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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4부 줄기 -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문명의 충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문명의 충돌

건방진방랑자 2022. 1. 8.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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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의 충돌

 

 

이슬람 제국이 단기간에 놀라운 팽창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물론 종교의 힘도 컸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오리엔트 지역은 권력의 공백 상태로 남아 있었다단지 권력의 공백만이 아니라 종교의 공백이기도 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는데, 이것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하면서 함께 힘을 잃었다. 조로아스터교보다 더욱 강력하고 세계적인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그리스도교가 서쪽(유럽)으로 전달되고,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동쪽(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으로 전달되면서 팔레스타인과 인도 사이의 오리엔트 일대는 종교적 공백 상태에 빠졌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속주였으므로 당연히 비잔티움 제국이 챙겨야 했지만, 당시 비잔티움은 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데다 서방 제국의 부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이 지역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지금의 이란, 그러니까 옛 페르시아의 고토를 지배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이미 전성기가 200년이나 지난 터라 신흥 이슬람교의 젊은 피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막에서 조그만 횃불로 시작한 이슬람 제국은 생겨난 지 불과 20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세 개의 대륙에 들불로 번져 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다(로마가 국가를 수립하고 나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는 데까지 걸린 기간이 700년 이상이었던 데 비하면 이슬람의 성장 속도는 가히 세계 신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끝 간 데를 모르던 이슬람의 팽창은 8세기 초반 두 차례의 패전을 당하면서 멈추게 된다. 유럽 대륙의 동과 서 양쪽 관문에서 겪은 실패였는데, 혹시 그것은 유럽 문명이 장차 세계를 제패하게 되리라는 암시였을까?

 

첫 번째 패배는 동유럽의 콘스탄티노플에서였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이슬람 제국은 자연히 비잔티움 제국과 직접 맞부딪히게 되었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이질적인 종교인 데다 포교적 성격이 워낙 강했으므로 서로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제국은 한창 기세가 오른 참에 잠재적인 강적을 제거해버리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슬람으로서는 위협 요소를 없앤다는 의도가 컸지만 비잔티움을 손에 넣으면 광대한 유럽 세계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서유럽 세계는 비잔티움 제국에 비해 크게 약했고 수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실제로 정복에 나섰다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먼저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썩어도 준치, 로마의 영광은 과거의 일이고 이제는 그 후광만 남았다 해도 비잔티움의 동로마 제국은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사실 이슬람은 애초부터 비잔티움 제국을 최대의 적수로 여기고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무아위야는 정복 사업을 재개하면서 첫 목표를 비잔티움 제국으로 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674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군은 성벽을 공략하는 데는 실패했다. 비잔티움군의 신무기인 그리스의 불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결국 무아위야는 비잔티움 측의 화의를 받아들여 오히려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퇴각했다. 717년 여름,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는 이교도의 침략으로부터 그리스도교 문명권을 수호하겠다는 확고한 각오를 가지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이슬람군을 맞았다. 한 측은 공성, 다른 측은 수성이었는데, 성을 깨뜨릴 만한 화력이 없던 시대에 어느 측이 유리할지는 뻔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은 천혜의 요새였다아시아와 유럽의 절묘한 경계선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천연의 항구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남쪽에는 프로폰티스(마르마라 해)가 있고, 흑해로 연결되는 북동쪽에는 옛날부터 골든혼(황금)이라 불려온 8킬로미터쯤 되는 길이의 넓고 깊은 내해가 자리 잡고 있어 바다를 통한 공략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구나 마르마라 해는 양 끝이 보스포루스와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의 두 좁은 해협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대함대를 동원한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육로로 공략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 길은 유럽 쪽으로 트여 있다는 게 이슬람 측의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싸움은 50년 전과 비슷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비잔티움군의 투석기 공격으로 다시 쓴맛을 본 이슬람군은 함대에 승부를 걸었다. 이슬람 함대는 우선 지중해와 흑해 양 방면의 바닷길을 차단해 보급로를 끊은 뒤 콘스탄티노플로 접근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비잔티움을 구한 것은 가짜 화약이었다. ‘그리스의 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신무기는 황과 수지를 섞어 만든 물질에 불을 붙여 적선에 던지는 것이었는데, 화약처럼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 불이 붙으면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이슬람 함대는 이 신무기를 던지며 버티는 비잔티움의 소함대를 당하지 못했다(이후 그리스의 불은 유럽 문명을 구해낸 일등 공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전쟁의 불문율을 깨고 싸움은 한겨울에도 간간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봄 이슬람 함대는 재차 도전했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조급해진 이슬람군은 콘스탄티노플의 남쪽으로 상륙해 도시를 공략하고자 했는데, 결국 이곳이 최종 승부처가 되었다. 불가리아 동맹군이 합세한 비잔티움군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이슬람군을 무참히 도륙했다(당시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영토 내에서 종속국으로 있었으나 신흥 강국이었다), 공격을 개시한 지 꼭 1년만에 이슬람은 비잔티움 침략을 깨끗이 포기하고 물러나야 했다. 아직 싹을 튼튼히 틔우지 못한 서양 문명의 뿌리가 온전히 보존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뿌리를 위협하는 칼날은 4년 뒤에 대륙의 서쪽 끝에서도 다가왔다. 유럽의 서쪽 관문에 상륙한 이슬람 세력은 711년 에스파냐의 터줏대감인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20년 동안 이곳을 식민지로 굳혔다. 그런 다음에 에스파냐 총독 압둘 라만은 피레네 산맥을 넘기로 결정했다. 산맥을 넘으면 250년전 클로비스가 개창한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이 있었는데, 이곳을 정복하면 서유럽에서 이슬람의 적수는 없었다.

 

 

이교도를 막아낸 성벽 조상의 음덕은 동양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창 강성했던 8세기 초반 이슬람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고 유럽 세계를 수호한 것은 바로 콘스탄티누스가 공들여 만든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었다. 유럽을 그리스도교 문명권으로 만들고자 한 콘스탄티누스의 노력은 400년이 지난 뒤에도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한편 클로비스 이후 메로빙거 왕조는 여러 차례 분열과 재통합을 거듭하면서 크게 약화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왕권의 약화에 반비례해 귀족들이 성장한 덕분에 오히려 프랑크 왕국은 국력이 크게 신장된 상태였다(왕권과 국력이 반비례하는 전통은 근대 이전까지 유럽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으로서도 이슬람의 침략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과연 이슬람군은 피레네를 넘은 뒤 프랑스 서부의 아키텐을 손쉽게 접수하고 프랑크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왔다.

 

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사람은 당시 왕국의 힘센 귀족이었던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688년경~741, 프랑스와 독일의 초기 역사와 관련된 인물이기에 독일식으로 카를 마르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었다. 732년 이슬람군과 프랑크군은 프랑스 중서부의 투르에서 맞붙었다. 여기서 만약 이슬람이 승리했더라면 이후 서유럽이 주도하는 중세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이 전투를 보는 관점의 차이였다. 프랑크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한다는 자세로 전력을 다해 맞선 반면, 이슬람 원정군은 애초부터 유럽을 이슬람권으로 만들겠다는 각오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이슬람 제국은 동쪽, 즉 비잔티움 제국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계획은 있었으나 지브롤터 쪽은 원래 생각하지 않았다(이는 당시 동유럽이 서유럽보다 훨씬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그랬기 때문에 제국의 주력군 대신 에스파냐 지방군을 피레네 너머로 파견한 것이다. 당시 이슬람군은 물자가 허용하는 한에서만약탈과 원정을 행한다는 규칙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투르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크군은 굳이 이슬람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이슬람 측은 두 번 다시 피레네 너머로 원정군을 보내지 않았다. 이 전투의 역사적 중요성은 오히려 후대에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나 후대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이 전투가 과대 포장되었고, 이슬람 역사에서는 기록에서 빠졌다.

 

 

모든 종교의 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사원(모스크)이다. 흔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세 종교는 뿌리가 같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사막의 바람

제국으로 성장한 공동체

문명의 충돌

서아시아 세계의 형성

부활한 오리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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