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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4부 줄기 -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서아시아 세계의 형성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서아시아 세계의 형성

건방진방랑자 2022. 1. 8.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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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아시아 세계의 형성

 

 

비록 유럽의 정복은 단념했지만, 이슬람 세력은 최소한 그간의 정복지만큼은 확실하게 챙겼다. 그리스도교권이던 북아프리카는 이슬람권으로 탈바꿈했고(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에스파냐도 이슬람 문화로 새 포장을 했다. 오늘날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로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지중해권 지역이 모두 이슬람교 국가인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1492년까지 800년 동안이나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에스파냐에도 지금까지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라비아 본토 이의의 지역들 중 이슬람이 침투하면서 가장 크게 변모한 지역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였다.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을 포함해 이슬람 문명권의 서아시아 세계가 탄생한 것은 바로 그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교의 건파가 특히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경우다. 그전까지 오랫동안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특별한 정체성이 없었던 이 지역은 이슬람 문명권에 속하게 되면서 일약 중앙아시아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이슬람권의 변방에 있었던 게 이 지역에는 오히래 이득이었던 셈이다), 10세기 이후 아프간족은 남쪽으로 진출해 친자보와 북인도에 여러 왕조를 세웠으며, 더 이후에는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을 세우고 서아시아와 인도를 지배하게 된다(20세기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립하게 된 것도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급히 먹으면 체하는 법이다. 이슬람의 급속한 팽창에는 아무래도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라비아 본토의 몇 배에 달하는 피정복지에서는 곳곳에서 이슬람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 잇달았다. 더 큰 문제는 종교 내부의 분열이었다. 그리스도교가 그랬듯이 처음에는 통합적이던 이슬람교는 세력이 커지면서 종교적 쟁점들이 생겨났다. 그중 가장 주요한 것은 칼리프의 문제였다.

 

 

사실 문제의 싹은 아부 바크르가 무함마드를 계승하면서부터 있었다. 일부 이슬람교도들은 칼리프를 추대하는 제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무함마드의 혈통을 따른 사람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4대 칼리프 알리가 암살되자 이 문제는 심각해졌다. 알리는 바로 무함마드의 사위였던 것이다(이슬람교가 생기기 이전까지 아라비아는 모계 사회였으므로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한 알리는 무함마드의 적통이었다). 무함마드의 혈통과 알리를 추종한 사람들은 알리에 이어 칼리프를 세습하기 시작한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이들이 이룬 조직을 시아파라고 부른다(‘시아무리, 일파라는 뜻으로 알리 시아’, 알리를 따르는 무리에서 나온 말이다). 이들은 전체 이슬람교도에 비하면 극히 소수였지만 시아파가 결성됨에 따라 나머지 다수파는 수니파(‘범례’, 즉 예언자와 그 전통을 따르는 무리)로 묶이게 되었다.

 

정복이 완료된 8세기 중반 무함마드의 가계인 아바스 가문은 시아파의 이념과 피정복지에서의 갈등을 교묘히 이용해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이슬람 왕조의 명칭은 아바스로 바뀌었다. 아바스 왕조(750~1258)는 피정복지에서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 정책을 철폐하고, 아라비아인의 특권도 폐지했다. 제국의 통합을 위한 조치였다. 그렇게 보면 이전에도 이슬람 제국이라는 명칭을 썼으나 엄밀한 의미의 이슬람 제국이 성립된 것은 아바스 왕조 때의 일이다그러나 우마이야 왕조를 거부하고 아바스 왕조의 성립에 일조한 시아파는 새 왕조에 대해서도 반발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바스 가문보다 알리 가문이 더 정통이었다. 시아파는 칼리프 제도 자체에 반대했으므로 당연히 종교 율법에서도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이들은 오로지 코란만을 진리이자 법으로 여겼고, 코란에 대한 일체의 주석과 해석을 거부했으며, 이슬람의 진정한 지도자 이맘(Imam)이 언젠가 다시 부활할 것임을 믿었다. 반면 시아파에 비해 종교적 정체성이 느슨한 수니파는 아바스 시대에 정체성을 확고히 다졌으며, 시아파와 달리 새 왕조에 적극 협력했다. 이런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탓에 오늘날까지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은 적대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있다. 오늘날 시아파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아바스 왕조의 적극적인 통합 정책으로 이슬람 제국은 피정복지에 대한 정치적 차별은 물론 종교적 탄압도 중단했다. 물론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는 포교 사업은 충실히 전개했고, 또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지만, 개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다. 굳이 불이익이라면 이슬람 개종자들에게 베풀었던 면세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교도와 유대교도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해도 자신들의 신앙을 바꾸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종교적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바스의 관용 정책 덕분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슬람에 맞설 만한 힘을 키운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이슬람이 그리스도교의 성지를 탄압하고 있다고 사실을 왜곡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즉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슬람의 지도자들 메카 정복에 성공한 무함마드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다. 이 제자들이 훗날 칼리프가 되어 일종의 제정일치 체제인 이슬람 제국을 다스렸다. 초기 칼리프들은 정복에만 능한 게 아니라 신앙에도 충실했고 문화적 소양도 갖추어 신생 제국의 내외적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사막의 바람

제국으로 성장한 공동체

문명의 충돌

서아시아 세계의 형성

부활한 오리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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