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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다이어리,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 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 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8.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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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1.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는 이미지는 이미지가 아니다

 

 

나는 바슐라르를 대할 때마다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문명을 정면으로 부인한 사람이다. 그는 서구 인식 전체를 향해 덫을 놓은 사람이다.

-미셸 푸코, 바슐라르 탄생 100주년 기념 인터뷰 중에서

 

실용적 과학교육에서 철학교육으로 옮겨왔건만, 나는 완전히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불만족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요. 어느 날 디종(프랑스 도시 이름)에서 한 학생이 나의 살균된 세계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건 하나의 계시였어요.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 세균들을 들끓게 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던 거지요.

-바슐라르, 폴 지네스티에의 바슐라르를 알기 위하여중에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우체국 전신기사로, 1차 세계대전 당시 통신 중대 중대장에서 고향마을의 과학교사로, 대학에서 과학사를 강의하는 과학자에서 소르본 대학 철학교수가 되기까지. 드라마틱한 라이프스토리로 유명한, 그러나 그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글쓰기 방식으로 유명한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시인보다 더욱 시적인 문체로 철학을 강의했던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은 미생물 혹은 세균을 닮은 존재다. 우리에게 영혼의 질병을 선물하여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로소 살아 있게하는 생명체 내부의 타자,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기에. 기계와 숫자로 깔끔하게 마름질된 합리성의 세계, 살균된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봤다. 그런데 생태주의 애니메이션으로 잘 알려진 원령공주는 내 짐작만큼 생태주의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생태주의 너머, 그보다 훨씬 커다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원령공주는 단지 환경을 보호하자는 김빠지는 교훈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원령공주는 우리에게 환경 파괴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을 가지라고 채찍질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함께 보니 그런 막연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길 잃은 몽상이 더욱 확장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이즘(ism)’으로 구획될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데 과연 그게 무엇인지 좀처럼 포착할 수 없었다.

 

원령공주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분명 생태주의 그 이상이다. 그런데 그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몇 년 후 우연히 바슐라르를 읽다가 비로소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더욱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는 프리즘을 얻게 되었다. 원령공주는 악을 퇴치하는 정의의 사도로서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여신상이 아니다.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대중화된 생태주의는 인간을 죄책감의 동물로 격하시켜버린다. 원령공주는 생태주의 그 이상의 메시지, 생태주의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엄청난 스케일의 영화로 다가왔다.

 

 

 

 

원령공주는 인간의 두뇌운동의 두 경향을 강렬한 보색대비로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 자연을 착취 가능한 자원으로 파악하는 합리적 이성과 자연을 자신의 존재론적 태반으로 인식하는 신화적 상상력 사이의 근원적인 갈등. 원령공주는 인간의 두뇌운동의 구조를 격렬한 갈등과 대립의 형태로 보여주는 미야자키 하야오식 철학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준다. 바슐라르의 프리즘으로 보면 이 애니메이션은 이미지의 세계개념의 세계라는 인간의 두 가지 두뇌활동의 근원적인 충돌을 보여주는 거대한 스펙터클이 아닐까. 개념의 세계가 과학주의의 산물이라면, 이미지의 세계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계몽주의의 확산 이후로 끊임없이 합리적 이성의 장애물로 인식되어왔던 이미지의 세계, 비논리적 상상의 세계, 주관적 몽상의 세계야말로 바슐라르의 필생의 연구 과제였다.

 

 

이미지는 이미지에 의해서만 연구될 수 있다. 몽상 속에서 모여드는 이미지들의 모습 그대로를 꿈꾸면서 말이다. 상상력을 객관적으로 연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미지에 대하여 경탄을 할 때만 진정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이미지와 개념은 인간의 정신활동의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극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상력과 이성이다. 이들 사이에는 배척하는 극성이 작용한다. 자장의 극성들과는 공통점이 없다. 그들은 서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밀어낸다.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중에서

 

 

이미지를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이미지가 아니다. 이미지는 감성의 차원에서는 실존하지만 논리적으로 재생할 수 없는 상상력의 운동이다. 논리적 분석이나 개념적 규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를 꿈꾸는 것. 아무런 언어도 발설하지 않는 토토로에게 우리가 매혹되는 이유 또한 그것일 것이다. 개념적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편안함, 분석할 수 없는 치유의 힘,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상상력의 자유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토템적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 토토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토토로의 장수비결은 우리 안의 원시적 야생의 꿈을 일깨우는 토템적 상상력에서 발원한 것이 아닐까. 토토로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한 번도 언어를 발설하지 않는다. 토토로가 뿜어내는 그 푸근함, 그 따뜻함, 그 푹신함만으로 우리는 모든 걸 느낄 수 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이 상상의 생명체를 향한 전 세계 팬들의 열광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바슐라르는 사유하는 의식보다 꿈꾸는 의식이 훨씬 더 어려운 지적 행위임을 통찰했다. 말하자면 합리적 이성이 쓸모없다고 몰아세우는 몽상(daydream)’, 인간의 낮 꿈이야말로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상상력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상상력은 사유에 따르는 부차적 능력이거나 진정한 사유를 추구하다 남은 쓸모없는 잔여물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구철학은 몽상자체를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몽상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해버림으로써, ‘사유만을 다시 사유하는쳇바퀴를 돈 것이 아닐까. 사유는 창백한 개념의 시체, 물고 물리는 개념들만의 무의미한 연쇄작용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아닐까. 바싹 마른 개념들의 무미건조한 사유의 퍼즐이 아니라, 생생한 촉감과 온도와 빛깔을 지닌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바슐라르는 문명의 역사에서 배제된, ‘망각된 몽상의 가치를 발견해냈다.

 

 

단순한 인상주의와 몽상에 기반을 둔 주관성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 이 문제에 대한 바슐라르의 대답은 자신에게 충실하기이다. 인상주의는 사물의 겉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을 통하여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인상주의는 자신에게 최초로 전달되는 정보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다음 정보를 기다리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최초의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최초의 인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혜안의 눈을 가진 몽상이 시작되는 것은 이 최초의 인상이 걷힌 다음이다. 인식의 오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 혜안은 사물의 깊이를 보고자 하는 눈이다.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 문학적 몽상의 활동은 텍스트를 충실하게 다시 읽을 때에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은 두 번째 독서에 있다고 바슐라르는 말하고 있다.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2005, 63.

 

 

 

 

 

2. 세균 없는 곳에서는 상상력이 배양되지 않는다?

 

 

객관적 인식의 측면에서는 진실한 것이 아니지만 무의식적 몽상에서는 매우 실재적이고 활발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 꿈은 경험보다 더욱 더 강력하다.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중에서

 

 

바슐라르는 어느 날 정원에서 둥지를 틀고 알을 품은 새를 발견한다. 알을 품고 있지만 않았다면 부리나케 도망갔겠지만, 품고 있는 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새는 인간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버틴다. 바슐라르는 그 새가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차마 도망칠 순 없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까지는 숨기지 못하는 새의 마음이 고스란히 바슐라르에게 전해진다. 그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새를 그렇게 떨게 했기 때문에 이제 나 자신이 떤다. 알을 품고 있는 그 새가, 내가 사람임을, 새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존재임을 알게 될까 봐 나는 두려운 것이다.” 그는 자신 때문에 떨고 있는 새의 몸짓을 바라보면서 온몸으로 새처럼 움직이고 새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추상적 개념만을 닥치는 대로 포식하며 살아 있는 이미지를 꿈꾸는 몽상에 대해서는 극심한 거식 증세를 보여 온 서양 철학의 역사를, 바슐라르는 비판한다. 바슐라르에게 몽상이란 깨어서 꿈꾸는 힘’, 즉 낮의 의식 상태에서도 밤의 무의식을 체험할 수 있는 역동적 행위를 뜻했다. 그에게 몽상은 결코 사유의 포기가 아니었다. 몽상은 사유의 부재가 아니라 사유를 준비하는 활동적 에너지가 될 수 있으며, 사유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마음의 토양이며, 투명한 의식으로 무의식을 관찰할 수 있는 영혼의 광학 렌즈였다. 바슐라르는 예술가의 상상력과 철학자의 사유를 연금술적으로 종합하는 힘을 자연에서 찾고자 했다.

 

 

 

 

바슐라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죄책감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향하여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성, 자연의 삶에 경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희망을 찾는다. 자연의 존재가 자신을 개시하는 순간, 그 순간의 황홀경적 조우. 이 순간을 통해 인간은 우주와 대화하고 스스로의 존재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는 절대적 순간을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자연을 자원으로밖에 계산하지 못하는 의식의 무능을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무의식의 통찰로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기중심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연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바슐라르는 우리의 언어 습관자체를 뒤집는 모험을 시도한다. 그는 괴테를 위대한 숨꾼이라고 격찬하면서 숨을 잘 쉬는 법을 알고 있는 작가 괴테가 뿜어내는 창조성의 원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숨 쉬듯, 저 멀리 숨을 내뿜으며 땅도 숨 쉰다. (……)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땅이 숨을 쉬듯이 괴테가 숨을 쉰다고 말해야 한다. 괴테는 땅이 충만한 대기(大氣)로 숨을 쉬듯이 폐를 힘껏 넓혀 숨 쉰다. 숨 쉬는 영광에 도달한 자는 우주적으로 숨 쉰다.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중에서

 

 

바슐라르는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이 땅처럼 숨 쉰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을 인간의 문법으로 길들이려는 언어적 습관을 의문에 부쳤다. 의인법은 인간중심적인 문법의 대표주자다. 의인법의 프리즘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인간 따라잡기인간 흉내 내기에 지내지 않는다. 새들은 사람처럼 도시를 배회하고(‘닭둘기로 전락한 도시의 비둘기들이여!), 애완동물들은 사람처럼 옷을 입고 사람처럼 미용실을 들락거리며 사람처럼 질병을 앓고 있다. 자연을 인간의 숨결에 맞게길들이려는 인간의 노력은 한때 성공적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들로 인해 인간 스스로가 몸살을 앓고 있다.

 

원령공주는 바로 문명을 이룩한 과학과 합리주의가 도달한 사유하는 이성과 문명에 다가갈수록 멀어져가는 야생의 상상력사이의 전투를 그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초반부에 등장하는 원령공주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늑대소녀에 가까워보인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린 전사의 가면은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향성을 나타낸다. 그녀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문명화된 인간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연 속으로 저물어가는 길을 택한다. 에미시족의 마을에 살고 있던 소년 아시타카는 철기 문명으로 무장한 타타라마을과 원령공주가 지키고 있는 시시신의 숲 사이를 매개하는 메신저다. ‘무의식의식의 경계 위에서, ‘몽상이 숨 쉴 여백의 공간이 사라진 황폐한 세계를 벗어나는 꿈들의 궤적. 그것이 원령공주의 세계가 아닐까.

 

 

온갖 상상으로 가득한 나이일 때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상상하는지 말할 줄 모른다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을 폐기 처분해야 한다,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만을 자랑하지 말고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중에서

 

 

 

 

 

3. 24시간 ‘ON AIR’의 세계에서 길을 잃다

 

 

나의 수줍은 램프를 격려하려고

광대한 밤이 그 모든 별들을 켠다

-타고르, 반딧불중에서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면, 전기가 어둠을 서양의 바깥으로 몰아낸 것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어. (……) 성서에는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고 묘사되었는데, 이와 반대로 여기에서는 빛이 어둠을 몰아내네. (……) 파괴된 도시들의 운명에 대한 근심으로 예언자들이 비탄에 잠겨 울부짖던 옛날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숲이나 사막,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원과 사원, 사유하기에 좋은 정적과 고독 등의 상실과 파괴를 슬퍼하고 있어. 도시-빛은 어두움 속으로 파고들고, 떠들썩한 소란으로 고요함을 깨뜨리고, 자연의 침묵에 문자를 들러붙게 하고, 생물을 멸종시키지.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절망의 아우성이 퍼지던 그 옛날의 적막한 공간을 박탈당했기 때문이야.

-미셸 세르, 이규현 옮김, 천사들의 전설, 그린비, 2008, 67~70.

 

 

전기는 인류의 오랜 공포였던 어둠을 몰아내면서, 동시에 어둠에 깃드는 몽상의 시간도 함께 추방해버렸다. 촛불은 빛을 생성하면서 어둠이 거처할 여백을 남겨두지만, 형광등은 빛을 생산하는 동시에 어둠을 말끔히 삭제해버린다. 어둠과 빛을 한 공간 안에 담아내는 촛불의 너른 품 안에서 인간은 밤의 무의식과 낮의 의식을 결합시키는 몽상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는 전등으로 인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빛의 시대가 열렸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기름으로 빛을 내는 저 살아있는 램프의 몽상을, 전등으로 인해 빼앗겨버렸다고. 전등 앞에서 우리는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는 기계적인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로맨틱 가이의 프로포즈 이벤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품, 그것은 바로 촛불이다. ‘저 남자를 사랑할까 말까하고 고민하는 여성에게, ‘흔들리는 촛불, 어둠과 빛을 모순 없이 공존케 하는 촛불의 널따란 품은, 계산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몽환적 감성을 일깨우는 멋진 뮤즈의 역할을 자임한다. 흔들리는 여인의 마음을 더욱 제대로 뒤흔들어 버리는 촛불의 미학을 활용할 줄 아는 남성들의 지혜. 그것은 사랑에 빠진 남성의 마음에 평등하게 내재한 본능적인 천재성(?)이 아닐까.

 

이 순간 촛불은 문명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메신저이며, 어둠의 몽상을 빛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유혹의 주체로 거듭난다. 촛불의 빛을 굳이 없애버리지 않고 가만히 남겨두는어둠 너머로, 우리는 몽상의 나래를 펼친다. 촛불 너머의 세계, 무지개 저편의 세상, 합리적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의 꿈을. 촛불은 의식이 불확실성이라 명명하는 어둠의 공간을 꿈과 이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원령공주에서 평화로운 에미시족의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재앙신몽상의 시간을 빼앗긴 자연의 은유처럼 보인다. 에미시족의 후계자인 아시타카는 성난 멧돼지의 모습을 한 재앙신을 설득하여 원래의 유순한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하지만 그의 분노를 가라앉힐 길이 없다. 결국 부족을 지키기 위해 아시타카는 목숨을 건 결투 끝에 재앙신을 쓰러뜨리지만, 자신도 오른 팔에 끔찍한 저주의 상처를 입고 죽어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결국 재앙신의 탄생 원인을 밝혀 자신에게로 옮겨온 저주를 풀기 위해 아시카타는 서쪽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여행 중에 지코라는 수도승을 만난 아시카타는 재앙신의 탄생이 시시신의 숲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시시신의 숲. 그곳에서는 모든 짐승이 태곳적 모습 그대로 거대한 몸을 지니고 있다더군.”

 

 

 

 

한편, 서쪽 끝 시시신의 숲 건너편 타타라 마을에 사는 에보시일행은 식량을 운반하던 도중 거대한 들개의 신 모로일행에게 습격을 당한다. 철로 된 각종 무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에보시 일행은 강력한 총포를 쏴 들개들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 양쪽 모두 커다란 타격을 입지만 왠지 들개에게 거대한 총포를 쏘아대는 인간의 모습은 자연을 압도하기보다 자연에 대한 공포에 질려 있는 듯하다. 들개들의 수장 모로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더 많이, 더 강력한 화약으로 들개들을 위협하게 만든다. “저놈이 모로야. 놈은 불사신이다! 이 정도론 안 죽어!”

 

 

 

 

마침 시시신이 살고 있다는 숲을 지나던 아시타카는 모로 일행에게 습격당한 에보시의 부하들을 구해낸다. 아시타카가 에보시의 부하들을 구해주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는 들개의 신 모로와 원령공주 ’. 모로의 곁에서 상처 입은 들개들을 치료해주는 원령공주의 모습을 처음 본 아시타카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인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에 매혹된다. 아직 자신이 원령공주의 적들의 편으로 의심받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로 가서 귀빈 대접을 받게 된다. 에보시의 여인네들에게 아시타카는 죽을 뻔한 남편들을 구해준 영웅이 된 것이다.

 

원령공주가 들개들과 함께 사는 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우리 안의 잃어버린 몽상, 밤의 저편으로 추방해버린 무의식의 세계와 조우하는 듯한 환상을 느낀다. 합리적 이성의 세계, 낮의 세계에 초대받지 못한 우리의 가여운 몽상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최근 도심 곳곳에서 일어나는 멧돼지 습격 사건은 더 이상 동화 속 은유로 멈추지 않는, 문명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우리 시대의 재앙신이 내뿜는 절규의 몸짓이 아닐까.

 

 

정신분석가는 지나치게 생각한다. 그는 충분히 꿈꾸지 않는다. 낮의 삶이 표면에 맡겨 놓은 찌꺼기들로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설명하려 하다가, 그는 우리 속에 있는 심연의 의미를 지워버린다. 우리의 지하실로 내려가는 걸 누가 도와줄 것인가? (……) 몽유병 환자는 내려간다. 언제나 태고의 숙소를 찾아 내려간다. (……) 그는 자기 속으로 내려가는가? 자기 저 너머로 가는가?

-가스통 바슐라르, 김현 옮김,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68.

 

 

 

 

 

4. 숲을 정복하려는 사람들과 지키는 늑대

 

 

반 고흐의 황색은 연금술적인 황금이며,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과 같이 만들어진 황금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밀이나 불꽃이나 밀짚의자의 황금빛이 아니다. 천재의 한없는 꿈에 의해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재산, 한 인간의 마음, 전 생애를 통한 응시(凝視) 속에서 발견된 근원적인 진실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꿈꿀 권리, 열화당, 1995, 72.

 

 

그저 단순한 노란색이 아니라 반드시 고흐빛 노랑이라 불러야 할 것만 같은 빛깔 앞에서 우리는 흐뭇이 미소를 흘린다. 단지 물감이 아니라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을 바른 듯한, 이 세상 하나뿐인 황금빛의 아우라 속에서 우리는 고흐의 눈이 되어, 고흐의 숨결을 느끼며 행복해한다. 바슐라르는 고흐만이 낼 수 있는 그 선연하고도 야생적인 황색이야말로 고흐의 한없는 꿈이 만들어낸,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라고 말했다. 고흐빛 노랑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전 생애를 꿰뚫는 응시 속에서 발견된, 예술가의 생애 그 자체라고.

 

 

 

 

원령공주가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고 들개의 딸이길 원했던 이유 또한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숲의 빛깔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단순한 초록색이 아니라 그 수많은 동물들과 숲의 정령들을 한 아름에 품어 안는, 그녀에겐 세상에 하나뿐인 원령빛 초록색을 말이다. 그녀는 인간에게는 한없이 적대적이지만 숲의 동식물 하나하나, 깜찍한 숲의 정령 하나하나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다. 그녀가 밤마다 들개 모로의 등허리를 타고 몰래 인간의 마을에 잠입하여 하는 일도 단지 나무를 심는 일을 위해서다. 그녀의 초록빛, 아니 숲의 모든 생물들을 위한 초록빛을 지키기 위해, ‘시시신의 숲을 인간의 자연개발을 위한 미끼로 던져주지 않기 위해,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숲의 전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원령공주가 들개들에게 혼을 빼앗긴 불쌍한 계집애라고 말한다. 그들이 시시신의 숲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원령공주도 정상적인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들은 숲을 정복하여 마음껏 자원으로 이용하고 숲의 개발을 가로막는 들개들을 몰살하여 풍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 협소해져버린 문명인의 상상력

 

 

한편 아시타카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재앙신이 바로 타타라 마을의 부족장 에보시의 총에 맞아 한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에보시가 가져온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여 그녀를 향한 절대적인 응원을 보낸다. 화승총을 비롯한 무기 제작 기술에 뛰어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불로 연마한 철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자연의 힘에 조화롭게 순응하던 인간이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 상징적인 이미지다. 불과 철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무기와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첨단의 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추앙하는 에보시의 총에 맞은 멧돼지신이 재앙신으로 변했다는 사실, 재앙신의 저주는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 때문임을 알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원령공주의 최대 적수도 바로 에보시다.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이끄는 부족장이자 걸출한 전략가로서 수많은 전쟁 경험도 갖고 있다. 에보시는 거리낌 없이 숲을 파괴하며 숲을 자원으로 이용하여 인간의 재화로 편입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에보시가 타타라 마을 부족 전체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까닭은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 나병에 걸린 사람들, 사회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까지 모두 거두어주었기 때문이다(어쩌면 에보시의 선택은 가장 값싼 노동을 얻기 위한 자본가의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병에 걸린 노인은 에보시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시타카에게 부디 그녀를 죽이지 말라고 애원한다. “자네의 분노와 슬픔은 잘 알겠네. 허나 저 분을 죽이진 말게. 우릴 인간 대접하는 유일한 분이라네. 우리의 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썩은 살을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셨지. 산다는 건 정말 힘들고 괴로워. 난 세상과 사람을 저주하지만 그래도 살고 싶어. 날 봐서라도 제발, 그분을 죽이지 말게.” 노인은 아시타카의 연민을 자극하지만 그의 에너지는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삶에 집착하는, 더 이상 새로운 삶을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기연민처럼 보인다.

 

에보시는 인간의 생존자연의 이용을 등가로 판단한다. 자연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다면 자신은, 그리고 자신이 속한 부족은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신들만 사라지면 괴물들도 보통 짐승이 되지. 숲에 인간의 빛이 들고 들개가 잠잠해지면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어. 원령공주도 인간이 될 수 있겠지. 시시신의 피는 병 치료에 유용해. 나병환자들도 고치고 자네 상처도 고칠 수 있을지 몰라.”

 

에보시는 카리스마 넘치는 CEO이자 용의주도한 정치가이자 주도면밀한 전쟁전문가의 원형으로 그려진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개발한 화승총은 그 시대 최고의 전쟁 무기였던 것이다. “이 총은 괴물이건 무사의 갑옷이건 모두 박살낸다.” 아시타카는 화승총의 위력에 놀라 타타라 마을 사람에게 말한다. “숲을 빼앗고, 산의 신들을 재앙신으로 만들고도 모자라 그 총으로 원한과 저주를 살 셈이오!” 아시타카는 아직 원령공주와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했지만 인간이길 포기해가면서까지 들개와 동거하며 짐승처럼 살아가는 그녀의 뼈아픈 고독을 이해한다. 원령공주에게 숲의 빛깔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정확히 등가인 것이다.

 

 

 

 

그녀는 자연을 그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연 속으로 저물어가기를 선택한 존재다. 만약 바슐라르가 원령공주를 보았다면 자신이 꿈꾸던 낙원을 가꿀 용맹스러운 전사의 이미지를 바로 여기서 찾았다며 감탄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자신의 행복과 숲의 행복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숲의 수호신인 시시신의 피를 질병 치료에 이용하려는 문명인의 상상력으로는 결코 원령공주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잃어버린 반 고흐의 황금빛을, 잃어버린 원령공주의 초록빛을, 마르크 샤갈의 잃어버린 낙원의 빛깔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샤갈의 그림은 대지와 인간이 반목하지 않았던 시대의 바로 그 원초적 낙원을, 대지의 목소리에 인간이 귀 기울일 줄 알았고 인간이 땅처럼 숨 쉬는 법을 알고 있었던 시대의,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만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낙원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낙원에 대한 모든 몽상가의 원초적 몽상에 있어서, 아름다운 색깔들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화해시킨다. (……) 생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생명은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초벌그림이란 결코 있을 수 없고, 언제나 불꽃뿐이다. 샤갈이 그리는 존재들은 모두 최초의 불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정경에 있어서, 샤갈은 발랄함의 화가인 것이다. 그의 낙원은 싫증나지 않는다. 새들의 비상과 더불어 무수한 눈뜸이 하늘에 울려 퍼진다. 대기 전체에 날개가 돋쳐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이가림 역, 꿈꿀 권리, 열화당, 22~23.

 

 

 

 

 

6. 몽상의 여유가 없는 이들

 

 

몽상이 우리의 휴식을 강조하러 올 때는 온 우주가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러 오는 것이다. 잘 꿈꾸려는 자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선 행복하세요. 그러면 몽상이 자기의 진정한 운명을 답파(踏破)한다. 그것은 시적 몽상이 된다. 그 시적 몽상을 통해, 그것 속에서 모든 것은 아름답게 된다. 몽상가가 손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몽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작품은 웅장할 것인데 왜냐하면 꿈속의 세계란 자동적으로 웅장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22.

 

 

에보시의 총탄에 맞은 들개 모로의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한밤중에 타타라 마을에 잠입한 원령공주. 에보시 일족은 모두 모여 원령공주와 들개들의 침입에 맞서고, 아시타카는 혼란에 빠진다. ()의 적()은 아군이란 말인가. 그는 에보시 일족에게는 정체를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원령공주에게는 에보시의 부상자들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간악한 인간의 무리로 취급받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가 서로의 가슴에 칼이나 총을 겨누지 않는 것이다. 아시타카 또한 자기 부족의 평화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그는 에보시에게도 원령공주에게도 아직은 마음의 거리를 둘 수 있는 위치다. 이 거리감이 그에게 상황을 이익의 관점 바깥에서통찰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러나 원령공주가 목숨을 걸고 타타라 마을에 침입하여 에보시의 목을 노리는 상황에서 이런 평화의 몽상은 통하지 않는다.

 

 

 

 

너도 원한을 갚으러 왔겠지만, 여기에도 들개한테 남편이 물려 죽고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있어.”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설득해보지만, 그녀는 아예 귀를 막아버린다. 총탄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에보시 일족과 들개 몇 마리와 어린 소녀뿐인 모로 일족의 혈투. 언뜻 봐도 이건 게임이 되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살리기 위해 계속 그녀를 설득하지만 소용이 없다. “원령공주, 숲으로 가! 헛되이 죽어선 안 돼. 물러서는 것도 용기라고! 돌아가!” 복수심에 불탄 원령공주는 온몸을 던져 에보시에게 돌진하여 결투를 벌이고 부족들은 에보시를 응원하며 언제라도 어린 소녀 한 명에게 무더기로 총탄을 퍼부을 기세다.

 

 

 

 

그러나 진화된 화승총으로 무장한 그들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단검 하나 손에 쥐었을 뿐인 원령공주는 무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에보시에게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령공주에게는 문명화된 인간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신비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완전한 들개도 완전한 인간도 아닌, 인간의 지혜와 들개의 속도를 겸비한 원령공주는 미묘한 반인반수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에보시와 원령공주의 싸움을 말리려는 아시타카의 팔뚝을 원령공주가 덥석 물어버리자, 헝겊으로 친친 동여맨 그의 팔뚝에서 재앙신의 저주가 그 끔찍한 위용을 드러낸다. 아시타카는 자신의 치명상을 가리키며 모두에게 말한다. “이것이 내 속의 원한과 증오의 모습입니다. 육신을 썩게 하고 죽음을 부르는 저주라고요. 더 이상 증오에 휩쓸리지 마세요.” 에보시는 들은 척도 안 하며 원령공주를 기어이 죽여 버릴 태세다. 용맹과 무예와 인격을 두루 갖춘 아시타카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에보시는 아시타카의 팔을 싹둑 잘라내려 한다. 저 흉측한 상처로 뒤덮인 저주받은 팔만 잘라내 버리면 아시타카의 건강한 육체는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근대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원령공주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아시타카는 에보시와 원령공주 모두를 잠시 기절시킨 후 원령공주를 데리고 숲으로 달아나려 한다. 이때 에보시 부족의 여성이 자신들을 배신한(?) 아시타카에게 화승총을 쏴버린다. 적을 도와줬으니 아시타카도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아시타카의 평화의 몽상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총에 맞은 아시타카는 선혈을 뚝뚝 흘리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원령공주를 들쳐 매고 타타라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러나 원령공주를 간신히 숲으로 옮겼을 땐 이미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원령공주는 죽어가는 아시타카에게 심문하듯 다그친다.

 

 

 

 

원령공주: 왜 날 방해한 거야? 죽기 전에 대답해!

아시타카: , 죽게 내버려두긴 싫었어…….

원령공주: (잔뜩 날선 표정으로 아시타카를 경계하며) 죽는 건 두렵지 않아! 인간만 쫓아낸다면 죽어도 상관없어!

아시타카: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목소리로) …… 살아야해…….

원령공주: 닥쳐! 인간 말은 안 들어!

아시타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의식을 점차 잃어가며) …… 아름다 워…….

원령공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아름답다는 표현에 화들짝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선다.)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원령공주에게 아시타카는 말한다. “넌 아름다워.” 원령공주는 너무 놀라 멈칫하며 물러선다. 그녀는 자신이 소년 앞에 얼굴 붉힐 줄 아는 소녀라는 것, 가면과 피 냄새에 가린 그녀의 얼굴이 누가 봐도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그녀는 문명의 시선으로 봤을 때 들개에게 혼을 빼앗긴 불쌍한(혹은 무서운) 소녀였을 뿐 누군가에게 관심과 애정의 눈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인간에 대한 증오가 그녀의 삶 전체를 장악하고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또 다른 삶을 생각할 몽상의 여유가 없는 셈이다.

 

그녀 또한 몽상의 시간이 없기로는 철두철미한 여전사 에보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시타카는 너는 아름답다고 말함으로써 그녀에게 이전에는 꿈꾸지도 못했던 사유의 여백을 선물한다. 자기를 위해서 목숨까지 건 소년이 있다는 것, 그런 그가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며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에, 원령공주는 아직 감동을 느낄 여유도 없다. 늘 인간을 향한 심리적 전쟁 상태에 놓여 있는 원령공주에게는 휴식과 몽상을 위한 마음의 여백이 없다.

 

 

심리학자들은 아주 특징적인 것에 매달리는 법이므로, 그들은 먼저 꿈, 놀라운 밤의 꿈을 연구하고, 몽상, 그들이 보기에는 구조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수수께끼도 없는, 모호한 꿈에 지나지 않는 몽상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몽상은 그때 대낮에는 기억되지 않는 약간의 밤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 무의식은 진짜 수면의 꿈속에서야 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은 명확한 사고와 밤의 꿈이라는 두 극점을 향해 일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인간 심리의 전 영역을 검토하게 된다.

그러나 낮의 삶과 밤의 삶이 섞이어 있는 황혼 상태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몽상이 있다. (......) 몽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정신적 현상이어서, 그것을 꿈에서 파생된 것으로 취급할 수 없으며, 다짜고짜 꿈의 현상 속에 위치시킬 수는 없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9~20.

 

 

 

 

 

7.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비행기의 발명은 곧 추락의 발명이다.

-폴 비릴리오, 미지수(Unknown Quantity), 2003, 24.

 

 

진보의 핵심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기차가 발명되어 교통 시스템이 일단 바뀌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나룻배의 낭만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기차로 정상적인 통행을 할 수 있을 때’, ‘여분의 쾌락을 찾아나서는 감정의 사치에 속한다. 기차의 속도에 일단 길들어지면, 처음에는 공포와 경탄의 대상이었던 기차도 어느새 당연한 습관이 된다. 기차보다 조금이라도 느린 운송수단은 어느새 퇴행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 움직이는 기술만이 끊임없이 발명된다. 아시타카는 문명 내부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문명의 무한 속도전에 제동을 거는 존재다. 아시타카의 존재는 이분법적으로 진보(문명)’야생(야만)’을 분류할 수만은 없는 모순적 상황을 암시한다.

 

 

 

 

아시타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원령공주 측은 물론 에보시 측도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에보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 받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선물한 것이다. 문제는 에보시(문명)의 힘이 너무 일방적이고 막강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대칭적 대립의 상황을 깨뜨리려면 그 상황에 균열을 내는 메신저가 필요하다. 아시타카가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위험천만한 메신저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양측 모두에게 첨예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보시 일족이 문명의 의식(합리주의)’를 상징한다면 원령공주와 모로 일족은 문명의 무의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무의식은 곧 자연그 자체다. 문명은 자연을 질료로 창안되었지만 스스로 자연에서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타자화했다. 이 타자화된 자아의 그림자가 바로 자연인 셈이다. 단지 문명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 단지 문명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는 아시타카는 몽상의 존재로서 문명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주는 메신저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에보시와 원령공주와 아시타카가 모두 공존한다. 문제는 에보시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원령공주와 아시타카, 즉 몽상과 환상의 세계를 가차 없이 배제해버려 이제는 그 흔적을 찾는 일조차 점점 어려워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슐라르는 밤의 무의식적인 환상과 낮의 의식적인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분석 전문가들조차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몽상을 사유의 중심에 올려놓는다. 상상력의 매트릭스는 바로 이 몽상의 에너지에서 탄생한다. 인간이 자신이 이룬 문명의 업적에 자만하지 않고(처음부터 자연이 없었다면 문명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 자주 망각한다), 대책 없이 웃자라버린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단지 인류의 시점으로 자연을 해부하고 재단하지 않는 태도는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몽상하는, 사유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몽상의 세계는 심리학자의 입장에서는 드라마틱함이 부족하고, 철학자나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논리성이 부족하다. 몽상은 길 잃은 의식이거나 결핍된 환상처럼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이야말로 인간의 사유가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새로운 진경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몽상은 깨어 있는 무의식이며 검열에서 자유로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산업시대에서 문명인으로 살면서, 우리는 물건들에 사로잡혀 있다. 물건 하나하나는 한 떼의 물건들의 대표자이다. 그런데 물건에 개체성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물건들의 머나먼 과거로 좀 가보자. 친숙한 물건 앞에서 우리의 몽상을 회복시켜 보자. 그리고는 조금 더 멀리,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물건이 제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나 알아보려 할 때 우리의 몽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만큼 그렇게 멀리 꿈꾸어보자. (……) 몽상은 대상을 성화(聖化)한다. 사랑받는 친숙한 대상에서 성스러운 개인적 대상에 이르는 사이는 백지 한 장이다. 곧 물건은 부적이 된다. 그것은 삶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해준다. (……) 정말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절제 없이 검열 없는 몽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지식에서부터가 아닌 것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46~47.

 

 

 

 

 

8. 자아의 그림자를 만나다

 

 

원령공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숲의 수호신 시시신은 아마도 바슐라르적 몽상의 힘이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극단일 것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하던 원령공주의 숲에 밤이 깃드는 시간. 시시신이 거대한 몸집을 지닌 푸르고 투명한 데다라신의 모습으로 변해 아름다운 숲을 거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몽상의 세포가 깨어나는 시간. 대지와 휴식의 몽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물속에서 치유의 밤을 맞이하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 가까이로, 시시신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그의 발자국 위에 아름다운 꽃과 식물이 피어난다. 시시신이 아시타카의 상처를 천천히 핥아주자 사경을 헤매던 아시타카는 거짓말처럼 상처를 딛고 일어난다.

 

 

 

 

어느새 마술처럼 돋아난 새살에 아시타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재앙신의 저주를 다시금 발견하고 절망한다. 시시신은 아시타카가 목숨을 걸고 원령공주를 구한 것은 인정하지만 부족을 지키기 위해 재앙신을 살해한 것은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아직 끝나지 않는 저주의 늪을, 깨어나자마자 인식해버린 아시타카. 그는 간신히 힘겨운 꿈에서 깨어나자 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듯 고통을 감추지 못한다.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아시타카에게 이번에는 원령공주가 먼저 다가온다. 원령공주는 자신의 입속에서 풀을 오물오물 씹어 아시타카의 입속에 넣어준다. 눈을 감은 아시타카는 할 수 없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도 밀려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한다.

 

 

 

 

다시 살아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살아남기 위해 작은 소녀의 입속을 빌어 음식을 삼켜야 한다는 사실이, 죽어도 삼키기 싫지만 삼켜야 하는 가혹한 운명처럼 곤혹스럽다. 아시타카를 살리기 위해 음식을 대신 씹어 입에 넣어주는 소녀의 모습에는 적대적인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따스한 치유의 모성이 살아 숨 쉰다. 아시타카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지겨워서, 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의 짐짝이 너무 무거워서, 그렇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낯선 사람에게 풀까지 씹어 먹이는 원령공주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원령공주와의 만남을 통해 아시타카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기에 미처 그 고통을 감지하지도 못했던, 무의식 속에서 등을 돌린 채 흐느끼는 또 다른 자아의 그림자와 만난 것이다.

 

 

자아는 원래 자기 방어를 하고 자기의 야망을 좇기 때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뭐든지 억압해야 한다. 이 억압된 요소가 그림자가 된다. (……) 그림자는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 먼저 자아의 어두운 측면이다. 평상시 이 부분은 깊숙이 잘 감춰져 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하기 전까지 자아는 이 존재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아 본위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내면 깊숙이 억압된 부분이다. 그것이 아무리 사악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이 부분은 근원적으로 자기(the Self)와 연결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혹은 자기the Self)은 자아보다 그림자를 선호하신다. 그림자는 아주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중심, 즉 진정한 우리 자신과 훨씬 가깝다.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64~65.

 

 

 

 

 

9.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Make thy love larger to enlarge my worth)!

-엘리자벳 브라우닝

 

몽상가의 몽상은 전 우주를 꿈꾸게 할 수 있다. 몽상가의 휴식은 물, 구름, 미풍을 쉬게 할 수 있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6~77.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그 자체로 충족되는 우리 속의 본성이다. 그것은 조용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깊은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의 존재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82~83.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간.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 위에서 서성이던 그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모든 일이 일어난 듯한, 치유와 몽상의 시간이었다. 아시타카를 치유한 세 가지 힘은 원령공주의 보살핌과 물의 치유력, 그리고 시시신의 치료(아시타카의 상처를 직접 핥아주던)였다. 아시타카는 자신을 이끌어오던 모든 존재의 중력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지는 휴식, 즉 여성적 휴식 속에서 부족을 잊고 운명을 잊고 저주를 잊는다. 걱정, 야심, 계획 등의 모든 아니무스(animus,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적 고통을 떠나서 고요, 휴식, 치유, 돌봄의 세계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연대기적 시간에서 도피함으로써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는 부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고민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우주적 몽상으로 한껏 비약한다. 그는 시계적 시간에서 벗어남으로써 통과의례의 가장 고통스러운 문턱을 통과하게 되고, 비로소 나 아닌 나와의 우주론적 만남을 시도한다. 원령공주의 세계는 아시타카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아니마(anima,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 억압된 아니마의 존재가 아닐까. 바슐라르는 몽상의 시학에서 우주적 몽상이란 인간이 자기 안에 잠자는 아니마와 만나는 극적 체험이라고 했다. 이 순간 가스통 바슐라르는 칼 구스타프 융과 만나 철학의 연금술을 시도한다.

 

 

 

 

몽상가에게 지독한 혜택을 주는 몽상 속의 상상세계는 자기 아니마를 위해 이루어진다. 아니마는 언제나 단순하고 조용하고 계속적인 삶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융은 나는 아니마를 단순히 삶의 원형이라고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지식을 찾지 아니하고 삶, 단순한 삶을 꿈꾸는 사람은 여성성으로 기운다. 아니마 주위로 집중하면서, 몽상은 몽상가가 휴식을 발견하는 것을 도와준다. 가장 좋은 우리의 몽상은, 남자건 여자건, 우리 저마다의 속에 있는 우리의 여성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게 여성성의 흔적을 갖고 있다. 우리 속에 여성적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쉴 수 있을까?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08.

 

 

파괴하고 정복하고 소유하여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에보시가 아니무스의 힘을 상징한다면, 고요한 치유와 조건 없는 보살핌, 휴식과 안정을 꿈꾸게 하는 시시신은 아니마의 힘을 상징한다. 아시타카를 간호하는 동안만은 전사의 가면을 벗고 타인의 고통에 몰두하는 원령공주의 모습 또한 아니마의 저력을 보여준다. 아니마는 결코 나약한 여성성이나 남성에게 결핍된 여성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여성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자발적 연마와 성숙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본원적인 여성성이다. 시시신의 존재 방식은 아니마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를 치료하기 위해 시시신이 나타나는 순간. 그곳에는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구획도 사라지는 듯 신비로운 아우라가 감돈다. 시시신의 발자국이 머무는 곳마다 이름 모를 꽃들과 싱그러운 풀들이 솟아오르고 한없이 평화로운 정적의 기운이 감돈다.

 

인류가 주인의 위치에 머무는 한, 인류의 1인칭 시점으로 우주가 관찰되는 한, 우리는 보호라는 미명하에 자연을 재단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 못하는 동물과 식물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원령공주는 동물들이나 식물들과 대화를 하는 데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언어 없이도 대화할 수 있는 원령공주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간극을 매개하는 몽상의 귀재, 샤먼의 모델인 셈이다.

 

 

 

 

 

10. 상생과 적대

 

 

한편 아시타카가 깨어나는 순간 거대한 멧돼지들의 무리가 원령공주와 모로를 방문한다. 에보시의 손아귀에 곧 파괴당할 위기에 놓인 시시신의 숲을 지키려고 왔다는 멧돼지들, 그 커다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옷코토누시. 원령공주의 엄마인 들개 모로. 모로는 낯선 인간 아시타카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옷코토누시에게 말한다. “시시신이 이 청년의 상처를 치료해줬어 그래서 안 죽이고 돌려보낸다.” 옷코토누시는 대경실색한다. “시시신이 인간을 구했다고? 인간은 살리면서 왜 나고신은 구해주지 않았나? 시시신은 숲의 수호신이지 않은가?”

 

 

 

 

재앙신이 되어 아시타카의 마을을 공격한 거대한 멧돼지가 바로 나고신이었던 것이다. 모로는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타이른다. “시시신은 생명을 구하기도 하지만 빼앗기도 하지. 나고신은 죽는 걸 두려워한 거다. 지금의 나처럼……. 내 몸에도 인간의 총알이 박혀있다. 나고신은 달아났지만, 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난 살만큼 살았다. 시시신은 내 목숨을 앗아갈 거다.” 삶뿐 아니라 죽음을 관장하는 일도 역시 생명의 신 시시신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삶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영역이기에. 모로는 인간이 쏜 총탄을 몸에 지닌 채 죽음을 껴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견뎌내면서, 시시신의 존재를 더욱 가슴 깊이 느끼는 법을 터득한 셈이다.

 

나고신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옷코토누시는 모로에게 분노하며 멧돼지부족의 몰락을 시시신과 모로의 탓으로 돌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순간, 아시타카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며 고통스럽게 고백한다. “나고신을 죽인 건 나야. 나고신이 마을을 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죽였지. 그는 커다란 멧돼지 신이었어. 이것이 증거야(그는 점점 무섭게 번져가는 팔뚝의 흉터를 보여준다). 시시신을 만나 저주를 풀려고 여기 왔어. 시시신은 에보시 부족이 입힌 총상은 치료해줬지만 나고신이 남긴 저주의 멍은 없애지 않았지. 나는 이제 이 저주의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죽어갈 거야.” 옷코토누시는 아시타카의 진솔한 고백에 분노를 잠재우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인간들에게 멧돼지 부족의 마지막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인간의 사냥감밖에 안 돼. 모두 함께 덤비면 인간들한테 전멸당할 거야. 우리 일족이 멸망한다 해도 인간에게 힘을 보여주고 말 테다.”

 

 

 

 

한편 에보시 부족이 제조해낸 엄청난 분량의 철을 탐내는 아사노 막부는 에보시로 하여금 철의 절반을 넘기라고 협박하고, ‘시시신의 목을 노리는 사냥꾼 무리들이 국왕의 명령이라는 명목으로 숲을 침범한다. 에보시는 숲을 파괴하며 제철소를 운영하여 시시신의 숲과도 적대하게 되고,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부를 축재함으로써 막부 세력과도 반목하게 된다. 에보시의 해법은 간단명료하다. 숲을 더욱 전면적으로 파괴하여 제철소의 자원을 확보하고 더 강한 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철을 만들면 숲은 점점 약해질 것이다. 그럼 인명피해도 줄일 수 있어.”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정복했듯이 시시신의 숲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숲을 적대적 자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땅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주적 몽상의 여백을 잃어버린 인간이다. 게다가 사냥꾼들은 시시신의 목을 잘라 오면 불로불사(不老不死)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국왕의 왕명을 받아, 시시신의 목을 베기 위해 숲속에서 잠복 중이다. 그들 또한 시시신의 목을 소유함으로써 숲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흡수시키려 하는 셈이다. 이렇듯 소유의 집념, 스톡(stock)욕망은 인간의 창조적 몽상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 아닐까. 이제 숲을 소유하려는 에보시와 시시신의 목을 요구하는 국왕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고 숲을 지키려는 멧돼지들과 모로 일족의 결사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변증법은 심층의 리듬에 따라 펼쳐진다. 그것은 덜 깊은 곳에서, 언제나 덜 깊은 곳(남성)에서, 언제나 깊은 곳, 언제나 더 깊은 곳(여성)으로 간다. 우리가 아주 풍요롭게 펼쳐진, 단순한 고요함 속에서 휴식하는 여성을 발견하는 것은 몽상, 앙리 보스꼬가 말하는, ‘숨어 있는 삶의 한없는 저장소 속에서이다. 날이 새면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내적 존재의 시계는 남성으로-남자건 여자건 모든 사람에게 남성으로-종을 친다. 그러면 사회적 활동의 시간,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활동의 시간이 되돌아온다. 감정적인 삶에서까지도, 남자나 여자는 저마다 자신의 이중의 힘을 이용할 줄 알고 있다. (……) 몽상가에게 조용한 고독을 되돌려주는 몽상 속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인간은 몽상의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언제나 내려가면서, 심층의 아니마 속에서 휴식을 발견한다. 추락이 없는 하강이다. 이 불확실한 심층에서는 여성적인 휴식이 지배한다. 이 여성적 휴식 속에서, 염려, 야심, 계획에서 떨어져, 우리는 구체적인 휴식, 우리의 전 존재를 쉬게 하는 휴식을 알아본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2~75.

 

 

 

 

 

11. 더 커다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두려움을 잊다

 

 

멈출 수 없는 총알이 관통할 수 없는 벽에 가닿을 때,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ego)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117.

 

 

아시타카에게 관통할 수 없는 벽은 바로 인간도 들개도 아닌 원령공주였다. 그러나 아시타카도 원령공주의 강철 방어벽 못지않은 힘으로 돌진하는, ‘멈출 수 없는 총알이었다. 아시타카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맞섬으로써 통과의례의 마지막 장벽을, 이제껏 그를 가로막고 있던 영혼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족의 멸망이었고 자신의 죽음이었지만, 이제 아시타카는 원령공주가 맞닥뜨린 더 커다란 두려움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조차 잊어버렸다. 이제 아시타카에게는 최후의 선택이 남았다.

 

 

 

 

높다란 절벽 위에서 장엄한 숲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고뇌에 잠겨 있는 아시타카에게, 모로는 말한다. “고통스럽나? 거기서 뛰어내리면 간단히 끝날 게야. 몸이 회복되면 네 몸의 상처도 함께 날뛸 테니까.” 아시타카는 이미 자신의 작은 상처따윈 잊은 말투로 말한다. “아름다운 숲이군요.” 이제야 몽상의 여유가 생긴 아시타카는 이 숲이 잃어버리기엔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전쟁터로 초토화해버리기엔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숨을 건 통과의례를 겪고 있는 아시타카는 자기 부족의 삶만 걱정해도 충분히 바쁜 삶을 살다가, 처음으로 타자의 삶, 다른 동물과 다른 숲과 다른 세계의 삶을 사유하게 된다.

 

자신의 몸에 총탄을 박은 에보시를, 숲을 초토화시킨 원흉인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모로에게 아시타카는 애원하듯이 말한다. “모로, ‘(원령공주)’을 놓아줘요. 그 애는 인간이잖아요.” 모로는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인간 소녀를 키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그 애는 우리 일족의 딸이다. 숲이 살면 도 살고 숲이 죽으면 도 같이 죽는 거다. ‘은 숲을 침범한 인간들이 내 이빨을 피하려고 내던진 갓난애였어. ‘은 인간도 들개도 될 수 없는 가엾고 사랑스런 내 딸이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소녀를 들개의 딸로 키워낸 모로의 모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원령공주에 대한 아시타카의 마음을 눈치 챈 모로는 시험하듯 아시타카에게 질문한다. “네가 을 구원해줄 테냐?” 아시타카는 말한다. “그건 모르겠지만 그녀와 함께 살아갈 순 있어요.” 그러나 모로는 아시타카의 팔뚝에서 점점 번져가는 선연한 상처를 보고도 원령을 맡길 순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넌 곧 상처로 죽게 될 테니. 날이 밝으면 바로 여길 떠나거라.”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는 아시타카는 숲을 떠나려 하지만, 거대한 멧돼지 군대와 에보시 일족의 혈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제 나의 목숨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의 영광과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지키려던 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운명을 함께견뎌내기 위해 아시타카는 목숨을 건다. “네가 을 구원해줄 테냐?”라는 모로의 질문은 아시타카의 새로운 미션으로 자리 잡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처리하러 떠난 여행에서 오히려 또 다른, 더 거대한 미션을 떠안게 된 아시타카.

 

 

 

 

 

12.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균형이 깨져버린 숲

 

 

한편 에보시의 군대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를 피워 올려 멧돼지를 숲 밖으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을 세운다. 모로는 멧돼지 부족의 최후를 예견한다. “옷코토누시는 다 알면서도 정면공격할 거야. 그게 멧돼지의 긍지라고. 마지막 한 마리까지 덤비고 쓰러지겠지.” 원령공주는 모로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글썽인다. “엄마, 난 떠나야겠어. 옷코토누시의 눈이 되어줄래. 그는 연기 때문에 제대로 달릴 수도 없을 테니.”

 

 

 

 

모로는 사랑하는 딸 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을 뒤로 하고 딸을 위로해준다. “난 괜찮다. 넌 저 젊은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도 있을 텐데…….” 원령공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인간은 싫어.” 이때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에게 보낸 목걸이가 다른 들개를 통해 전해지고, 그토록 아름다운 액세서리를 처음 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찬사를 뿜어낸다. “아시타카가 내게 이걸? 정말 예쁘다!” 목걸이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원령공주의 표정에서 들개가 아닌 인간 소녀의 달뜬 표정이 스쳐간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인간들은 총포와 화약 뒤에서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숨긴 채 멧돼지와 들개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모로와 원령공주를 비롯한 들개들과 멧돼지 군대는 목숨을 걸고 총력전을 각오한 채 적진으로 달려간다. 에보시는 그녀의 재산과 땅을 노리는 사무라이들에게, 그리고 시시신의 목을 노리는 국왕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짐승보다 숲보다 더 큰 적은 인간이라는 것을, 그녀와 비슷한재화를 노리는 경쟁자들이라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목표는 자연의 자원화이기에.

 

 

 

 

아시타카는 숲의 군대인간의 군대사이를 목숨을 걸고 오가면서 최대한 전투와 피해를 막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양측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하다. “역시 짐승과 한패로군!” “역시 인간들과 한패였어!” “저 녀석 도대체 어느 편이야?” 그는 이편도 저편도 아닌 존재로서 주어목적어가 아니라 전치사접속사처럼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고 관계를 맺게 해주는 존재다.

 

더 이상 사이의 존재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버린 아시타카는 원령공주와 들개를 도와 죽음을 불사하는 길을 택한다. 그것이 최선의 균형감각임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양편은 대등한 관계로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방적인 공격과 숲의 예정된 파멸로 치닫고 있기에. 한편 멧돼지들은 인간이 쏜 화약과 총탄으로 줄줄이 바베큐가 되어버리고, 크게 다친 옷코토누시와 원령공주는 시시신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동한다. 사냥꾼의 무리들은 시시신을 죽이기 위해 죽은 멧돼지 가죽을 덮어 쓰고 멧돼지 떼로 위장한 채 원령공주를 미행한다. 죽은 멧돼지의 가죽을 덮어 쓴 인간 사냥꾼들을 알아보지 못한 옷코토누시는 죽어버린 멧돼지들이 돌아온 줄로 착각하고 기뻐한다.

 

 

 

 

전사들! 돌아왔다! 황천 갔던 전사들이 돌아왔어! 나를 따르라! 시시신께 가자!” 분노에 치를 떨며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닌 옷코토누시를 말리는 원령공주. “진정하세요! 죽은 게 살아날 리 없어요. 멧돼지들의 가죽을 덮어쓰고 피를 바른 인간사냥꾼들이예요. 제발 멈춰요! 우릴 미끼로 시시신에게 접근하려는 거예요.” 함께 동행하던 들개는 원령공주를 말린다. “옷코토누시는 곧 죽어! 버리고 가자!” 원령공주는 고개를 젓는다. “안 돼! 내가 그를 버리면 그는 재앙신이 될 거야.” 그러나 그녀가 옷코토누시를 버리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재앙신이 되어 그녀의 몸까지 함께 재앙신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자신의 멧돼지 부족을 잃고 절망에 빠진 옷코토누시는 본래의 용맹스런 영혼을 잃고 나고신처럼 끔찍한 재앙신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이제 원령공주조차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숲이 지켜야 할 소중한 아니마 그 자체인 원령공주, 그녀의 죽음은 곧 숲의 죽음일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균형이 완전히 깨져버린 이 숲에는 과연 어떤 파국의 스펙터클이 기다리고 있을까.

 

 

현대의 모든 정신분석학 중에서, 칼 구스타프 융의 정신분석학은 가장 명확하게 인간의 심리상태는 그 원초적인 상태에서 쌍성(雙性)이라는 것을 입증해낸 바 있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억압된 의식이 아니며, 잊힌 추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의 본성이다. 무의식은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남녀양성(男女兩性)의 힘을 유지한다. 남녀양성에 대해 말하는 자는, 이중의 안테나를 가지고,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을 건드리고 있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0~71.

 

자연은 하나의 신전,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때때로 뭔지 모를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인간이 상징의 숲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상징의 숲은 친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보들레르, 조응중에서

 

 

 

13. 시시신을 죽이다

 

 

팽팽한 활의 떨리는 활시위여

달빛에 수런거리는 그대의 마음

예리하게 연마한 칼날의

그 아름다운 칼끝을 닮은 그대의 옆얼굴

슬픔과 분노에 숨어있는 진실한 마음을 아는 자는

숲의 정령 모노노케(원령)들뿐 모노노케들뿐……

-원령공주의 주제곡 중에서

 

 

재앙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저주의 촉수에 갇혀 함께 재앙신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한 원령공주. 에보시를 설득하고 원령공주를 구해내려는 아시타카. 아시타카의 충언에 아랑곳 않고 시시신을 기어코 살해하려는 에보시. 그리고 에보시의 군사들과 옷코토누시의 멧돼지들과 들개들. 이 모두가 벌이는 전쟁의 아수라로 숲은 짓밟히고 불탄다. “숲과 마을이 함께 살 수는 없나요?” 아시타카는 만나는 사람마다, 들개마다, 멧돼지마다 붙들고 이렇게 질문하지만 모두들 단호히 ‘No!’를 선언한다.

 

 

 

 

아시타카는 계속 넌 도대체 어느 편이냐라는 질문을 들으며,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의 해법은 이것이다. 너를 구원할 순 없지만 너와 함께살아가겠다는 것.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운명 앞에 섰을 때, 운명 앞에 거만 떨지 않는 인간의 우직한 정공법이다. 나에겐 너를 구할 엄청난 능력은 없지만, 너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책임을 묵묵히 짊어지겠다는.

 

인간들의 총탄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죽어가는 모로는 마지막으로 에보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힘을, ‘들개의 딸이었던 원령공주를 재앙신으로부터 구하는 데 쓰고 조용히 죽어간다. 모로가 참혹하게 죽어간 자리에서 아시타카가 원령공주를 구하는 동안, 에보시는 시시신을 찾아내 화승총을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다들 잘 봐! 신을 죽이는 건, 바로 이런 거야!” “쏘지 마요! 제발!” 아시타카와 원령공주는 필사적으로 에보시를 말리지만 에보시는 기어이 총을 쏘고 만다.

 

 

 

 

시시신의 목을 정조준하여 날려버리는 에보시. 그 순간 아름답고 풍성한 뿔로 무성하던, 시시신의 가녀린 목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순간, 투명한 비췻빛을 뿜어내는 시시신의 체액이 숲 전체를 적시기 시작한다. 시간이 멈춘 듯,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의 스토리가 멈춘 듯, 모두가 망연자실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때, 현상금을 타내기 위해 시시신의 목을 노리던 사냥꾼은 재빨리 시시신의 목을 전리품으로 챙겨 미리 준비한 나무 상자에 담아버린다.

 

 

 

 

시시신의 체액이 거대한 숲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와 땅 위를 적시는 듯한, 고통스러운 환각을 느낀다. 대지를 뒤덮은 시시신의 체액에 닿으면 모두 죽는다며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 사람들.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홍수에 숲의 모든 생물들은 살길을 찾아 숲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전쟁을 멈추고 시시신의 체액을 피해갈 궁리에 바쁘다. 시시신의 체액은 천천히 촉수를 뻗어 자신의 잃어버린 머리를 찾으려 한다. 그는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액체는 단지 시시신의 체액이나 혈액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참혹한 풍경은, 바로 시시신을 바라보는 우리의 몸 안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결코 세상 밖으로 빠져나와서는 안 될 무언가가 빠져나와 속절없이 흘러넘치는 듯한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

 

 

 

 

머리가 잘린 것은 시시신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 인간의 딸 원령공주를 키우고 시시신의 신변을 보호했던 들개들의 수장 모로. 이미 몸은 죽어 머리만 남은 들개 모로는 죽어서도 에보시를 향한 원한을 잊지 못해 그녀의 팔을 잘라 버린다. 그의 잘린 머리에 맞아 팔이 잘려버린 에보시는 그제야 광기에서 벗어나 수치심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엄청난 만행인지를 깨닫게 된다. 숲을 접수하려는 그녀의 야망은 곧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숲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던 모든 존재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한 에보시를 타타라 마을로 되돌려 보내려는 아시타카를 향해, 그녀 때문에 엄마 모로를 잃은 원령공주는 절규한다.

 

 


 

원령공주: 그 여자 내게 넘겨! 죽여 버릴 거야!

아시타카: 모로가 복수했어. 이젠 잊어…….

원령공주: 싫어! 너도 인간들과 한패야! 그 여자 데리고 썩 꺼져! (아시타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안으려 하자) 오지 마! 인간 따위 질색이야!

아시타카: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야…….

원령공주: 닥쳐! 난 들개야! 저리가!

아시타카: (원령공주를 포옹하며) 미안해……. 막으려고 최선은 다했어.

원령공주: (흐느끼는) 이젠 끝이야. 숲은 죽었어.

아시타카: 아직 안 끝났어. 우리가 살아 있잖아.

 

 

이때 시시신의 머리가 움직이며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없어진 머리를 찾는 몸과 없어진 몸을 찾는 머리의 꿈틀거림이 시작된다. “머리가 움직인다! 머리가 몸을 부른다!” “시시신이 머리를 찾으러 왔어요! 이 액체에 닿으면 죽어요! 물에 들어가면 피할 수 있어요!” 아시타카는 사람들을 신속히 대피시키고 시시신의 머리를 찾아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사냥꾼은 숲이 파괴되는 광경을 버젓이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현상금에만 눈이 멀어 시시신의 머리를 내놓지 않는다.

햇빛에 닿으면 저놈은 끝이야! 보라고! 이제 시시신은 죽기 직전에 발광하는 저주의 신일뿐이야! 해만 뜨면 놈은 끝장이지!” 그러나 시시신의 체액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한다. 원령공주와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잘린 머리를 소중히 감싸 안아 하늘높이 들어올리며, 시시신에게 기도한다. “시시신이시여! 이제 머리를 가져가시오! 부디 진정하시오!” 그 순간 시시신의 목은 몸과 합체되고, 제 머리를 찾은 몸은 거대한 육신을 대지에 뉘이며, 이제야 안식을 찾은 듯 천천히 스러져간다.

 

 

 

 

 

14. 기적적인 찰나의 순간, 수직적 시간

 

 

이윽고 시시신이 스러져간 대지 위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숲, 모든 것이 불타버린, 이제는 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대한 폐허 위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식물들이 피어오른다. 시시신을 해묵은 전설의 귀신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수군거린다. “시시신은 싹을 틔우는 신이었나 봐…….” “시시신은 꽃을 피어나게 하는 신이었나 봐…….” 모두가 이 숲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마법처럼 피어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한다. 자신을 겨냥하는 에보시의 화승총 위에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렸던 시시신의 넋은 그렇게 아름답게 부활했다. 그는 자신의 온몸을 대지에 공양하여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된 것이다. 사력을 다하여 마지막으로 이 아름다운 숲을 다시 되찾아준 시시신, 총탄에 맞아 머리를 잃고도 잔인한 인간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숲을 되돌려준 시시신의 가없는 사랑 앞에 사람들은 떳떳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원령공주: 아무리 숲이 살아나도, 이젠 더 이상 시시신의 숲이 아니야……. 시시신은 죽었어.

아시타카: 시시신은 죽지 않아……. 시시신은 생명 그 자체거든. 그는 삶과 죽음을 모두 갖고 있지. 내겐 삶을 돌려주셨어. (어느덧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저주의 흉터가 사라지고 분홍빛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원령공주: 난 널 좋아하지만. 인간은 용서 못해.

아시타카: 그래도 좋아. 너는 숲에서, 나는 타타라 마을에서. 우리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더 좋은 마을을 세우자.

 

 

자신의 종족인 에미시 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아시타카는 결국 부족에게 돌아가지 않고 이 낯선 공간에서 타인의 꿈을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자신에게 삶을 돌려준 시시신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단지 자기 부족의 안위를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숲을 함께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시타카. 그는 굳이 원령공주를 문명화시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녀 곁에서, ‘들개의 딸이라는 그녀의 정체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그녀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 그는 그렇게 그녀를 사랑하기로 한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자신의 미션을 스스로 선택하는, 들개와 인간 사이, 자연과 문명 사이의 그 위험천만한 길을 선택하는 아시타카. 나의 목숨, 나의 가족, 나의 땅, 나의 부족, 나의 삶……. 이 모든 나의소유격에 들러붙은 욕망의 가면을 벗어던졌을 때 아시타카에게는 진정한 몽상의 시간이 시작될 수 있었다.

 

 

 

 

시시신의 육체가 파열되는 순간. 우리는 시시신의 육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본질을 처음으로 대상으로서 마주하는 충격을 느낀다. 이 순간은 바슐라르가 말하는 수직적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시계적 시간, 자연과학적 의미의 양적 시간과는 달리 인간이 존재를 시적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는 몽상의 시간. 바슐라르의 수직적-우주적 시간은 이토록 둔감하고 무신경한 인간에게 우주의 비밀을 잠깐 엿볼 틈을 주는 기적적인 찰나의 순간이다. 이 수직적 시간은 한 인간이 우주로 향할 수 있는 비밀 통로이다.

 

인간들은 숲을 파괴하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며, 숲을 파괴함으로써 우주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 순간의 시적 이미지가 바로 이해되는 그 순간. 아무런 해설자도 필요 없이, 어떤 주석도 어떤 언어도 필요 없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모든 생의 비밀이 곧바로 온몸으로 이해되는 그 순간. 바슐라르는 그 순간을 시적 순간이자 형이상학적 순간이자 우주적 순간이라고 했다. 이토록 작은 인간이 저토록 커다란 우주와 직통으로 통화하는 시간, 운명이 우리의 머리가 아닌 을 관통하는 순간. 위대한 시인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시적 대상에 가장 어울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형용사를 마침내 찾았을 때의, 그 섬광 같은 환희의 순간.

 

 

몽상가는 슬프다는 것이 행복스러우며, 홀로 있고 기다린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 구석 속에서 그는, 열정의 정상에서는 으레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해 명상한다. (……) 그는 곧 세계는 명사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형용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259~264.

 

 

 

 

 

15. 몽상의 스트레칭, 이성의 근육 이완법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면,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 사람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에게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결국 그 사물에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벤야민, 보들레르에 대한 몇 가지 주석중에서

 

 

몽상의 세계는 의식에 발 딛고 무의식의 세계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환상을 체현하면서도 의식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창조 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화가가 자신의 몽상을 캔버스 위에 실현하는 순간, 그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로 흔들린다. 환상과 의식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몽상을 특유의 손재주로 이 세상에 불러낸다.

 

우리가 예술 작품에 감동하는 것은 예술가의 몽상이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에너지에 교감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도 이러한 예술가의 몽상을 닮아 있다. 원령공주가 숲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들개의 등허리 위에서, 들개의 눈높이와 들개의 숨결로 숲을 바라보며, 자음과 모음으로 날카롭게 분절되지 않는 숲의 웅얼거림을 듣고, 고요한 숲의 말없는 시선을 느낀다.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 또한 바슐라르처럼 자연의 언어로, 자연의 시점으로 움직이는 세계의 숨결을 생생히 느꼈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힘으로 지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오만이 아니라, 우리 부족, 우리 인류를 지키기 위해 지구라는 삶의 배경을 보존하려는 정착민의 욕망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더 커다란 그림, 우주라는 무한한 소실점을 향해 멀어지는 생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열망이었다.

 

로렌 아이슬리는 언젠가 인류가 사라진 도시에서도 새들이 고스란히 살아남아 그들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는 인간 중심의 1인칭이 아니라 생명의 다인칭(多人稱)’을 사유했다. 인류의 1인칭이 아니라 생명의 무인칭(無人稱), 신의 관점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인류의 부감샷이 아니라 핸드 헬드 카메라를 들고 뛰며 자연이 숨 쉬는 속도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미메시스(mimesis,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로서의 모방이나 재현)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았던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중심적 시점을 스스로 내려놓은 지금, 아시타카의 속내도 이렇지 않았을까.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동안, 아니 바라보지 않는 순간에도, 자연은 인간을 응시한다. 인간이 등산로에서 쓰레기를 몰래 버릴 때, 하천에 폐수를 방류할 때, 각종 벌레를 해충이라는 명목으로 짓밟아죽이고, 고속도로 위에서 야생동물을 로드킬로 만들 때……. 아무도 보지 않아도 가슴 한편이 서늘해 오는 그 감각, 자연이 인간을 말없이 응시하는 그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요 몇 년간 때때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최후의 인간이 산으로 도망을 친 후에 뉴욕을 접수하게 될 새들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장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만, 나의 거처가 줄곧 높은 곳이어서 나는 새들이 어떤 소리로 노래 부를지 알며, 또한 그들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주시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도 자기들 소리를 엿듣고 있지 않다고 여겨질 때, 참새들이 에어컨 바깥쪽을 톡톡 치는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이곤 했다. 또한 나는 다른 새들이 텔레비전 안테나를 통해 들어오는 진동을 어떻게 감지하는지 알고 있다.

그가 갔나?” 하고 그들이 물으면, 아래에서 아직 아니라는 진동이 올라오는 것이다.

-로렌 아이슬리, 김현구 역, 광대한 여행, , 2005, 248.

 

 

 

 

왜 우리는 지구의 석유 보유량으로 인간이몇 년이나 버틸 수 있는지, ‘우리나라가 몇 년이나 지나면 물 부족 국가가 되는지, 매일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가는 원시림과 빙산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온도와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지에만 관심이 있을까. 인간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자연에 무지하게 되었고, 자연에 무지해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점점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연은 소중하다는 인식도 자연에 대한 소유욕의 일종이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바라보는 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 번도 자연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연의 언어에 진정 귀 기울이고 싶다면, 바슐라르의 말처럼 지성과 상상력의 과감한 이혼을 선택해야 한다. 바슐라르의 철학을 몸으로 배우고 싶다면, 진정한 몽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지성의 경직된 근육부터 이완시켜야 할 것 같다. 합리적 이성과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 찌든 우리의 두뇌는, 감각의 모든 촉수를 해방시키는, 자유로운 두뇌의 스트레칭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것이 어렵다면 어린아이들이 혼자 노는모습을 10분만 관찰해도 좋다. 아이들은 주위의 모든 사물을 싱그러운 교감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반짝이는 형광등 불빛을 보고도 엄청 반가운 손님을 만난 듯 방싯방싯 미소를 짓고, 사소한 자극에도 호들갑을 떨며, 주변의 모든 자극을 그것이 아닌 그대로 대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사물 뒤에 내재된 힘, 마나(mana, 멜라네시아 일대의 원시 종교에서 생겨난 비인격적이며 초자연적인 힘, 영력, 주술력 따위의 관념)를 포착하는 비법을,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의 삶과 유관하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한때 그 비밀을 알았지만 잠시 깜빡했을 뿐인데…….

 

 

모든 대상들은,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상징적 의미를 끄집어낼 때, 강렬한 드라마의 기호들이 된다. 그것들은 감수성의 확장되는 거울들이 되는 것이다. 이 우주 속에서 우리가 그것들의 깊이를 모든 것에게 부여할 때,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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