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에 의한 복음
The Gospel Secording to Thomas
이 로기온 모음집 끝에 ‘프유앙겔리온 프카타 토마스(πευαγγελιον πκατα θωμας)’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기 때문에 이 로기온 모음집이 ‘도마복음서’라고 불리우게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마가복음(유앙겔리온 카타 마르콘) 이전에 ‘복음서’라는 문학장르가 존재했다고 간주되지는 않았다. 불트만만 해도 마가복음 이전에 또 다른 복음서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완벽하게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난드라마로서의 복음서, 즉 설화복음서(narrative gospel)는 아마도 마가복음이 최초의 사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존재했던 어록집을 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이 도마복음서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물론 이 제목이 사경자(寫經者)가 후대에 첨가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 제목이 원래 이 로기온자료집의 유기적 일부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전체가 유앙겔리온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치밀하게 편집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미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은 바울의 서한문에서 수없이 나타날 뿐 아니라 바울 이전부터 헬라인들이 사람이 직접 전하든 편지로 전하는 소식을 가져오는 것, 특히 승리의 소식이나 다른 기쁜 사건에 대한 소식을 가져오는 것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리고 유앙겔리온은 황제숭배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단어였다. 황제는 신적인 통지자로서 자연을 통제하고, 치료를 베풀며, 수호신으로 작용하고, 행운을 가져온다. 따라서 황제의 출생에는 우주적인 표적들이 수반된다. 따라서 황제의 메시지는 기쁜 것이다. 그의 출생에 대한 소식, 그 다음으로는 그가 나이가 들어가는 것, 그 다음으로는 그의 등극에 대한 소식이다. 제사들과 매년 행해지는 축제들은 그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롭고 희망적인 시대를 축하하는 것이다(킷텔, 『신약성서 신학사전』268). 황제의 유앙겔리온이나 기독교의 유앙겔리온이나 모두 근동지방에서 기원한 것이다. 황제의 많은 메시지들에 반하여 신약의 유앙겔리온은 예수님 한 분의 말씀을 전하며, 많은 황제들의 즉위에 반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하나의 선포를 언급한다. 따라서 이미 마가 이전에 어록복음서를 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래서 우리가 큐자료도 큐자료라 부르지 않고 ‘큐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가는 기존의 어록복음서의 타이틀로부터 자신의 패션드라마를 유앙겔리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신약 속의 용법에 있어서도 유앙겔리온은 본시 어떤 정형화된 문서의 이름으로 쓰인 적은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대한 기쁜 소식일 뿐이다. 신약 중에서 가장 빠른 문헌으로 간주되고 있는 데살로니카전서(AD 50년경 성립)에 이미 복음이라는 말을 단순한 메시지라는 함의를 벗어나 기독교인의 삶과 사명, 그 전 영역을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1:5; 2:2, 4, 8, 9; 3:2). 신약 속에서의 복음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를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은 관념이 아닌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선포하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복음이다.
그러나 도마의 복음은 같은 기쁜 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살아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의 해석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복음이며, 야훼를 향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회개)가 아니라 야훼를 버리는 메타노이아이다. 그것은 말씀 속의 아버지를 발견하는 것이며 하나님에로의 예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는 어디까지나 선포하는 예수이지, 선포되어지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나 구세주로서 인식하지 않는다. 도마의 유앙겔리온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출발이며 죽은 예수가 아닌 살아있는 예수가 우리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인류의 인문정신이 개화한 21세기에 다시 태어난 ‘기쁜 소식’인 것이다. 기나긴 분별의 장벽을 허물고, 동·서를 회통시키고, 융합시키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 바울이 개종의 계기가 된 계시를 얻은 곳은 다메섹(Damascus) 성으로 가기 전 그곳에서 17km 떨어진 들판이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그 시리아 지역전승에 의하면 사울은 말을 타고 있었고 눈이 멀어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아나니아가 안수한 집으로 인도되었다. 사울이 말에서 떨어진 바로 그 지점에 교회가 서있다. 바울비젼교회 혹은 바울낙마교회(Saint Paul Vision Patriarchal Abbey)라고 부른다. 그곳에 열두제자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왼쪽으로부터 두번째가 도마이다. 유교의 대성전과 비슷한 배치이다. 왼쪽부터 빌립, 도마, 안드레, 마가, 마태, 베드로, 예수, 바울, 요한, 누가, 야곱, 시몬, 바돌로매, 다마스쿠스(Damascus) 올드시티(Old City)에 있는 살라딘 성채 옆 길을 내가 걷고 있다. 아주 깨끗하고 품격이 높은 도시였다. 이 길 옆으로 헤르몬 산에서 발원하는 바라다 강(Barada River)이 흐른다. 도심을 흐르는데 물이 청정하고 그 옆으로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시리아의 바라다 맥주는 너무 맛이 없었다. 다마스쿠스 인근에 아직도 예수말 아람어를 쓰는 마을이 있다.
인용
'고전 >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마복음한글역주, 탐방 보고서 - 어렵고 버겁던 여행의 시작 (0) | 2023.03.16 |
---|---|
도마복음한글역주, 제33장 - 등불은 등경 위에 (0) | 2022.04.21 |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 도마복음 (0) | 2022.03.30 |
기독교성서의 이해 - 목차 (0) | 2022.03.04 |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18장 에필로그 - 시온성의 처녀 (0) | 2022.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