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서열 짓기
대내 안정과 대외 팽창이 순조롭게 연결된 영국과 달리 대륙에서는 여전히 진통이 계속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똑같이 1848년의 혁명을 겪었다. 두 나라는 혁명이 실패했으나 그로 인해 지배층이 자유주의 개혁의 숙제를 떠안게 된 것도 똑같았다. 그러나 그 뒤의 사정은 서로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 이후 100년 동안, 나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과 프랑스의 특성은 바로 그 무렵에 뚜렷이 나타난다. 단적으로 말해 두 나라의 차이는 자유주의 세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부터 힘이 약한 독일의 자유주의 세력은 혁명이 실패하자 곧바로 몰락했고, 자유주의 개혁의 총대는 자연스럽게 프로이센 정부가 매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바치는 제관을 거절했지만,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충족되었어도 덥석 받지 않았을까 싶다. 즉 거기서 자유주의라는 포장지만 떼어내거나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아닌 독일 전체의 의회(물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가 제안하는 제위라면 그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의회 자체가 자유주의의 산물이므로 앞의 조건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뒤의 조건은 가능하다. 독일을 한 국가로 통일하면 되니까.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그는 결국 독일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동생으로 프로이센 왕위에 오른 빌헬름 1세(Wilhelim Ⅰ, 1797~1888, 재위 1861~1888)는 처음부터 형의 숙원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집중했다. 군인 기질이 농후한 그는 무력을 근간으로 통일을 이루려 했다. 자연히 군사력 증강이 최우선 과제로 대두되었고, 그에 따른 경비가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3월 혁명으로 탄생한 프로이센 의회는 여전히 왕권을 견제하려 했다. 게다가 1850년대의 경제 활황으로 자유주의 세력의 입김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의회의 반대에 맞닥뜨린 빌헬름은 교묘한 해결책을 고안했다. 왕의 독재는 피한다. 그 대신 왕과 뜻을 같이하는 내각을 구성한다. 이게 그의 방책이었다. 그런 의도에서 1862년에 총리로 임명된 비스마르크(Bismarck, 1815~1898)는 빌헬름보다 한술 더 뜨는 보수적이고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철혈 재상이었을까?
19세기 유럽의 민족주의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이념이었으며, 주로 자유주의 정치가들이 그 이념을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좀 묘하다. 보수주의를 정치적 신조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 정치에서는 민족주의를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걸 러시아와 프랑스의 대사를 지내면서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적 분위기를 접한 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의 통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었다.
보수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하면 배타적 호전적 민족주의가 된다【근대국가를 먼저 이룬 게 영국과 프랑스인 만큼 이런 민족주의를 뜻하는 말은 영어와 프랑스어에 모두 있는데, 둘 다 19세기에 생겼다. “We don‘t want to fight but by Jingo if we do(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싸워야 한다면 결단코 싸우겠다)!”는 말에서 영어의 징고이즘(jingoism)이 나왔고, 나폴레옹을 신처럼 숭배한 프랑스 병사 쇼뱅의 이름에서 프랑스어의 쇼비니즘(chauvinism)이 나왔다. 둘 다 호전적 민족주의를 가리키는 용어다. 애국심은 좋은 것이고 민족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실은 한 끗 차이다. 그래서 현대 독일의 어느 정치인은 양자를 이렇게 구분했다. “애국심은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고, 민족주의는 남의 나라를 경멸하는 것이다.”】. 유럽의 정치적 후진국 독일을 가장 빨리 발전시키는 길은 군사 대국으로 성장하는 길이라고 믿은 비스마르크의 이념이 바로 그것이었다(물론 그렇지 않았다면 빌헬름이 그를 등용하지도 않았겠지만). 총리가 되어 전권을 장악한 그의 앞에는 안팎의 장애물이 있었다. 독일이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우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독일의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은 바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다(바깥의 장애물), 이들을 물리치려면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군대 증강을 반대하는 세력은 바로 프로이센의 의회다(안의 장애물). 이런 형세 판단에서 그는 행동 지침을 만든다.
우선 안의 장애물, 이건 일단 무시한다.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자들은 급진적인 언행을 일삼으면서도 혁명으로 나아가지는 않으리라는 게 비스마르크의 판단이었고, 그것은 옳았다. 그래서 그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제 개혁을 강행했다. 우선 병사들을 장기 복무시키고 직업군인의 비율을 늘렸다. 그리고 장비를 대폭 강화하고 군사훈련을 철저히 하는 한편 병영 생활을 통해 엄격한 기강과 복종의 정신을 함양했다(이후에 유행하는 ‘독일 병정’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100년 전 프리드리히 2세 시절 강력한 군대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프로이센군의 위용이 금세 되살아났다.
군사력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오스트리아를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좀 묘했다. 1864년 프로이센은 덴마크가 홀슈타인(독일 북부, 덴마크 접경지대에 있던 지역의 옛 명칭)을 제멋대로 합병하자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덴마크를 제압했다. 오스트리아는 아직 자신이 프로이센의 진정한 과녁인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다음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와 프랑스, 이탈리아로부터 차례로 중립을 약속받은 뒤 1866년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사도바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외교와 전쟁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 19세기의 독일 병정 덴마크를 공격하는 프로이센군의 모습이다. 100년 전 프리드리히 대왕이 갈고 닦은 프로이센군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2차 연마를 통해 유럽 최고의 육군으로 자라났다. 시민혁명의 부재와 강력한 군대라는 부조화는 20세기까지도 독일을 덩치만 크고 인지는 덜 발달한 청소년처럼 불균형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스마르크는 4년간 무시해온 의회에 출두해 추후 승인을 요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성과에 할 말이 없었다(비스마르크가 의회와 정면 대결을 벌인 ‘철혈정책’이라고 하는데,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은 여기서 나왔다). 센에서는 이제 의회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비스마르크를 지지게 되었다. 이로써 안의 장애물은 완벽하게 제거되었다. 남은 은 바깥의 대적, 프랑스다.
한편 프랑스의 상황은 프로이센과 정반대였다. 프로이센와 달리 혁명적인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막강한 정치적 힘과시했다. 루이 나폴레옹이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면서 는 제정으로 바뀌었으나 자유주의자들의 입김이 워낙 강해 는 거의 입헌군주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프로이센의 진출을 한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처럼 군제 개혁을 하려 했으나 의 반대에 부딪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바로 이 점이 독일과 프랑스차이다). 프랑스의 군대는 돈으로 징용을 면제받는 제도가 있을 도였으니, 의무 장기병제를 도입한 프로이센과는 비교도 되지 았다. 더구나 군대는 안정과 번영을 바라는 프랑스 부르주아지게서 공공연한 멸시까지 당하는 판이었다.
전쟁의 꼬투리는 외부에서 발생했다. 1870년 에스파냐혁명으로 공석이 된 왕위에 프로이센 왕가인 호엔촐레른 가문왕자를 앉히려 했다. 안 그래도 프로이센을 경계하고 있던 나폴옹 3세가 강력히 반대했는데(18세기 초 에스파냐 왕위 계승과는 대의 상황이다), 사건은 여기서 꼬여버렸다. 기회를 잡았다고 비스마르크는 엠스 온천장에서 휴양 중이던 프로이센 황제프랑스 대사가 결례를 했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했고, 자존심이 뜩 상한 프로이센 국민은 프랑스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냈다. 화가 난 나폴레옹 3세는 앞뒤를 재지 못하고 1870년 7월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역사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라고 알려진 전쟁이 시작되었다(보통 전쟁의 명칭은 먼저 공격한 측을 앞에 붙이므로 프랑스가 앞에 있지만 실은 프로이센이 도발한 전쟁이다).
프랑스로서는 의회가 지지하지 않는 전쟁을 황제가 독단으로 결정한 셈이 되었고, 프로이센으로서는 ‘군관민 일체’가 전쟁을 바라고 있는 가운데 먼저 선전포고를 당했다는 명분까지 얻었다. 승부는 여기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비스마르크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선전포고를 했다는 게 무색하게도 개전 직후부터 프랑스는 연패를 거듭했다. 오히려 프랑스군은 프랑스 영내에 있는 메스에서 프로이센군에 포위되었다. 이를 구하러 나폴레옹 3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구하기는커녕 스당에서 적군의 포로가 되어 항복하고 말았는데, 선전포고를 한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 항복하는 황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왼쪽)에게 항복하는 나폴레옹 3세(오른쪽)의 모습이다. 그림에서는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나폴레옹은 먼저 선전포고까지 하고서도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당시 빌헬름은 일흔셋, 나폴레옹은 예순둘의 노인이었다). 이후 그는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패전한 뒤 영국으로 망명해 재기를 노렸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죽었다.
황제가 항복했다는 비보가 파리에 전해지자 프랑스 측은 그제야 비로소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프랑스 의회는 서둘러 제정의 종식을 선언했고,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역사상 세 번째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전황은 기울어졌고, 프랑스로서는 공격전이 아니라 ‘항전’을 벌이는 처지였다. 이미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파한 프로이센군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10월까지 메스와 스트라스부르 등 프랑스 동부 지역 요새는 전부 프로이센에 함락되었고, 곧이어 수도 파리도 포위되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구호가 다시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프랑스 혁명기 외국의 간섭을 막아낸 프랑스 국민들은 임시정부가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자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파리의 시민들은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자체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그 결과로 유명한 파리 코뮌(Paris Commune)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정부와 의회, 국민의 움직임 모두가 프로이센보다 한 박자씩 늦었다. 정부는 미리 군대를 증강하지 못했고, 의회는 개전 후까지도 전쟁을 반대했으며, 국민들은 뒤늦게 애국심을 발휘했다. 임시정부마저도 적으로 내몬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서 새로 베르사유 정부를 구성했다) 파리 시민들은 1871년 3월 28일 파리 코뮌을 이루고 2개월간 버텼지만 결국 베르사유의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고 말았다【비록 존속 기간은 짧았으나 파리 코뮌은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를 비롯한 소시민층이 자체 정부를 구성한 의의를 지닌다. 엄중한 상황에서도 코뮌 정부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빈곤 시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각종 개혁 조치를 쏟아냈다.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을 이상적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규정한 이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코뮌의 역사적 경험을 20세기 러시아 혁명에 선행하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역사적 의의와 달리 파리 코뮌은 참담하게 진압되었다. 5월 21일 베르사유 정부군은 파리 진입을 감행해 5월 28일까지 코뮌 치하의 파리 시민 약 3만 명을 학살했다. 이것을 ‘피의 일주일’이라고 부른다】.
전쟁의 승리로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50억 프랑의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얻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수확은 마침내 독일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프로이센의 실력을 목격한 독일 내의 영방국가들은 제 발로 프로이센이 영도하는 독일제국에 합류했다. 프로이센은 발전적으로 해체되었고,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는 총리 하나 잘 둔 덕분에 1871년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적지의 한복판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 제국의 탄생 독일이라는 이름은 무척 익숙하지만 땅 이름이 아니라 나라 이름이 된 것은 1871년의 일이다. 지도는 신생 제국 독일의 영토인데, 프로이센이 중심이었던 탓에 남독일까지 아우르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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