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완성된 유럽 세계
드러나지 않은 제국
빈 체제 하에서 유럽의 낡은 중심인 오스트리아가 무너지는 동안, 프랑스와 독일이 시민혁명의 혼돈을 겪고 있는 동안, 러시아와 미국이 명암을 달리하면서도 각기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려 애쓸 무렵, 유달리 잠잠한 나라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17세기에 일찌감치 시민혁명의 홍역을 치른 영국은 18세기에 여러 차례 벌어진 프랑스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19세기부터는 복잡한 대륙의 정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고독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만약 섬이라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18세기 초 막강한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에스파냐에 뒤이어 전 세계에 식민지들을 거느릴 수 있었을까? 영국은 대륙의 끝자락에 붙은 상당한 크기의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런 점에서 영국과 유사한 것은 동양의 일본이다. 일본 역시 대륙에 가까우면서도 큰 섬이라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있었기에, 고대국가의 성립기인 7~9세기에 중국 당의 선진 문물을 취사선택할 수 있었고, 13세기 세계 제국 몽골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16세기에는 중국에 도전장을 던졌고, 이후 에도 시대를 맞아 번영기를 구가했으며, 나아가 19세기에는 동양 최초이자 유일한 제국주의 열강으로 발돋움했다(물론 그 때문에 주변 나라들은 고통을 겪었지만)】. 비록 미국의 독립을 허용했지만 그것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영국에 큰 타격을 입히지는 않았다.
사실 미국을 잃은 것은 차라리 영국의 세계 진출을 위해서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신대륙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영국은 이후 동양으로 발길을 돌려 인도 식민지를 확고히 다지고 중국에까지 경제적 침략의 손길을 뻗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처음에 심각한 역조에 시달리던 영국은 아편이라는 ‘신상품’을 개발하면서 중국 시장을 장악한 다음 청 정부의 반발을 역이용해 군사적으로도 중국을 제압하게 된다. 이것이 1840년의 아편전쟁이다.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는 아직 30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이미 동양에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부르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전개되고 있었다.
물론 영국에도 국내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대륙에서만큼 격렬하게 표출되지 않았고, 또 대륙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만큼 다른 나라에서 영향을 받는 것도, 영향을 주는 것도 적었을 뿐이다. 문제가 있으면 대립이 생기고, 대립이 생기면 분쟁이 벌어진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부터 영국에도 정치 세력들 간의 대립과 마찰이 생겨났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대립은 대륙에 비해 훨씬 온건하고 자연스러웠다. 물론 그 이유는 17세기에 맞아둔 ‘예방주사’의 덕분이었다. 시민혁명을 겪고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가 확립되어 있었던 영국은 대륙에서처럼 왕과 의회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사태를 겪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륙에서는 의회의 소집이 여전히 가장 큰 쟁점이었지만, 영국에서의 정치적 대립은 오히려 의회를 무대로 이루어졌다. 대립의 양측은 젠트리라고 불리는 지주 계급과 산업혁명으로 힘을 얻은 부르주아지였다. 양측의 1차전은 선거법을 두고 벌어졌다.
▲ 서세동점의 시대 1842년 영국 전함 콘월리스 선상에서 난징 조약이 체결되는 장면이다. 이 조약은 동아시아 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서 장차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이 동양을 어떻게 다룰지를 보여주는 실레이자 전범이 된다. 홍콩이 영국에 할양된 것도 이 조약에서 결정된 내용인데, 그게 150년이나 지나 1997년 7월 1일에야 중국에 반환될 줄은 당시 영국도 중국도 몰랐을 것이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영국 사회는 단기간에 큰 변화를 겪었다. 1780년에 약 1300만 명이던 인구는 50년 뒤인 1831년에는 2400만 명으로 거의 두 배가 되었으며, 특히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도시 인구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의회 선거법은 이러한 변화를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여기서 터무니없는 문제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유권자가 349명인 버킹엄 선거구나 4772명인 리즈 선거구나 선출하는 의원의 수는 서로 같았는가 하면, 심지어 산업화에 따른 인구 이동으로 유권자가 격감해 거의 선거구의 구실도 못하는 지역(이것을 부패선거 구라고 불렀다)에서도 버젓이 대표를 선출했다. 당연히 선거법은 일찍부터 개정 대상이었지만 휘그당과 토리당 간의 당리당략 때문에 질질 끌어오던 터였다. 휘그당은 부르주아지를 지지 기반으로 한 반면, 토리당은 지주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측이 현상 유지를 꾀했는 지는 자명하다.
하지만 1832년 토리당도 더 이상 선거법 개정에 반대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개정 결과 50개가 넘는 부패선거구는 신흥 공업도시로 옮겨졌고, 유권자 자격(재산 소유)을 완화해 유권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양당은 아예 자신의 색깔을 당명에 명확히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부르주아지의 휘그당은 자유당이 되었고, 지주의 토리당은 보수당이 되었다.
1차전을 승리한 자유주의 세력은 10여 년 뒤에 벌어진 2차전에서도 전통의 지주 세력을 밀어붙였다. 이번의 쟁점은 곡물법이었다. 곡물법의 역사는 무려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본 골격은 외국으로부터의 곡물 수입을 제한하는 것으로 지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곡물법도 역시 영국이 대륙에서 지리적으로 분리된 섬이기에 가능한 법이었다. 대륙의 국가라면 아무리 보호관세를 엄격히 적용한다 해도 민간의 유통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영국처럼 섬이라면, 물자를 유통하는 데 선박을 이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국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수출입의 통제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백 년간 곡물법은 영국의 경제를 대륙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영국의 경제가 대륙의 경제를 능가하는 수준에 올랐기 때문이다.
곡물법은 영국 내의 곡가를 항상 높은 수준으로 유지했다. 이것은 지주에게 큰 이득이었지만 산업 부르주아지에게는 이중적으로 불리한 요소였다. 곡가가 높으면 노동자의 임금을 낮출 수 없으므로 그 자체로 이윤이 적어질 뿐 아니라 임금 부담으로 공업 제품의 가격이 상승하므로 국내 판매와 수출에서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산업혁명 기간에 영국은 곡물 수출국에서 곡물 수입국으로 바뀐 탓에 기존의 곡물법을 계속 유지하다가는 국내 산업이 몽땅 거덜이 날 판이었다.
지주들의 이익은 단기적이고, 부르주아지의 이익은 장기적이었다. 그러므로 계급의 이해관계는 달라도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취할 노선은 분명했다. 결국 1846년 곡물법이 폐지되면서 부르주아지는 2차전도 승리로 장식했다【곡물법을 두고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들 간에는 논쟁이 치열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와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의 논쟁이다. 리카도는 산업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 곡물법에 반대했고, 맬서스는 지주의 입장에서 곡물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을 통해 두 사람은 초기 경제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을 각각 계승한 경제학이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의 두 가지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카도의 이론은 마르크스로 이어지면서 오늘날의 정치경제학적 전통을 낳았고, 맬서스의 이론은 한동안 잠자고 있다가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부활시키면서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을 낳았다】. 유혈 충돌이 아니라 선거에서 연거푸 이긴 것이므로 영국은 대륙에서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자유주의의 기치를 드높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영국의 문제는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영국의 계급은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둘만 있지 않았다. 산업혁명이 키워 낸 계급은 부르주아지만이 아니었다. 이미 영국은 완전한 자본주의 체제에 돌입했으므로 자본계급의 성장에 따라 노동계급도 성장했던 것이다. 대륙에서도 자유주의의 문제 이외에 사회주의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듯이,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대립을 비교적 쉽게 해결한 영국에서는 새로이 노동계급의 문제가 떠올랐다.
노동자들은 이미 1832년 선거법 개정부터 불만이었다. 유권자의 자격이 확대되어도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산자야말로 노동자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그래서 노동자들은 독자적으로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1839년 무려 128만 명의 서명으로 의회에 보통선거권을 구하는 국민청원을 보냈다. 당시 그들이 제출한 청원 문서는 헌장(People‘s Charter)이었으므로 여기서 차티스트 운동이라는 이 나왔다(charter의 라틴어는 카르타 carta인데, 13세기의 마그나카르타영어로 Great Charter가 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정작으로 부르주아지의 힘을 늘려준 것은 노동자들인데, 막상 권력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더 이상 참정권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으니 노동자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3년 뒤인 1842년에는 서명 인원을 거의 세 배로 늘려 다시 국민청원을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희한한 것은 그래도 노동자들은 혁명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의회 청원에만 의지했다는 점이다. 1848년 500만 명이 넘는 서명을 얻어 다시 국민청원에 나섰다가 실패한 이후 차티스트 운동은 점차 약화되었다. 대륙과 달리 사태가 이 정도로 무마되는 것은 지극히 ‘영국적인’ 특징이다. 그만큼 당시 영국에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확고히 안착했다는 증거다.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대결에서도 그랬듯이, 부르주아지와 노동자의 대결에서도 역시 대립과 충돌보다는 타협과 합의가 앞섰다【17세기 명예혁명 이후 영국인들은 마치 피를 보지 않기로 합의한 듯하다. 그래서 흔히 영국 근대사를 타협과 합의의 정치로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영국인들이 원래 평화로운 민족이기 때문은 아니다. 가장 큰 요인은 일찌감치 의회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았다는 데 있다. 가장 급진적이어야 할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의회 청원의 정도로 표출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동안 쌓인 의회민주주의의 두께를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러나 차티스트 운동이 실패한 데는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큰 그늘을 이루었던 영국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생활은 중반부터 크게 개선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용어로 말하면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에 해당하는데, 물론 선진 자본주의였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차티스트 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이념은 단계적으로 꾸준히 ‘제도권’ 내에 수용되었다. 이후 선거권은 점차 확대되어 19세기 말에는 마침내 노동자들의 선거권이 보장되었고, 20세기 벽두인 1906년에는 자유당의 간판을 내리고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을 함께 대변할 것을 표방하는 노동당이 성립했다. 그와 더불어 영국에서는 의회와 내각이 앞장서서 자유주의 개혁을 실시하는, 대륙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차티스트 운동을 끝으로 국내 문제를 일단락지은 뒤부터 영국은 본격적인 세계 진출의 길로 나서게 된다. 그전까지도 영국의 자본주의는 먹이를 쫓는 하이에나처럼 시장을 찾아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제국주의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선 것이다. 이 무렵의 왕이 빅토리아 여왕(Victoria, 1819~1901, 재위 1837~1901)이었기에 이 시기를 흔히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르지만, 왕이 아니라 의회와 내각이 그 시기를 이끌었으므로 그냥 상징적인 이름이라 해야 할 것이다(물론 ‘승리’라는 뜻의 여왕 이름이 영국의 성공을 상징하는 의미는 있겠다).
▲ 혁명을 겪은 나라 차티스트 노동자들이 런던 케닝턴 광장에 모여 있는 모습이다. 대륙은 피부르는 혁명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으나, 영국은 200년 전에 시민혁명의 예방주사를 맞아놓은 분에 노동자들의 행동마저 그리 급진적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영국의 근대사를 타협과 합의의 사라고 부르는 이유를 말해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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