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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싯달타와 수자타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싯달타와 수자타

건방진방랑자 2022. 3. 1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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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타와 수자타

 

 

이때, 허기의 극도에 달한 고독한 싯달타에게 우루벨라(Uruvelā, 優留毘羅)‘Uruvila-grama’로 불리기도 하고, ‘優婁頻螺로 한역되기도 한다. 다양한 표기법이 있다마을로부터의 한 아리따운 처녀가 등장한다. 그 처녀가 우연히 강가나 강 주변의 수풀로 오게 되었는지, 싯달타가 우루벨라마을로 들어가 공양을 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부분의 기술도 경에 따라 복잡다단한 전승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녀의 이름은 불교도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수자타(Sujata, 須闍多)! 싯달타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의 대각을 이룰 수 있는 최초의 에너지를 제공한 유미(乳糜, madhupayasa) 죽을 공양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던 여인이었다. 전승에 따라서는 그 최초의 공양자는 수자타가 아닌 그냥 두 여인으로 기술이 되기도 하고, 난다와 난다발라(Nanda & Nandabalā), 혹은 난다와 우빠난다(Nanda & Upananda)라는 두 자매로 기술이 되기도 한다. 이 두 자매는 소치는 소녀[牧牛女]들로 전하여지고 있다이 유미공양(乳糜供養)의 수자타설화는 비아리안계통, 그러니까 아리안계의 사람들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이전의 토착적 문화와 관련있다는 미야사카 유우쇼오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나가(Nāga) 신앙의 한 양식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宮坂有勝, 佛敎起源(東京 : 山喜房佛書林, 1987), p.352. ‘須闍多라는 한자음역이름은 佛本行集經에 보이는데 그것을 의역하여 善生,’ ‘善生女라 했다. 方廣大莊嚴經에는 善生,’ ‘善生女라고만 나오고 음역은 나오지 않는다. 산스크리트어로 ‘su’는 형용사로 쓰일 때는 ,’ ‘좋은의 뜻이고 부사로 쓰일 때는 지극히,’ ‘극도로의 뜻이다. ‘jata’는 태어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Sujata’잘 태어났다’[善生]는 뜻이다. 태생의 환경이나 시기나 운수가 모두 좋다는 넓은 뜻이겠지만 우리말로 잘 생겼다’[善生]는 의미도 포함할 것이다. 佛本行集經에는 彼女端正, 可喜無雙.’이라 하여 그 외모의 아리따움이 강조되고 있다. 경전에는 모두 이 여인에게 전날 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위인이 나타나리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이러한 신화적 기술방식은 그 우연한 해후장면의 감동을 경감시킬 뿐이다. 佛本行集經에는 둘이서 만나는 첫 장면이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싯달타가 먼저 도공의 집으로 들어가 깨진 항아리 조각 하나를 구걸한다. 그리고 그 항아리 조각을 들고 우루벨라 마을 집들을 차례로 걸식해간다. 드디어 우루벨라 마을의 촌장집으로 걸식하러 들어서게 된다. 그 때였다. 그 촌장집의 용모단정한 딸인 수자타가 싯달타가 묵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그 순간, 그 처녀의 양 젖가슴에는 뿌연 젖이 스스로 철철 넘쳐흘렀다 운운[善生見已, 從其二乳, 自然汁出].

 

싯달타와 수자타의 해후를 둘러싼 이야기는, 오뒷세우스에서 호머가 그리고 있는, 오딧세우스와 스케리아의 왕 아루키노오스의 딸, 나우시카(Nausikaa, Ναυσικάα)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설화와 지극히 유사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는 이러한 신화에서 힌트를 얻어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라는 걸작 만화영화를 만들었다.)

 

싯달타는 수자타에게서 귀한 유미죽 한 그릇을 얻어, 우루벨라 마을을 나와 다시 나이란쟈나강변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수염깎고 머리깎고 목욕재계하고 용왕의 왕비[河中龍妃]가 마련한 깨끗한 자리에 앉아, 그 유미죽을 들고 순식간에 32상을 회복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여기 32상이란 매우 신화적인 싯달타의 용모에 관한 양식적 표현인데, 결국 32상을 회복하였다 하는 것은 그가 건강한 원래 자기 모습을 회복하였다는 뜻이다. 시타림에서 6년 간의 고행 끝에 수척해진 몸이 유미죽 한 그릇에 32상으로 회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생각키에 싯달타는 우루벨라촌에 들어가 그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자의 집에서 몇 달을 기거하면서 죽과 밥의 공양을 얻어, 완벽한 자기 몸 컨디션을 회복한 연후에, 지극한 정상인으로서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을 수 있는 사색의 자리를 마련하러 떠났을 것이다.

 

그는 우선 우루벨라 마을을 떠나 자신의 고행의 장소였던 시타림으로 갔다. 시타림을 굽어보고 있는 매우 각박한 석산이 하나 있다. 싯달타는 그 각박한 석산으로 올라갔다. 그가 정각을 얻기 전에 올랐던 산이라 하여 우리는 그 산을 전정각산(前正覺山, Prag Bodhigiri)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싯달타가 그 산의 정상에 올라서자, 온 산이 진동하면서 난리를 쳤다. 싯달타가 여태까지 닦아 온 공덕의 무게에 짓눌린 산신(山神)들이 쇼크를 먹고 날뛰었던 것이다. 산신들은 싯달타에게 저기 저 강 건너 평온한 땅, 핍팔라나무가 서있는 자리를 권고하게 된다. 한마디로 전정각산은 싯달타의 성도의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싯달타는 풍수지리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명당이란 곧 자기 몸의 기와 산세의 기가 화합되는 곳이다. 싯달타는 전정각산 산정에서 그 불화의 기를 감지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곳을 가보면 전정각산은 역시 고행의 장소는 될지언정, 중도의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심히 각박한 석산이다. 그러나 이 산의 동굴에서 살던 한 용(Nāga)은 자신의 동굴 안에서 싯달타가 성도하기를 원했고 그가 떠나기로 한 결단을 매우 아쉬워했다. 그래서 싯달타는 그 굴속에 들어가 자기 그림자만을 남겨놓고 떠났다. 지금도 그 굴이 남아있는데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그 굴을 유영굴(留影窟)이라 부른다. 지금은 티벹사원이 그 옆에 자리잡고 있다.

 

 

 안개 속의 낙타 봉우리가 전정각산이다. 유영굴이 있는 봉우리에서 촬영

 

 

 유영굴 내부, 유영굴 이야기는 우리나라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도 재미있게 기술되어 있다. 일연스님의 세심한 마음과 국제적 감각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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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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