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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1장 유럽 세계의 원형, 갈리아의 판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1장 유럽 세계의 원형, 갈리아의 판도

건방진방랑자 2022. 1. 8.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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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아의 판도

 

 

서유럽에 있던 로마의 속주들 가운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곳은 갈리아였다. 갈리아는 제국의 변방이면서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했고, 속주들 가운데 가장 역사가 길고 가장 로마화되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멸망으로 서유럽 세계의 원형이 생겨난다면 당연히 갈리아는 그 중심이야 할 것이며, 동시에 로마 문명의 상속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갈리아는 기원전 1세기에 카이사르에게 정복된 이래로 수백 년 동안이나 로마의 속주였고 로마의 특별 관리를 받았으므로 제국이 멸망할 무렵에는 로마와 다를 바 없는 문명의 수준을 자랑했다. 하지만 갈리아도 작지 않은 지역이므로 갈리아 내에서도 편차가 심했다. 크게 가름하면, 이탈리아에 가까운 남부는 로마화가 크게 진척되었으나 북부는 그렇지 못했다(오늘날 남프랑스를 가리키는 프로방스라는 명칭은 고대에 로마의 속주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갈리아의 북부에는 동쪽에서 온 게르만족의 일파인 부르고뉴족과 프랑크족이 각기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남부는 로마의 영향력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제국이 멸망하자 곧 힘의 공백 상태가 생겨났다. 갈리아 동남부의 프로방스는 로마의 일부나 다름없었으므로 주인 없는 땅이 되었고, 서남부의 아키텐에는 서고트족이 자리를 잡고 툴루즈 왕국을 세웠으나 그들의 주력이 에스파냐 쪽으로 빠져나간 터라 툴루즈는 새로운 힘의 중심을 형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북부를 지배하는 자가 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 것은 분명했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처럼 훈족의 공격으로 부르고뉴 왕국이 무너지자 이제 갈리아 북부를 호령하는 세력은 프랑크 왕국 하나만 남았다. 프랑크는 포스트 로마 시대에 힘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갈리아에는 점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제 대세를 탄 인물만 나오면 된다. 그 인물이 바로 클로비스(Clovis, 465년경~511)였다. 그는 로마의 장군 시아그리우스를 물리친 다음, 알라만족을 내쫓고 갈리아의 중부와 알프스 이북 일대를 손에 넣었다당시 프랑크는 알라만족의 고향인 현재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부근을 알레마니아라고 불렀다. 여기서 비롯되어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다른 언어권과는 전혀 다르게 독일을 알마뉴(Allemagne)라고 부른다. 독일의 명칭은 어느 언어에서는 지금의 영어명(Germany)처럼 게르만이라는 어원에서 나왔는데, 유독 프랑스에서만 다른 어원을 사용하는 데는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아키텐의 툴루즈 왕국, 이곳을 정복해야만 갈리아를 완전히 통일할 수 있다. 그런데 서고트족은 프랑크보다 한 수 위의 강성한 민족이므로 힘만으로 물리치기에는 버거운 상대였다. 그래서 클로비스는 속세의 힘 대신 신성의 힘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496년에 그는 스스로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당시 게르만족의 거의 모든 민족은 아리우스파였으므로(복잡한 삼위일체의 개념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게 훨씬 쉬운 교리였기 때문이다) 클로비스의 행동은 상당한 정치적 모험이었다. 그의 승부수는 통했다. 다행히 아키텐에는 아직 로마의 영향력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서고트 지배층은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였으므로 클로비스의 개종은 지배층과 원주민들을 분열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아키텐의 주교와 원주민들이 합세하면서 클로비스는 서고트족의 지배자들을 거뜬히 추방해버릴 수 있었다.

 

이처럼 로마의 텃밭에서 시작했고 로마의 영향력을 적절히 이용했기에, 프랑크 왕국은 다른 게르만 왕국들과 달리 단명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었다(로마와 밀접했던 갈리아가 아닌 다른 지역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클로비스의 개종으로 프랑크 왕국은 로마의 문화적 전통만이 아니라 종교적 전통까지 이어받으면서 옛 로마 문명의 적통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사실 프랑크 왕국이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점과 관련이 있었다.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은 당시 서유럽 일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로마 교황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그리스도교에서는 초대 로마 교황을 그리스도의 수제자인 베드로로 간주한다(오늘날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은 그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베드로 자신도 당대에는 자기가 교황인 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2대 교황부터 5세기 중반까지는 교황들의 이름만 전해질 뿐 활동 내역이나 업적이 없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는 레오 1세를 초대 교황이라고 봐야 한다. 이때부터 로마 교황은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레오 1세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권력이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 있다면 최고의 종교적 권위는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 종교적 권위를 세속적 권력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유럽의 중세에 로마 교황이 교리상으로는 부정된 정치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중세 초기에 프랑크 왕국이 세속의 권력으로서 교황을 뒷받침해준 덕분이 크다. 이후 역사까지 고려한다면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혹시 클로비스는 그런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종교적 개종이라는 정치적 도박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설령 그랬다고 해도 프랑크는 당시 작은 왕국에 불과했으므로 그는 자신이 수천 년 뒤 프랑스 공화국의 국민들에 의해 프랑스 역사상 첫 번째 왕으로 간주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메로비스의 이름을 딴 메로빙거(Merovinger) 왕조는 프랑스 역사에서 공식적인 첫 번째 왕조가 된다.

 

 

프랑스의 건국자 메로빙거 왕조의 문을 연 클로비스의 네 아들 모습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땅에 로마-게르만의 역사가 시작되었기에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클로비스를 초대 국왕으로 삼고 있다. 이들의 옷에 그려진 꽃은 백합인데, 중세 프랑스 왕가의 상징화다. 아직 중세의 문턱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가능하다. 이 그림은 1000년 뒤인 15세기에 그려진 상상의 초상화니까.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포스트 로마 시대

갈리아 판도

홀로 남은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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