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달타의 고독
그것은 고독이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한 평범한 사나이의 서글픈 고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러한 고독이 아니었다. 자신의 중도의 깨달음의 계기가 도저히 그 친구들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소외된 느낌이 그 고독감의 출발이었겠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모든 고(苦)로부터의 해탈이 궁극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이루어질 수 없는 나 홀로만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던져주는 황량한 고존(孤存)의 고독이었던 것이다.
후대의 전기작가들은 이 대목에서 다섯 친구들이 싯달타를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몄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싯달타 자신이 중도의 깨달음을 득한 후에 주체적으로 그들을 멀리 했을 것이다. 최소한 떠나가는 그들을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이제 싯달타의 고행(苦行)은 고행(孤行)으로 바뀌어야만 했던 필연성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매우 신화적인 기술이지만 싯달타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서 사방을 두루 살피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 한 이야기가 여기저기 기록되고 있다【이 이야기는 이미 불교의 근본경전이라 할 수 있는 『修行本起經』에 다 오고 있으므로(아함과 동시대의 고본으로 추정됨) 매우 초기의 설화양식으로 이겨진다[夫人攀樹枝, 便從古脇生墮地, 行七步, 擧手而言: “天上天下, 唯其爲尊. 三界皆苦, 吾當安之.” 『修行本起經』, 『大正』3-463.】. 얼핏 듣기에 매우 조잡하고, 저 혼자 잘났다고 까부는 어린아이의 망언처럼 들릴 뿐만 아니라,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에도 매우 어긋나는 발언이지만, 이것은 후에 이루어지는 성도, 다시 말해서 독존의 독각(獨覺)과 관련하여 지어진 설화일 것이다. 그것은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독한 실존에 대한 자만과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제 싯달타는 홀로 갈 수밖에 없다. 저 니련선하를 건너 보이는 시커먼 시타림에서 저 광채서린 보드가야의 핍팔라나무(畢波羅樹, Pipphala-druma: 畢鉢羅樹, 畢撥樹라고도 쓴다)까지의 싯달타의 고행(孤行)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문제가 나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독한 존재의 내부에 있을 뿐이라는 문제의식의 일대전환, 목샤(mokṣa, 解脫)의 이상, 고해를 벗어던진 자유와 안락의 열반이 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나 실존의 일심(一心)상에서 얻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바로 중도요, 이 깨달음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뉴우 웨이(New Way)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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