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한 것이란 애초에 없다
가치의 철학, 권력의지의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철학에 대해 새로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왜 그들은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자명한 것’이나 ‘확실한 것’ ‘절대이성’ 등은 모두 어불성설(contradictio in adjecto)입니다. 자명한 것’이란 말이 성립되는지, 그게 있는 건지가 문제되고 있는데, 따라서 자명한 것이란 말 이 결코 자명하지 않은데, 그 자명하지 않은 말로써 어떻게 자명한 것에 도달하겠냐는 겁니다. 즉 확실하지 않은 말로 확실한 것에 어떻게 도달하겠냐는 것이고, 절대적이지 않은 말로 이루어진 ‘절대이성’이 과연 절대적이겠냐는 겁니다. 마치 ‘사물 자체’에 대해 이미 말하고 있으면서, 사물 자체에 대해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 어불성설이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명한 것’을 찾아나선다면,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말한다면, ‘자명한 것’을 통해 무언가 하려는 바가 있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자명하고 확실하다는 주장을 통해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려 하거나(데카르트도, 칸트도 모두 그렇습니다), 당신 주장은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고 아무 소용도 없다고 거부하고 반박하려 하는 거겠죠. 혹은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어떤 사상도, 지식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가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 자신의 사상이야말로, 심지어 아직 자명한 데 이르지 못했다 해도,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이고, 이를 위해선 다른 어떤 방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확신을 주겠지요. 이런 걸 니체는 진리의지(진리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니체는 근대철학의 창시자와 재건자인 데카르트와 칸트를 명시적으로 비판합니다. 이를테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했는데, 이는 ‘문법의 환상’이라고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고 하려니 ‘생각한다’라는 말의 주어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생각한다’의 주어인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거기 깔려 있다는 겁니다. 이는 동사를 사용하려면 주어가 있어야 한다는 문법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명제는 결코 자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니체는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 무엇이란 당연히 권력의지겠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는 이제까지 정당성이 보증된 어떠한 철학자도 없다고 합니다. 자명한 확실성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은 애초에 의지가 작동하는 가치만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명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자체는 애시당초 잘못된 것이며 어불성설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되었던 나란 주체는 문법의 환상에 불과하며, 반대로 ‘내가 하는 생각’이란 권력의지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한편 니체는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힘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아’(Self)를 구성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근대철학의 자명한 출발점이었던 주체 개념에 대한 해체 작용을 합니다. 근대적인 주체 개념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으며, 또한 출발점이 아니라 권력의지가 구성해내는 결과물이란 것입니다.
▲ 하나의 물체와 세 개의 그림자
하프 스테너(Douglas R. Hofstadter)의 「괴델, 에셔, 바흐」(Gödel, Escher, Bach).
G, E, B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저 물체의 진정한 모습일까? 어느 것도 아니다. 또한 그렇기에 어느 것이나 진정한 모습이다. 어디 저 세 개의 상뿐일까? 비스듬히 빛을 비추어 얻은 다른 모든 상들이 저 물체의 모습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한 점에서 본 것이란 점에서 일면적이지만, 역시 일면적인 다른 모든 상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것이다. 이를 니체는 ‘투시주의’라고 불렀다. 니체는 어느 것도 특권적인 상이 아니란 점에서 대문자로 쓰는 진리(Truth)는 없으며, 동시에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들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는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 “진리는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점마다 잘 보이는 면이 다르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잘 보려고 하는 것을 찾아서 정말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투시주의는 진리는 오직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흔히 비난하듯이 ‘상대주의’와도 별 상관이 없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