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 4.3항쟁 이야기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면 어김없이 가는 곳이 있다. 들어는 보았는가? 정방폭포라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사진 찍기에 바쁘다. 정방폭포는 수직절벽에서 폭포수가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곳으로 동양권에선 유일하다고 한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폭포수가 바다로 직접 떨어진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한 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져 3분 정도 이 폭포수를 맞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수학여행지로 정방폭포는 필수코스가 된 걸 거다. 하지만 정방폭포에 어떤 역사가 스며있는지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 정방폭포.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슬픈 역사가 담겨 있다. 벌교의 소화다리 같이 말이다.
47년 3월의 이야기
흔히 알고 있는 제주 4.3항쟁은 1947년 3월 1일에 시작되었다. 3.1절 기념으로 북국민학교에 3만 여명의 국민이 밀집했고 그걸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해 430명(육지 파견 경찰은 100여명)의 경찰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기마경찰이 탄 말에 꼬마가 밟혔는데 경찰은 그걸 모르고 그냥 가려 하자, 민중이 제지하며 소란이 일어났다. 이때 경찰들은 그게 경찰에 대한 저항이나 폭동으로 간주하고 발포하여 12명의 사상자(6명 사망)를 낸 것이다.
어찌 보면 경찰은 무장상태였고 민간인들은 비무장상태였으니, 말로 잘 타이르던지, 위협만 하는 수준에서 끝냈어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발포하여 인명을 살상하는 과잉진압을 했다. 의사의 검시결과는 경찰의 진압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준다. 사망자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등 뒤에 총을 맞아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수습은 오히려 불씨를 남기고
국가권력이 과잉진압을 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수습도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미군정은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봉합하기에만 급급했다. 발포를 정당화하는 내용의 발표문을 읽고 통행금지령과 함께 3.1절 기념일 준비위원회 임원들과 학생들을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런 부당한 당국의 대처에 대항하기 위해 민관이 연합하여 총파업을 시작하자 제주경찰의 20% 가량도 파업에 동참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정은 사태를 슬기롭게 풀 마음이 없었던 듯하다.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권력을 비판하는 세력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응징하기 바빴으니 말이다. 총파업에 가담한 66명의 경찰관을 해임했고 서북청년단(함북, 함해, 평북 출신으로 극우청년단체)으로 인원을 보충했다. 대립각이 확실해지면서 사태는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변해가고 있었다.
▲ 미군정은 사과를 하고 재발방지를 했어야 했는데 더 강하게 나갔다.
48년 4월의 이야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억압받아온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350여명의 무장대는 24개의 경찰지서 중 12개의 지서를 습격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사건이 장장 6년 6개월간 계속되었다. 1948년에 시작된 항쟁이 1954년에야 끝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무장대가 내건 기치는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저항, 단독 정부 수립과 남한 단독 선거의 반대, 반미구국투쟁’이었다.
여기엔 30만명의 제주도민이 모두 관여되었고, 사상자만도 3만명이었다고 한다. 무려 도민의 10%가 죽은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중 21.1%는 여성이며, 5.6%는 10세 이하의 아이이며, 6.7%는 61세 이상의 노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학살이 얼마나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그건 ‘빨갱이를 죽이기 위한 학살’이 아닌 ‘학살을 위한 빨갱이 낙인찍기’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누구도 토벌대에 밑 보이면 빨갱이가 되어야 했고 그러한 낙인은 온 가족을 죽여도 문제될 것이 없는 증표처럼 여겨졌다.
▲ 정토벌대에 의해 이런 어린 아이들도 5.6%나 사살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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