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의 영광과 수난
그러나 바로 이러한 화려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의 승리, 그 자체야말로 그의 생애의 수난이요 비극이었다. 그의 거만한 자세는 당시 이미 얼마나 교권이 황권과 대적할 수 있을 만큼의 조직적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방증하는 한 사례이기도 했지만, 결국 황제를 능멸하는 신민이 편하게 버틸 수 있을 만큼의 판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세 황제 중 애초부터 실권자는 아타나시우스와 대결한 콘스탄티우스였다.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는 막내동생 콘스탄스와 영토싸움을 벌이다가 불과 23세의 젊은 나이에 일찍 제거되고 만다(AD 340). 아타나시우스를 지원한 로마의 황제 콘스탄스도 10년 후 야만족 출신의 장수인 마그넨티우스에게 제거되고 만다. 콘스탄스는 피레네산맥 기슭까지 도망쳐왔는데 추격해온 기병대에 따라잡혔다. 황제는 따라잡히자마자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리고 시체는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되었다. 이것이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로 입성시킨 황제, 10년 동안이나 광대한 로마제국의 3분의 2를 다스린 콘스탄스 황제의 최후였다. 그의 나이 30세였다(AD 350).
아리우스파를 적극 지지하는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로마제국 독존의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아타나시우스의 모독적 행동을 감내할 길이 없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집요하게 아타나시우스를 박해한다. 여기서부터 아타나시우스의 ‘도바리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또 다시 시작되지만 결국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그를 죽이는 데 실패한다. 기번의 다음과 같은 멘트는 로마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의미심장한 통찰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야말로 세속적 권력의 가장 격렬한 발휘조차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종교적 명분의 원리의 힘을 체험해야 했던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가 되었다.
…… and the son of Constanine was the first of the Christian princes who experienced the strength of those principles which, in the cause of religion, could resist the most violent exertions of the civil power(The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 428).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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