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진리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논의는 ‘실체’ ‘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데카르트처럼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면 독립적인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와 ‘연장’, 혹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을 실체의 속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실체는 많은 속성을 가지는데, 그 중에 ‘연장’과 ‘사유’는 인간이 알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이라는 겁니다.
잠시 여기서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고 하는 점에 주목합시다. 스피노자가 ‘신’이라고 불렀던 실체는 기독교적 관념과는 달리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유와 연장을 모두 갖고 있는 물질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이란 영원하고 완전한, 그래서 오직 말씀으로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공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즉 연장을 가지고 있는 자연 그 자체인 것입니다.
실체는 이 속성들을 통해서 ‘표현’된다고 합니다. 아까 실체가 양태로 ‘표현된다’는 말은 실체가 양태로 ‘존재한다’는 말이었죠. 여기서 실체가 속성들로 표현된다는 말은 실체가 속성을 통해서 ‘인식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 두 가지 속성 모두 실체가 갖는 본질을 ‘표현’하기에 그것을 통해 우리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겁니다(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a probléme de l‘expression). 이렇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부닥쳤던 ‘일치’의 문제를 피해 갑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과 육체, 사유와 연장이 일치하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습니다.
▲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 그리고 에덴에서의 추방
이 그림은 헤르조그 폰 베리(Herzog von Berry)의 기도서 『아주 풍요로운 시대』(Les très riches heures)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인간은 신이 빚은 피조물이란다. 저기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인류의 조상이란다. 신은 인간뿐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뱀도, 사과나무도, 풀도, 대지와 하늘도, 고딕 스타일의 예배당도, 심지어 시간도 모두 만들었단다. 그렇다면 그 신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늘도, 대지도, 어떤 자연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 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에덴 동산에서 저렇게 아담과 이브를 꾸짖고 있는 저 신은 대체 에덴 동산 안에 있는 것일까, 밖에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그는 자연 안에 있는 것일까, 밖에 있는 것일까? 밖에 있다면, 그는 대체 어떻게 아담과 이브의 행동을 보고 꾸짖을 수 있었을까? 안에 있다면 그는 자연의 일부, 우주의 일부라는 말 아닌가? 어떻게 그는 자신이 만든 것 안에 있을 수 있었을까?
스피노자는 이런 난감한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한다. 신이 자신이 만든 것과 다르다면, 그는 거꾸로 자신이 만든 것에 의해 규정된다(‘자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만 자신을 규정한다는 실체(신)의 정의에 어긋난다. 따라서 신은 자연의 바깥에 있지 않다. 신이란 자연 안에서 자연의 무한한 생성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이고(능산적 자연), 각기 그때마다 만들어진 자연이다(소산적 자연).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반지름이 5인 원이 있다고 합시다. 이 원의 ‘실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선 “이 원의 면적은 25π다”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이 원의 둘레의 길이는 10π다”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둘 다 그 원의 가장 중요한 속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동일한 원의 본질을 다른 속성(면적/길이)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 두 명제는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속성(차원)의 것인만큼 동일할 수 없으며, 결코 동일해서도 안 됩니다. 같다면 두 개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같다면 그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속성이 될 리도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 두 명제는 동일하지 않은, 서로 다른 명제인 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또한 분명한 건 그 두 명제가 하나의 ‘동일한 원’ ― 이걸 실체라고 비유했지요 ― 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두 명제는 동일한 실체를 다른 측면, 다른 차원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는 면적이라는 속성에서, 또 하나는 길이라는 측면에서 원을 파악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양자는 분명히 서로 다른 명제이지만, 그것만큼이나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셈입니다. 즉 그 양자가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 것인 한 그 본질에서는 당연히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데카르트를 당혹케 한 곤란한 문제가 스피노자에게는 아예 발생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은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연장이라는 측면에서 본 개(현실적인 개)와 사유라는 측면에서 본 개(‘개’라는 개념)는, 아까 원의 면적과 길이에서 보았듯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개는 짖지만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자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양자는 근본에서는 서로 일치합니다. 개라는 동물에 결합되어 있는 질서와 ‘개’라는 개념에 요약되어 있는 질서는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즉 양자 모두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스피노자가 ‘진리’란 당연히 도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극히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인간의 얼굴, 몇 개의 기계들로 조립 구성물
롬왈드 하주메(Romuald Hazoumé)의 작품으로 왼쪽은 「제니럴 뒨 주르」(General D’um jour), 오른쪽은 「그리스인」(Le Grec)이다. 2000년 광주 비엔날레에시 본 것 기운데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쓰레기장을 뒤져 찾아낸 플라스틱 통과 모자, 다리미 등이 저렇게 멀쩡히 인간의 얼굴을 한 조각품이 되었다. 아프리카 조각을 닮은 더 훌륭한 작품도 있었는데, 도판을 구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 작가의 유머 감각도 탁월하지만, 작품을 구성한 발상은 더욱 놀랍다. 인간의 얼굴, 그것은 몇 개의 기계들로 조립된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휴미니스트들이 떠올리는 그 숭고한 얼굴이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미인들의 휴머니즘에 대한 아프리카인의 풍자일까? 아니면 쓰레기로 버려진 것들조가 인간과 다르지 않은 존귀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까?(사진 제공,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 도공(Dogon)족의 조각
굳이 삐딱하게 보는 것보단, 여기서 보이듯이 차라리 숲에 굴러다니는 나무조각으로 동물의 형상과 섞인 사람의 얼굴을 만드는 아프리카인의 전통을 떠올리는 게 더 좋을 듯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인간에게 시만 신의 형상을 보는 기독교적 휴머니즘과는 달리, 동물이나 나무토막, 버려진 쓰레기에서조차 존귀한 ‘신’의 형상을 보는 아프리카인의 사유를 보는 듯해서 기쁘다. 혹은 적어도 인간과 물소, 나무와 쓰레기에서 등가성을 보는 사유를 여기서 스피노자의 위대한 ‘자연주의’를 발견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것은 자연이란 인간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그러니 잘 보존하자는 식의 인간중심적 자연주의보다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기계, 생물과 무생물의 모든 대립을 넘어서 모든 것을 ‘신’의 일부(양태)라고 보는 태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