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유럽 세계의 원형
포스트 로마 시대
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유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3세기부터 로마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눔으로써, 그리고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본체를 포기하고 동방 제국을 중시함으로써 제국의 수명을 연장했으나 제국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결국 이 응급조치들이 시효를 다하면서 로마는 최종적으로 멸망한 것이다.
로마가 멸망한 시점에서 유럽의 판도를 한번 그려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나타난다. 이 무렵이면 벌써 현대 유럽 세계의 원형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서유럽과 동유럽은 멀리 보면 로마 제국의 분열과 서방 제국의 멸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서방 제국의 자리를 대신한 게르만족의 여러 민족은 장차 서유럽 세계를 이루게 되며, 홀로 남은 동방 제국은 동유럽 세계의 모태가 된다.
만약 게르만족이 통합적인 하나의 민족이었다면, 로마 제국의 해체는 곧장 ‘게르만 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로마인들이 제국의 북쪽에 사는 ‘야만인’들을 총칭하던 이름이었을 뿐 실은 구성이 매우 다양했다. 공통점이라면 문자가 없었다는 것(있었다 해도 후대에 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농업 국가인 로마와 달리 반농반목(半農半牧) 문화였다는 것 정도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문명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흐른다.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이라는 밝은 문명의 중심에 힘입어 자체 문명을 발전시켰다. 적어도 문명화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인 문자와 종교(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로마에서 수입했다는 사실은 게르만족이 서양 문명의 적통을 물려받았음을 말해준다. 일찍이 오리엔트 문명이 씨앗의 형태로 그리스와 로마에 전해질 때도 문자(페니키아 알파벳)와 종교(그리스도교)가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게르만족이 사는 지역은 원래 로마의 속주였으나, 제국 후기에 접어들면서 속주들이 거의 독립 왕국처럼 변모했다(로마가 속주군을 로마군으로 완전히 편입시키지 못하고 용병이라는 계약관계를 맺게 된 것이 그 증거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이 해체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훈족의 침략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설령 그 침략이 없었다 해도 어차피 로마의 멸망은 가시화되고 있었고, 게르만족의 국가들이 탄생하는 것도 조만간 현실화될 터였다. 다만 훈족의 침략이 가져온 변수는 원래의 속주민들이 자기 고향인 속주를 그대로 나라로 만들지 못하고 먼 타향까지 이동해 나라를 세우도록 했다는 점이다(게르만족이 농경민족이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난리’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게 농경민족의 본성이니까).
로마가 멸망한 뒤 게르만족은 유럽 각지에서 로마 문명의 한 조각씩을 이어받아 문명을 이루고 정식 국가를 건설했다. 도나우 강 연안에 살던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고트 왕국을 세웠고, 엘베 강 유역에 살던 반달족은 북아프리카까지 건너가 나라를 건설했으며, 흑해 연안에 살던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로마의 공백을 메웠다(반달족과 같은 고향의 롬바르드족은 6세기 후반에 이탈리아로 이동한다), 또 지금의 벨기에와 독일 북부에 살던 앵글족과 색슨족, 유트족은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초기 영국사에 등장하는 여러 개의 왕국을 세웠다【앵글은 나중에 잉글랜드라는 말의 어원이 되고, 색슨은 독일의 작센과 같다. 여기서 보듯이 오늘날 유럽에서 사용되는 여러 언어는 어원을 같이하는 어휘가 많은데, 특히 지명이나 인명이 그렇다. 일종의 사투리처럼 지역에 따라 발음이 약간씩 달랐을 뿐이다. 이 점은 중세 유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물론 이 나라들이 그대로 후대에까지 이어지지는 않지만, 이미 여기서 오늘날 서유럽 세계의 원형이 나타나고 있다(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족은 9세기에 바이킹의 이동으로 알려진 제2차 민족대이동 시기에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 승자가 임자 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서로마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림은 비잔티움 황제 제논의 명령으로 이탈리아에 온 테오도리쿠스(왼쪽)가 오도아케르(오른쪽)와 대결하는 장면인데, 둘다 게르만족이었으므로 서로마는 어차피 게르만족의 수중에 떨어질 참이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한 테오도리쿠스는 제논의 뜻과 달리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을 세우고 딴살림을 차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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