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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고통과 번뇌의 근원인 무명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고통과 번뇌의 근원인 무명

건방진방랑자 2022. 3. 1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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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번뇌의 근원인 무명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싯달타가 연기를 추적한 방식으로 꼭 연기를 추적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싯달타라는 한 개인의 추리방식이요, 사물의 연결고리의 이해방식이다. 나는 왜 늙고 죽어 가는가? 그것은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정자와 나의 어머니의 난자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의 정자와 나의 어머니의 난자는 왜 결합하게 되었는가? 나의 아버지의 성기와 나의 어머니의 성기가 교합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의 성기와 나의 어머니의 성기는 왜 교합되었는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서로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왜 사랑을 하게 되었는가? …… 노사(老死) () 정ㆍ난자 랑데뷰 성기교합 결혼 사랑……

 

이러한 연기추론이 일인일과’(一因一果)라고 하는 시간상의 인과관계를 고수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선택된 추론일 수밖에 없다. 추론자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연기고리가 성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는 그리 자신의 연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싯달타의 연기론을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진리체계로서 이 이는 한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이 사실이 있다. 최소한 이러한 모든 연기고리의 종착역은 반드시 무명(無明, 팔리어 avijjā, 산스크리트어 avidyā)으로 귀결되지 않을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고통과 번뇌의 근원은 바로 이 무명(無明)이었다는 데 싯달타라는 대 사상가의 궁극적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무명이라는 한역술어는 초사(楚辭)에 그 용례가 있지만, 그것은 분명 ’(밝음)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앎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설정된 무지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윤리적 과제 상황은 무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인생이나 사물의 진상에 관하여 밝은 앎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 모든 인간의 고뇌상황의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후기불교의 발전은 이 12지연기설을 금과옥조로 삼다보니까 그 연기고리의 종착역인 무명에다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근본무명’(根本無明), ‘원품무명’(元品無明) 운운하면서 또 다시 무명 그 자체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어리석은 짓들을 일삼았다. 무명은 결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불피동의 사동자’(Unmoved Mover)가 아닌 것이다.

 

 

 평화롭게 세발 자전거를 몰로가는 신체부자유자 형제. 부처님 탄생지 네팔 룸비니로 가는 길.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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