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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13장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메시지까지 - 콘스탄스ㆍ콘스탄티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13장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메시지까지 - 콘스탄스ㆍ콘스탄티우스와 아타나시우스

건방진방랑자 2022. 3. 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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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스ㆍ콘스탄티우스와 아타나시우스

 

 

그러나 3377월 무렵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황궁을 피로 물들인 대숙청이 일어났다. 이방원의 살생부는 그래도 오랜 세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 대숙청은 무지막지하게 한꺼번에 선대의 정치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싹 쓸어버린 사건이었다. 대제의 육친 중에 살해되지 않은 것은 12세인 갈루스와 6세인 율리아누스뿐이었다. 그리고 천하는 콘스탄티누스 2,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3형제에게로 3분되었던 것이다. 이 대숙청을 주도한 인물은 둘째아들 콘스탄티우스였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는 동방을 지배하던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관할구역에 속해 있었는데 그의 탄압을 받고 로마로 가서 성격이 경쾌하고 활달했던 막내 콘스탄스 황제의 신임을 받고 그의 도움을 얻어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하게 된 것이다. 콘스탄스의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최후통첩에 형 콘스탄티우스는 하는 수 없이 양보를 했다. 동방의 황제 콘스탄티우스는 자신이 박해했던 일개 신민에게 몸소 화해를 간청하기까지 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서 보호와 지원과 존경을 강력하게 다짐하는 세 차례의 친서를 받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그에게 대주교직에 복귀하도록 권하는 한편 한 걸음 더 나아가 체면손상을 무릅쓰고 주요 대신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이 진정임을 입증하게 하는 조치까지도 취했다. 이 뜻을 더 한층 공식화하기 위해 그는 이집트에 엄격한 칙령서를 보내 아타나시우스 지지자들을 다시 불러들여 특권을 회복시켜주고, 그들의 무죄를 선포하고, 또한 에우세비우스파의 주도하에 작성되었던 아타나시우스 정죄의 재판기록을 삭제하도록 했다. 이처럼 자기에게 유리한 만반의 대책이 마련된 후에야 아타나시우스는 느긋하게 트라케, 아시아, 시리아 등 여러 지방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여행중에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동방주교들이 그에게 비굴하게 경의를 표했지만 그는 그들을 경멸했을 뿐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안티옥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를 만났다. 덤덤하게 그의 포옹과 항변을 동시에 받아들였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그가 가면 최소한 그의 교구내에 하나의 아리우스파 교회를 허용해야 한다는 황제의 제안에 대해서 아타나시우스는 그렇다면 제국내의 다른 지방에서도 자기교파에 대해서도 똑같은 관용이 베풀어져야 한다고 대꾸하면서 확답을 회피했다. 이것은 마치 더 강한 국가의 독립군주가 내뱉을 성싶은 그런 언사였다. 아타나시우스의 알렉산드리아 입성은 줄리어스 시이저의 개선행렬처럼 성대했다. 그가 탄압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있는 동안 주민들은 그에게 사모의 정을 키웠다. 그리고 그가 황제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주교로서 돌아오는 모습에 그들은 프라이드를 느꼈다. 그는 이집트 민중의 영웅이었으며 제국종교화되어가고 있던 신흥기독교에 어떤 확고한 정통의 기준을 세워주는 진리의 화신이었다. 근엄한 그의 자세와 함께 그의 권위는 확고해졌으며, 그의 명성은 에티오피아에서 브리타니아에 이르기까지 온 기독교세계에 널리 전파되었다(The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 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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