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장하면서 철학과 신학을 깊게 공부한 인물로서 이미 니케아 종교회의에 알렉산더 주교를 수행한 집사(deacon)로서 참석하여 아리우스 논쟁의 현장을 목격하였다. 그런데 3년 후(328) 알렉산더 주교가 병사하자 그 후임으로 발탁되어, 젊은 나이에(35세)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었다. 그는 주교가 되자마자 이집트와 리비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자기 교구의 상황을 세밀하게 직접 관찰하였고, 나일강 유역의 콥틱어를 쓰는 수도자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지도자인 파코미우스(Pachomius)와도 교분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리코폴리스의 주교인 멜레티우스(Meletius of Lycopolis)와 아리우스의 이론을 이단으로 휘몰아치며 니케아 신경(信經)의 동체론을 정통이론으로 확립하는 데 평생을 바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아리우스파가 그의 생애를 통하여 더 우세하였기 때문에 5번이나 유형을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아리우스 지지파인 발렌스 황제에 의한 마지막 유형이 365년).
한편 아리우스파는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주교 유세비우스와 콘스탄티아의 치밀한 복권계획에 의하여 아타나시우스를 포함한 반아리우스파들을 모두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당 봉헌식에서 아리우스를 복권시킬 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하였다.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복직식을 거창하게 준비했다. 아리우스는 끝내 자기의 신념이 관철되고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흥분된 가슴을 억누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리를 걷다가 심장마비로 비장한 한 생애를 마감한다(336). 이미 86세의 노구였다. 그리고 1년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서거한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계속해서 아타나시우스를 탄압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러한 탄압 속에서 오히려 이집트 민중들의 영웅이 되었으며,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비판하는 신학적 논문을 계속 표한다. 삼위일체 논쟁은 그동안 동체론(homoousios)을 포기해 버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같지 않다는 아노모이오스(anomoios), 아버지와 아들은 유사한 실체이다라는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실체라는 애매한 개념을 생략해 버리고 그냥 아버지와 아들은 유사하다라고만 주장하는 호모이오스(homoios) 등등으로 변질되어 구질구질한 논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끈질긴 논거와 설득에 의하여 원래의 동체론ㆍ일체론인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를 그 정통이론으로 다시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호모우시오스이론은 향후 가톨릭의 역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토록 1세기에 걸쳐 치열하게 싸워야만 했던 삼위일체론이란 되대체 무엇인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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