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최후의 국제전
‘전범’들의 등장
애초부터 큰 힘을 쓰지 못한 베르사유 체제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나 베르사유 체제로 타격을 받은 나라들은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신생국들만 빼고는 1930년대부터 일제히 약진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 체제로 국내를 안정시킨 뒤 단기간에 상당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파시즘과 대척적인 사회주의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은 신생국답지 않은 노련한 국가 운영을 선보였다. 1921년부터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한 소련은 과감히 자본주의적 요소를 배합하고 공업을 육성시켰으며, 농업의 집단화로 농업 생산력에서도 큰 성과를 이루었다. 레닌의 사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서 트로츠키를 누르고 승리한 스탈린(losif Stalin, 1879~1953)은, 비록 정치적인 면에서는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는 무자비한 철권통치로 일관했으나 경제 발전으로 소련을 강대국의 대열로 끌어올린 덕분에 대내적으로 확고한 절대 권력을 구축했다(파시즘과 독재는 후진국을 속성으로 성장시키는 묘약이라도 되는 걸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일본의 성장이다.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난에 봉착한 일본은 만주를 ‘생명선’으로 여기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배에 나섰다. 국제연맹에서 강력히 항의하자 일본은 1933년 미련 없이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렸다(어차피 서구적인 국제 질서는 일본에 낯선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동양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일본이 품은 1차 목표는 두 가지, 한반도와 만주의 정복이었다. 이제 일본은 그 꿈을 이루었다. 2차이자 최종 목표는 중국 대륙을 정복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 꿈의 실현도 머지않아 보였다. 적어도 아시아에 관한 한 일본의 상대는 없으니까.
일본이 베르사유 조약의 최대 성과라 할 국제연맹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겨버리는 것을 본 히틀러는 일본의 ‘성공적인 선례’를 본받아 군축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1935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 조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것을 선언했다. 이제 독일은 패전국의 멍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체 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독일의 움직임을 본받아 무솔리니도 1935년에 오래전부터 숙원으로 삼았던 에티오피아 침략에 나섰다(1896년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가 예상 밖의 패배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는데, 에티오피아를 정복한 무솔리니는 엉뚱하게도 이것으로 ‘신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고 선언했다), 국제연맹은 일본에 이어 이탈리아를 침략국이라 규정하고 비난했지만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장차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 될 나라들은 각자 한 차례씩 예고편을 선보였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는 합동으로 또 한 편의 대형 예고편을 제작했다. 촬영 연도는 1936년, 로케이션 장소는 에스파냐였다.
▲ 베를린 올림픽 스포츠와 독재정치가 밀접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36년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여 나치 국가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사진은 개회식에서 성화가 점화되는 장면인데, 뒤편으로 나치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이 이 올림픽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 대회의 마라톤에 손기정이 또 하나의 파시즘 국가인 일본 대표로 참가하여 금메달을 땄다.
파시즘의 힘
19세기 말 미국에 필리핀과 쿠바를 빼앗긴 뒤 에스파냐에 남은 식민지는 지브롤터 해협 너머 모로코의 해안 지대와 대서양의 몇몇 섬들뿐이었다. 비록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은 이미 오래전에 영국에 넘겨주었지만, 어느새 유럽의 최후진국이 되어버린 에스파냐를 보면 언제 그런 영광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17세기부터 보수와 수구의 대명사가 된 가톨릭은 여전히 에스파냐를 총본산으로 삼고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공화국 실험’을 진압하면서 실력자로 나선 군부는 기톨릭과 결탁해 에스파냐의 부패를 총지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에스파냐는 전통적으로 지방색이 강한 탓에 제대로 된 국민국가의 모습조차 취하기 어려웠다(에스파냐 특유의 지역 분리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나라가 힘을 잃으면 국민이 일찍 자각한다는 역설적인 현상은 에스파냐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뒤늦게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에스파냐에도 노동계급이 성장했다.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 정치와 교회의 분리 등을 요구하고 나섰는데(이런 요구가 아직까지 제기된다는 것 자체가 에스파냐의 후진성을 말해준다), 그때마다 수구 세력(왕당파와 교회)은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수구 세력과 군부는 공생 관계가 되었고, 이에 맞서 지식인과 상인을 대표하는 공화주의자와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사회주의자 들도 연대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 연대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1936년의 인민전선 정부다【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통합을 이룬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혁명의 도가니였던 1848년의 프랑스에서도, 1917년의 러시아에서도 공화주의자(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공동의 적(제정, 차리즘)을 두고 있으면서도 한 몸으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에스파냐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만큼 파시즘의 위협이 노골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새 공화국 정부는 반대 세력이 강한 데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힘을 합쳐 이룬 만큼 진로가 순탄치 않았다. 가장 강력하지만 다른 세력들이 단결하는 바람에 야당 신분이 된 우익 세력은 집요하게 저항했으며, 곳곳에서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더구나 인민전선 정부보다 더욱 급진화되어 있는 노동자와 농민 들은 정부의 토지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런 판에 과거의 군부독재자였던 리베라의 아들이 창당한 팔랑헤당은 아예 노골적으로 이탈리아식 파시즘을 주창하고 나섰다.
몇 개월간 극도의 혼돈이 휩쓴 끝에 이윽고 올 게 왔다. 1936년 7월에 군부 지도자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는 은밀히 반정부 음모를 계획하다가 카나리아 제도에서 ‘공식적인’ 쿠데타를 선언했다. 그러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국내의 왕당파와 군부, 교회 세력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과 ‘이념상의 친척들’인 독일과 이탈리아도 즉시 쿠데타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점이다(유럽 파시즘 세력은 이미 국제화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최종 예고편인 에스파냐 내전이 시작되었다.
▲ 국제화된 파시즘 파시즘 세력은 한 나라 내에서만 결속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에스파냐의 신참 파시즘을 보호하기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배 파시즘들은 적극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은 에스파냐 파시즘의 주역인 프랑코(가운데)다. 그는 가장 후배 파시스트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선배 파시스트들이 몰락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1975년 죽을 때까지 에스파냐의 권좌에 있었다.
프랑코는 단기전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나, 무력하고 불안하게만 보이던 인민전선 정부는 막상 위기에 처하자 예상외로 만만치 않았다. 사실 맨 먼저 쿠데타에 대응한 것은 인민전선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 들이었다. 이들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무기고와 총포점을 습격해 무장하고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 이들의 활약으로 국내의 파시즘 세력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모로코에 주둔해 있는 프랑코의 반란군의 본산이었다.
해군이 반란군을 지지하지 않는 바람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프랑코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비행기를 모로코로 보낸 것이다. 게다가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에 경제원조와 더불어 각각 1만과 7만 명의 지원 병력까지 파견했다. 여기에 포르투갈마저 반란군을 지지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병력 수송을 도왔다. 이들의 개입으로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개입한 이상 에스파냐 내전은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이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파시스트 반란군은 같은 색깔인 파시스트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반면 공화주의의 정부군은 다른 공화국들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처음부터 불간섭 정책을 취했고, 마침 에스파냐와 같은 시기에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선 프랑스도 처음에는 에스파냐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려다가 영국의 압력으로 불간섭을 선언했다. 유럽의 양대 중심이 이런 태도였으니 자연히 다른 나라들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에스파냐 내전에 대해 유럽 각국의 정부는 불간섭으로 일관했으나 민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 영국의 조지 오웰 등 수많은 작가와 지식인, 노동자, 사회주의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에스파냐에 들어가 에스파냐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말로의 『희망』,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모두 이 참전 경험을 소설로 쓴 것이다). 3만 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되는 이들 의용군은 공식적인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으로 조직되기도 했다】.
1936년 8월 에스파냐 본토에 상륙한 프랑코군은 순식간에 에스파냐 전 지역을 손에 넣고 수도인 마드리드를 포위했다. 그러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는 정부군과 시민들의 항전이 만만치 않았고, 각 지방에서도 인민전선 정부와 연대한 세력들의 테러와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코는 유리한 전황에서도 쉽사리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정부의 연대 관계가 복잡한 만큼 연대 세력의 성격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 북부의 바스크 같은 지방은 정부가 자치를 약속했기 때문에 정부 측으로 참전했고【바스크는 에스파냐의 대표적인 이질적 지역이다.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는데, 토착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한다. 바스크족은 중세에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고 근대까지도 독특한 전통문화와 언어를 유지했다(바스크어는 헝가리어, 핀란드어와 더불어 유럽에서 인도 유럽어에 속하지 않는 드문 언어다). 도시화,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지금은 지방색이 상당히 퇴색했으나 여전히 바스크 분리주의가 남아 있다】, 무정부주의 세력 중에는 꼭 공화국 정부를 지킨다기보다 혁명의 기회로 여기거나 프랑코에 반대하기 때문에 반란군과 싸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시민들은 쿠데타군에 포위된 가운데서도 2년 이상이나 버텼다. 그러나 장기전이 될수록 전황은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은 목표도 하나고 성격도 파시즘이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묶인 통일체를 내내 유지할 수 있었으나 공화국 측은 처음부터 구성 요소가 다양한 탓에 전쟁이 길어지면서 내분이 발생했다. 그나마 뒤처지는 전력을 어느 정도 보완해준 통일성에 균열이 생기자 공화국 정부는 무너지고 말았다. 1939년 1월에 바르셀로나가 함락되고, 3월에는 마드리드마저 함락되면서, 결국 에스파냐 민중의 정부는 국제 파시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비로소 유럽의 ‘공화국’ 정부들은 이것이 곧 다가올 국제 파시즘의 위협을 예고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에스파냐 내전은 국제 파시즘 세력에게 파시즘의 정치적 실험장이자 신무기의 실험장이기도 했다. 1937년 4월 26일 바스크의 게르니카라는 한적한 마을에 독일 공군 콘돌부대의 전폭기들이 사격 연습을 하듯 폭탄을 퍼부어 주민 2000명과 가축들이 몰사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물론 당시 바스크는 프랑코군의 공격 목표이기도 했으나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게르니카 폭격이 바로 독일이 개발한 신무기를 실험하는 차원에서 벌어졌다는 점이다.
당시 독일군 총사령관인 괴링은 개전 초부터 이 신무기 실험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조그만 마을에 각종 포탄과 소이탄, 심지어 어뢰까지 사용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곧이어 벌어질 수백만 유대인 학살의 예고편일까? 그래서 유럽의 이질적인 요소인 바스크족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닐까?
▲ 공화국을 사수하라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부를 제외하고 유럽 각국의 정부는 에스파냐 내전에 관여하기를 꺼렸으나, 유럽의 지식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인민정부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에 앞다투어 참가했다. 사진은 프랑코군에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하는 여성들의모습이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영화화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만)의 모델이 바로 이들이었을 것이다.
준비된 전쟁
국제 파시즘의 위협은 생각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파냐에 파시즘 정권을 세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은 ‘파시즘의 총수’ 히틀러는 더 이상 일정을 늦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불과 20여년 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작성된 모든 기록을 깨고 전쟁에 관한 새로운 신기록들을 세우게 될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같은 세계대전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성격이 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에 도전한 것이고 ‘정상적인 힘의 대결’로 기존의 판도를 깨려 한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이라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국제 역학의 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파시즘이 주도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은 출발점부터 제1차 세계대전과 달랐다.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은 비록 전쟁의 객관적 조건은 숙성해 있었으나 아주 우연한 계기로, 즉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럽게’ 발생한 반면, 파시즘을 ‘의식적으로’ 수용한 제2차 세계대전의 도발국들은 계획적이고도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끝에 도발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된 사라예보 사건 같은 것은 필요도 없었다.
1937년 말, 히틀러는 군 수뇌부를 모아놓고 오스트리아와 체코 슬로바키아를 합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그 이유는 아직 취약한 독일의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이며, 또 군대를 강화하는 이유는 ‘독일의 생존권’을 위해서다. 그러나 말하는 그도, 듣는 참모들도 생존권 따위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이듬해 3월에 히틀러는 계획대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이제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이 다시 뭉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이교도 동맹국인 튀르크는 빠졌으나 당시 연합국이던 아시아의 또 다른 이교도 파시즘 국가 일본이 그 자리를 메웠고, 게다가 ‘무늬만 연합국’이던 이탈리아까지 가세했다. 오히려 전력은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훨씬 강해진 셈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독일 혼자서 전쟁을 감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히틀러는 두 번째 약속도 지켰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위협을 가해 해체시키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병합한 것이다. 이미 에스파냐 내전에서 또다시 밀려오는 대규모 국제전의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한 유럽의 지식인들은 일찍부터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으나, 당시 세계 정치의 우두머리인 영국은 평화 유지 (원래 평화란 기득권자의 구호가 아니던가?) 만을 부르짖으며 독일의 움직임에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경제의 우두머리가 된 미국 역시 대공황의 대책에 부심하고 있던 터라 굳이 유럽의 변화에 관심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히틀러의 행보는 갈수록 빨라졌다. 1939년 5월에는 파시즘 형제인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어 추축을 완성하고(베를린과 로마가 같은 경도상에 위치했기에 ‘추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8월 23일에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소련의 중립을 약속 받았다는 것은 곧 독일과 소련의 사이에 있는 폴란드를 점령하겠다는 뜻이다. 과연 독일은 불과 며칠 뒤인 9월 1일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노골적인 군대의 이동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독일군이 개전 2주일 만에 폴란드 주력군을 격파하자 동쪽의 소련도 러시아 민족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폴란드를 공격했다(또 다시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야합했다). 급기야 9월 말에는 두 나라가 폴란드를 분할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폴란드 국민은 나라 잃은 설움에서 해방된 지 겨우 20년 만에 또다시 나라를 잃었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폴란드 분할의 원흉인 독일과 소련에 의해, 이후 한동안 독일은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에 폴란드의 희생만으로 전쟁은 그치는가 싶었다【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한 시기를 더 늦게 잡는 견해도 있다. 이를테면 연합국 대 추축국이라는 구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1941년 12월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다. 연표 작성자가 아니라면 전쟁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선전포고가 이루어진 시기를 출발점으로 잡는 게 원칙일 것이다】. 적어도 독일은 아직 선전포고를 한 영국, 프랑스와는 맞붙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소련이 내친 김에 발트 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와 이듬해 봄까지 악전고투를 벌이느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소련은 아직 국제 질서 재편의 주역이 아니었다. 겨우내 침묵하던 독일은 1940년 4월 느닷없이 중립국인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공격하고 나서면서 이를 저지하는 영국, 프랑스군과 처음으로 충돌했다. 첫 접전은 독일의 완승이었다. 독일은 어렵지 않게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손에 넣었다.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줄기차게 평화만을 외친 체임벌린 내각이 사퇴하고 독일에 대해 강경한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을 중심으로 하는 거국적 연립 내각이 들어섰다. 히틀러와 처칠, 이제야 비로소 전쟁의 적수가 제대로 맞붙게 된 것이다.
▲ 비운의 폴란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랬듯이, 폴란드도 독일과 러시아의 등살에 온전한 역사를 꾸리지 못했다. 18세기 말 세 차례에 걸쳐 분할되어 사라져버린 나라를 20세기 초에야 간신히 복구한 폴란드인들은 다시 독일과 소련 때문에 망국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사진은 독일 기갑부대가 폴란드를 향해 진격하는 장면이다.
변수는 미국
처칠 내각이 성립한 바로 그날(1940년 5월 10일)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했다. 공군과의 긴밀한 공조 체제로 작전을 수행하는 독일의 막강한 기계화 부대는 손쉽게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장악하고 프랑스 국경에 다가섰다. 그러나 코앞에까지 접근한 독일군을 두고도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믿은 것은 육군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건의에 따라 1938년에 완공한 마지노선이었다. 독일과의 접경지대를 따라 두꺼운 콘크리트로 벽을 만들고 중화력을 구비하고 공기 조절 장치와 주거 시설, 휴게 시설, 보급 창고까지 갖춘 마지노선, 그러나 이 완벽한 요새에 대한 독일의 대응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고도 효과적이었다. 강하면 피하라.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굳이 정면 돌파하려 하지 않고 벨기에 쪽으로 우회해버렸다. 마지노선을 지키던 프랑스군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
독일의 우회 작전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단절시키는 부수 효과를 낳았다. 독일군이 밀려오자 벨기에에 고립된 영국군은 서둘러 본토로 철수했고, 프랑스 영내로 진군한 독일은 6월 14일 마침내 파리를 점령했다. 이로써 프랑스 영토의 3분의 2가 독일로 강제 편입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대’라는 이름으로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 1951)이 이끄는 비시 괴뢰정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흘러간 과거의 명예였고, 그는 이미 여든넷의 ‘쓸모없는 늙은이’였을 뿐이다. 괴뢰정권의 수반이 되는, 더욱 쓸모없는 짓을 한 대가로 그는 종전 후 프랑스 정부에 의해 종신금고형을 선고받고 아흔다섯 살로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쓸쓸히 만년을 보내야 했다】. 에스파냐의 프랑코 파시즘 정권에 이어 독일의 프랑스 점령으로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이 국제 파시즘의 세력 하에 들어간 것이다(남유럽은 이탈리아의 담당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9개월 만의 일이었으니 150년 전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보다도 빠른 기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영국이다. 서유럽을 손에 넣었어도 영국이 존재하는 한 유럽의 패권은 없다. 루이 14세의 시대나 나폴레옹의 시대나 늘 그랬고, 히틀러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던 히틀러는 프랑스를 정복한 즉시 영국과 타협을 모색했다.
사실 그는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부터 영국과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강화를 이루려 했으나 거절당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경파인 처칠이 버티고 있었으니 다시 거절당한 것은 당연했다. 결국 히틀러는 1940년 7월 영국 본토를 공격하기로 노선을 바꾸고 제공권 장악을 위해 영국의 공군기지와 전투기들에 대한 공습에 나섰다. 9월에는 런던 시내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에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전 세계 파시즘은 한 몸이 되었고, 전쟁은 바야흐로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었다.
영국을 최대, 최후의 적수로 본 독일의 판단은 옳았다. 다만 그 판단이 실제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이다. 영국은 과연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독일 공군은 런던만이 아니라 영국 주요 도시들에까지 무차별 공습을 했으나 좀처럼 승세를 탈 수 없었다. 작전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독일은 전선을 더욱 넓히기로 결정했다. 나폴레옹도 영국 공격에 실패하자 대륙 전체의 정복에 나서 대륙봉쇄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히틀러는 영국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륙의 완전한 정복을 꾀했다. 그것은 유일하게 파시즘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는 소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아직까지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국제 파시즘에 대한 장애 세력은 소련 이외에 또 한 나라가 있었다. 바로 미국이었다. 그러 히틀러는 미국에 관해서는 일단 걱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이 처리할 몫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히틀러가 소련 공격에 나선 이유는 유럽 전선에서 소련을 맡아줌으로써 아시아에서 일본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파시즘적 형제애라고 할까?】. 나폴레옹의 꿈을 실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폴레옹의 결과까지 답습한 셈이 되었다.
1941년 6월, 독일은 118개 보병사단과 15개 기계화사단, 19개 전차사단, 300만 명의 병력, 3600대의 전차, 27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소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옛날에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히틀러도 3~4개월이면 능히 소련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자원 지대 우크라이나를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모스크바까지 밀고 나간 것도 나폴레옹 전쟁과 똑같았다. 그러나 좋은 측면의 모방은 여기까지였다.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독일군은 초겨울 무렵인 10월에 모스크바 공략을 개시했다. 소련 역시 옛 러시아처럼 후퇴 전략으로 대응했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한 독일군이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자 소련군은 12월부터 반격에 나섰다. 역사의 시계추는 가혹하게 되풀이되었다.
모든 것을 속전속결로 끝낸다는 독일의 의도는 여기서 비로소 꺾였고, 제2차 세계대전의 클라이맥스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유럽의 전세는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해 그때까지 연합국측에 군수품만 공급하던 미국도 본격적으로 참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미국 상선을 공격해 미국의 참전을 유발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아예 미군 기지를 폭격해 미국을 전선으로 끌어냈다. 전선은 자연스럽게 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이 맞서고,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는 영국과 소련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맞서는 형국이 되었다.
▲ 실수의 되풀이 히틀러는 실제로 의도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130년 전 나폴레옹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영국을 제외한 대륙을 모조리 장악한 것도 그랬고, 영국 본토의 공격에 실패한 것도 그랬다. 마지막 닮은꼴은 소련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히틀러도 소련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봤으나 문제는 또다시 동장군이었다. 사진은 러시아의 설원을 힘겹게 행군하는 독일군의 모습이다.
진주만 기습부터 1942년 봄까지 몇 개월간은 추축국의 세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그러나 원래 공격자는 속전속결이 유리한 법이므로 장기전이 되면서 불리해지는 쪽은 그들이었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도 그랬지만 개전 초기에는 참전하지 않았던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인 것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승산이 희박해진다는 것을 뜻했다.
과연 역전의 계기는 태평양에서 먼저 생겨났다. 1942년 2월에 영국 동북아시아군의 항복을 받아 제해권을 장악하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미얀마를 손에 넣을 때까지 일본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로써 그들이 구호로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달성된 듯했다. 그러나 미국이 정신을 차리면서 전황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5월 남태평양의 코랄 해전에서 일본군은 개전 후 첫 패배를 맛보았고, 다음 달에는 미드웨이에서 미국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해군의 주력을 상실했다.
역전의 바통은 아프리카에서 이어받았다. ‘사막의 여우’ 로멜의 탁월한 전술에 밀리던 영국군은 10월부터 반격에 나섰으며, 11월에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전세를 뒤집었다. 동부전선에서도 독일군은 전선의 교착을 깨기 위해 다시금 대규모 공세를 취했다가 소련군의 반격을 받아 1943년 초에 30만 명의 병력이 궤멸당하는 패배를 맛보았다. 같은 달 태평양의 솔로몬 제도에서는 미군이 격전 끝에 과달카날을 점령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부는 이 시점에 사실상 결정되었다.
1944년 6월에 미군과 영국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프랑스로 진격했다. 이어 8월에는 파리 시민들의 투쟁으로 프랑스가 독일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다【프랑스는 본토를 독일에 점령당했지만, 영국에 망명한 드골 정부가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고, 조국의 해방도 스스로의 손으로 이루었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아무리 프랑스가 유럽에서 대접받는 국가였다 하더라도 종전 후 별로 발언권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와는 달랐다. 193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우리 민족의 항일 무장투쟁은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더욱 투쟁의 고삐를 죄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크게 위축되었다. 게다가 일본의 강압으로 징병까지 당한 탓에 종전 후 연합국 측은 한동안 한반도를 피해자로 보지 않고 일본의 협력자로 여겼다】. 또 7월에 태평양에서는 미군이 사이판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에 나섰다. 1945년 초부터 승리를 확신하게 된 연합국 측은 전후 처리에 관해 협상을 시작했다.
나머지는 마무리에 불과했다. 3월에 연합군은 독일의 영내로 진격했다. 4월에는 무솔리니가 스위스로 도망치려다 이탈리아 유격대의 손에 피살되었고,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하자 히틀러가 자살했다. 그 일주일 뒤인 5월 7일 독일이 항복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은 8월에 두 차례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은 끝에 항복했다.
▲ 파시스트의 최후 파시즘이 대중에게 불어넣은 환상은 파시즘이 힘을 잃으면서 깨졌다. 파시즘이 패하는 것을 본 대중은 간사하게도(?) 파시즘에 대한 혹독한 탄압으로 돌아섰다. 사진은 무솔리니와 그의 애인이 유격대의 손에 의해 총살되어 거꾸로 매달린 장면이다.
항구적인 국제 질서의 수립
2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 세계는 사상 처음 겪은 엄청난 전쟁의 규모에 경악했다. 또 그런 만큼 이것으로 전쟁은 끝인 줄 알았다. 이보다 더 큰 전쟁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한 번만으로 족할 줄 알았던 세계대전은 겨우 20년 뒤에, 그것도 더욱 큰 규모로 터져 나왔다(사망자의 수만 해도 제1차 세계대전의 두 배가 넘었다). 그제야 세계는 얼마든지 더 큰 전쟁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또 그럴 경우 세계는 공멸하리라는 것도 실감했다.
유럽인들은 중세에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이유를 새삼 생각해 보았다(십자군 전쟁이야 오래 질질 끌었을 뿐이지 대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세가 끝나고 근대에 들어온 뒤부터 대형 국제전들이 연이어 벌어지게 된 이유를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최소한의 통합성이 없으면 전쟁은 필연적이다. 300년 전에 홉스라는 철학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법과 제도에 묶이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을 뿐이라고. 그는 한 나라 내의 개인과 사회를 말한 것이지만 그 말을 국제적으로 연장하면 국가가 곧 개인이 된다. ‘국가의 국가에 대한 투쟁.’
중세에는 교회와 교황이 그런 투쟁을 조정하는 ‘법과 제도’의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연합국 측은 중세의 교황과 같은 역할을 해줄 기구를 만들었다. 그것이 1945년 10월에 결성된 국제연합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국제연맹의 결정적인 단점은 강제력이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국제연합은 그 점을 보강하기로 했다. 참가국들의 군사력을 동원해 국제연합군을 편성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국제연합 사무국은 교황청이었고, 국제연합군은 교황군이었다. ‘교황령’은 뉴욕의 39층짜리 빌딩으로 축소되었지만.
대규모 국제전은 많은 신생국을 만든다. 17세기부터 세기마다 한두 차례씩 터진 유럽의 국제전이 모두 그랬고, 20세기 초의 제1차 세계대전도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사상 최대의 신생국들을 낳았다. 우선 독일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은 모두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엉겁결에 독일에 합병된 오스트리아는 다시 분리되어 중립국이 되었으며, 이탈리아가 점령했던 동유럽의 국가들도 전부 다시 독립했다. 아시아에서도 일본이 점령했던 한반도가 독립했고,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가 다시 옛 주인인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귀속되었다가 결국에는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승전국이 전쟁 중에 차지한 지역은 독립시키지 못하는 관례가 여전히 통용되었다. 그 때문에 소련이 집어삼킨 발트 3국은 독립하지 못했다(이 나라들은 소련이 해체된 뒤 1991년에야 독립하게 된다). 다만 절반만 먹은 폴란드는 소련도 다시 토해내야 했다. 여기서 다른 연합국들은 새로운 긴장을 느꼈다.
▲ 소련의 포스터 종전이 가까울 무렵 소련에서 나온 전쟁 포스터다. 미국과 영국, 소련이 합심하여 히틀러의 목을 죄고 있다. 물론 소련은 어엿한 승전국의 신분이지만, 개전 초기 폴란드 분할과 핀란드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을 감안하면, 국제 파시즘에 일관되게 반대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또 전쟁을 내내 주도한 영국이나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준 미국과 같은 위상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 포스터는 장차 소련이 전후 질서 재편의 주역이 되겠다는 각오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영국이 무너짐으로써 소련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
그 긴장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잠시 국제 파시즘이 지배한 동유럽 국가들은 불행하게도 전통적인 지배층이 대부분 파시즘과 결탁하고 있었다. 독립을 이루면서 국내의 반파시즘 세력이 지배층을 쫓아내고 집권했는데, 그 중심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전후에도 여전히 약소국의 신세인 탓에 서유럽 국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그 나라들은 전후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소련으로 붙었다(물론 소련도 적극적으로 손짓을 보냈다)【제2차 세계대전에서 동유럽 국가들의 지배 세력이 파시즘에 붙은 이유는 이 지역이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의 관할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오스트리아는 항상 동유럽을 노렸고, 동유럽의 지배층도 오스트리아와 자주 야합했다. 15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붕괴한 이후 동유럽은 늘 여러 약소국으로 나뉘어 분열과 갈등을 거듭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오스트리아가 늘 동유럽을 넘본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세계가 일제히 공산화된 이유도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연합국들은 긴장을 넘어 새로운 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서유럽 세계도 변화의 물결에서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전쟁의 조짐이 역력했던 1930년대 후반에도 영국은 내내 전쟁을 망설였다.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국내 경제가 여의치 않았던 탓이 크지만, 역사적으로 영국이 대륙의 사태에 개입하기를 꺼려왔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전후에 영국은 그런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리더 자리와 함께 세계의 리더 자리를 미국에 내주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영국 경제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으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륙 경제와 함께 몰락해버렸다.
영국이 남긴 빈자리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세계 정치의 중심이라는 지위까지 획득했다(현대의 교황청‘이 미국에 설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씨앗에서 뿌리, 줄기, 개화, 결실로 이어지면서 내내 서쪽으로 향했던 유럽 문명은 이제 다시 한 걸음, 그리고 최종적으로 서진했다.
소련의 동유럽 진출로 연합국들이 느낀 위기는 미국으로 넘어갔다. 이제 새로운 세계 질서의 두 축이 된 미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대립을 빚으면서 관계를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니 최소한 10년 전의 상황이었어도 전쟁의 조짐은 뚜렷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일체의 여백이 없이 모든 지역이 꽉 짜인 유럽 세계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고, 따라서 분쟁의 초점이 아니었다. 이후 20세기 말까지 이르는 50여 년 동안 3차 대전을 막은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긴 호흡에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은 17세기 30년 전쟁으로 분립하기 시작한 서유럽 세계의 질서를 완성한 전쟁이었다. 30년 전쟁으로 서유럽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그전까지의 종교적 질서를 깨고 각개약진에 나섰고, 에스파냐-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국민국가적 질서를 수립했다. 이후 서유럽 세계는 제국주의 질서로 세계 분할을 완료했고, 식민지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여기서 패배한 후발 제국주의가 국제 파시즘 세력을 이루면서 다시금 대회전을 벌인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러나 그 치열한 전쟁들을 거치면서 만들어낸 최종적인 전리품은 서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 연합국의 3대 승전국인 영국·미국·소련 가운데 영국의 운명만 서유럽과 함께 몰락했다는 점은 나머지 두 나라, 미국과 소련이 전후 질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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