 손댈 수 없는 속주에서의 징세 청부업은 그들에게 가장 큰 수익원이었다상업을 천시하는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에서도 귀족 대신 평민이 무역업에 뛰어들어 부를 쌓음으로써 평민의 신분 상승과 민주정을 가져온 바 있었다. 그러나 토지가 작고 정복 활동이 없었던 그리스에 비해 로마에서는 지주 세력이 건재했으므로 그리스처럼 쉽사리 평민들에게 정치적 지배권이 넘어가지 못했다. 고대사회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땅이 최고의 재산이었다. 한창 때의 아테네가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도 지주층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징세 청부업의 발달은 금융업을 탄생시켰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원시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 평민들을 가리켜 에퀴테스(equites)라고 불렀는데, 훗날 중세에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기사(騎士)는 바로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이들은 자비로 무장을 담당해 기병으로 정복 전쟁에 참여했으므로 기사라는 직함을 얻었다).

 

그러나 에퀴테스는 어디까지나 출세한 일부 평민들일 뿐이었고(게다가 그들은 귀족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대다수 평민들은 정복으로 나라의 영토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더욱 가난해졌다. 버는 자가 없고 쓰는 자만 남는다면 나라가 존속할 수 없다. 이런 위기감은 점차 귀족들의 일부에게도 전해졌다. 그 각성한 귀족들 중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 기원전 163~기원전 133)가 있었다.

 

자유농민이 몰락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농업 생산량이 줄어든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라티푼디움은 농업의 독점화를 뜻할 뿐이므로 총생산량에는 큰 변동이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군사력이었다. 아무리 유능한 장군과 기사 들이 있다 해도 평민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더구나 로마군의 기본 전술은 군단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므로 병사의 수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포에니 전쟁에 직접 참전해 싸운 경험도 있었던 티베리우스는 평민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로마의 미래는 없다고 단정 지었다.

 

기원전 133,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호민관으로 선출된 티베리우스는 개혁의 선례를 찾아보았다. 선례는 있었다. 멀리는 그리스의 경험이 있었고, 가까이는 250년 전 로마의 경험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페리클레스의 민주적 개혁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리키니우스 법을 부활시켜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는 방법을 구상했다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연설에 능했듯이(132~133쪽 참조), 티베리우스도 그에 못지않은 웅변가였다. 페리클레스가 연설에서 평민들의 정치적 평등을 강조했다면, 티베리우스는 다음의 연설에서 보듯이 경제적 평등을 부르짖었다. “들판의 짐승들도 저마다 자신의 굴을 가지고 있는데, 이탈리아를 위해서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은 공기와 햇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 그들(귀족과 장군 들)은 여러분(평민들)을 세계의 주인이라고 부르나 여러분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뼘의 땅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과거의 로마가 아닌 만큼 토지 상한선을 500유게라로 정한 리키니우스 법을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토지 상한선을 1000유게라로 늘리고,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해 무산 시민들에게 추첨을 통해 30유게라씩 토지를 분배하도록 했다(세 명으로 된 농지 분배 위원에는 티베리우스 자신과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끼어 있었다).

 

물론 원로원은 잔뜩 입이 부었으나 일단은 참았다. 어차피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들은 호민관의 임기가 1년이라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달랬다. 더욱이 호민관은 한 번 임기를 지내고 나서는 재입후보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이 관례에 따랐더라면 티베리우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시동을 건 개혁은 한두 해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티푼디움의 노예들 신분제는 세계 역사 어디서나 현대 이전까지 늘 존재했으나 서양의 신분과 동양의 신분은 의미가 약간 다르다. 서양의 신분은 사회적 역할과 일치했고, 동양의 신분은 사회적 역할과 무관하게 정치적 지배의 의미가 강했다. 이 로마 부조에 묘사된 라티푼디움의 노예들은 경제적 생산만을 담당했지만, 동양의 노예(노비)들은 주인의 명에 따라 경제만이 아니라 군사 분야에도 투입될 수 있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한국사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진왜란

연표: 임진왜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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