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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 (2) 시조와 이기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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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운전과 17세기 전주 재현 - 3. 전주에서 다시 만난 송경운과 이기발, (2) 시조와 이기발

건방진방랑자 2022. 7. 13.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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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조와 이기발

 

 

이기발은 전주 사람이다. 전주부의 서쪽 외곽지역인 황방산 기슭에서 나고 자란 그는 24세가 되던 1625년에 상경하여 그로부터 대략 10년간 서울에서 학업과 벼슬살이를 해나갔다. 그러다 병자호란(1636) 이후로는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접고 돌아와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에서 남은 생을 오롯이 보냈다. 몰락한 모습으로 고향의 북적이는 도성에 다가가는 중년 남성 이기발의 내면은 썩 유쾌하기 어려울 듯하며 그의 초라한 행색은 이런 마음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여기서는 처사의 삶을 선택한 뒤 황방산의 집과 전주 도성 사이를 오가는 이기발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는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귀유고2에 수록된 해당 작품의 제목은 저녁에 돌아오다[暮歸]이다: “朝傍東城行 아침에 동쪽 성곽 곁에 갔다가 / 暮向西山歸 저녁에 서산(황방산: 인용자) 향해 돌아오 네. / 東城多甲第 동쪽 성곽에는 큰 저택 많아 / 歌吹隨風飛 풍악소리 바람따라 날아오네. / 豪奢豈終極 호사스러움 어찌 끝이 있으리 / 酒盈兼魚肥 가득한 술에 살진 생선. / 西山最寂寞 서산은 가장 적막하여 / 孤店長林依 외로운 주막이 긴 숲에 의지해 있네. / 妻子恒飢色 처자식은 언제나 굶주린 기색 / 有年啼饉饑 몇 년을 배고파 울었지. / 如何捨都市 어째서 도시를 버리고 / 必須竆翠微 기필코 산중턱에 몸을 두냐고. / 性忄辟 異世人 별난 성격 세상 사람들과 달라 / 丘山甘采薇 산에서 고사리 캐길 달게 여기지. / 向來十數年 근래 십수 년 동안 / 紅塵未拂衣 붉은 티끌을 옷에서 떨지 못했네. / 孤踪竟何爲 외로운 자취 끝내 무엇을 하려는가 / 七尺身空頎 칠 척의 몸이 헛되이 헌걸차네. / 不可徒衣食 일 없이 입고 먹을 수 없는데 / 君民計已非 군민의 계책은 이미 글렀네. / 一朝卷而懷 일조에 경륜 거두어 간직하니 / 胡馬蹐郊圻 호마가 도성 밖을 걷누나. / 籊籊理竹竿쭉쭉 벋은 대나무 낚싯대 다듬어 / 重上舊苔磯 이끼 낀 옛 물가에 다시 올랐네. / 興亡與得失 흥망과 득실은 / 一夢同依俙 한바탕 꿈과 같이 희미하구나. / 涇渭未容混 경수와 위수는 섞일 수 없고 / 不曾嫌謗誹 일찍이 비방도 괘념치 않았네. / 愛敬致家伯 우리 형님께 사랑과 존경 다하고 / 溫凊勤庭闈 우리 어머니 부지런히 잘 모셔야지. / 此外復何望 이 밖에 또 무얼 바라랴 / 谷蘭生芳菲 골짜기의 난초에서 향내가 나네. / 暮歸豈不好 저녁에 돌아오니 이 얼마나 좋으냐 / 稺子候荊扉 어린 자식이 사립문에서 기다리니.” 이기발의 문집에는 이 시와 같은 자기서사적(自己敍事的) 술회시가 많은 편인데 이에 관해서는 별고를 준비 중이다.. 자신이 발 디딘 얼음 고개라는 지명 역시 그의 스산한 내면과 닿아 있다한편 전주 도성의 서쪽이라면 송경운의 전주 집이 있던 곳과 겹치는 공간이기도 하다. 더 구체적으로 이기발이 오르던 氷峙얼음고개는 전주 부서면(府西面) 빙고리(氷庫里)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인다. 지금의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에 해당하는 빙고리는 다가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과거 전주천에서 채 취한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가 있었던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 이기발이 오르는 얼음 고개에서 전주성 서문 및 그 근처 송경운의 집이 있었을 동네까지는 고작 1km일 뿐이다. 요컨대 그가 지나가는 이 지점은 송경운과 마주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대목은 그런 분위기를 갑작스레 전환하며, 뜻하지 않게 송경운과 마주친 일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경험이었는지 그려낸다.

 

 

그때는 봄이고 삼월 상순(上旬)이라 복사꽃과 자두꽃이 온 성안에 가득 피어 있었다. 저 멀리 어떤 장부(丈夫) 한 사람이 보였다. 대지팡이를 등에 지고 짤막한 베옷을 입은 그는 마음껏 노래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살쩍과 머리칼은 눈처럼 희었다.

時則春三月上旬, 桃李滿城中. 遙見一丈夫, 負竹杖着短褐, 放歌而徐行, 其鬢髮白如雪.(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이기발이 눈 들어본 전주 도성의 풍경은 온통 봄이다. 만발한 분홍 복사 꽃과 하얀 자두꽃 사이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허름한 입성과 상관없이 봄날과 잘 어울리는 그 노인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정결한 백발과 흐드러진 노랫소리 덕분이다.

 

 

그의 노래를 들어보니 이러했다.

江湖有期約, 十年奔走 강호에 기약 두고 십년을 분주하니

不知之白鷗, 謂我遲來 그 모르는 백구는 더디 온다 하건마는

聖恩最至重, 擬報而來 성은이 지중(至重)하시니 갚고 갈까 하노라.”

聽其歌曰: “江湖有期約, 十年奔走, 不知之白鷗, 謂我遲來. 聖恩最至重, 擬報而來.”(李起浡, 宋慶雲傳, 西歸遺稿 7)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전에 또렷하게 다가온 노래는 시조다. 강호에 대한 지향과 성은의 지중함에 따른 책임감을 함께 강조함으로써, 물러남과 나아감의 조화를 추구한 사대부의 보편적 정서를 드러낸 이 시조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구(鄭逑, 15431620)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김진영 외, 한국시조감상, 보고사, 2012. 174~175.. 강호에 돌아갈 기약을 두고도 사대부의 책무를 등지지 못해 10년을 분주했다고 노래 한 정구처럼, 이기발 역시 20대 중반부터 10년을 중앙 관료로 치열하게 살 았었다. 지금은 고향에 돌아와 포의(布衣)의 처사(處士)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대부로서의 강한 책임감을 잊지 못한 이기발에게, 이 노래는 바로 자신에게 건네는 목소리로 육박했다. 노인의 얼굴보다 그가 부르는 시조의 노랫말이 먼저 식별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이기발은 송경운전의 말미에서 세상에 가곡이 몹시 많은데 유독 강호곡(江湖曲)을 부른 것은 어째서일까? 생각건대 그의 늙은 눈으로도 멀리서 무심자를 알아보고 군신(君臣)의 의리를 잊지 말라고 넌지시 충고한 것이리라[世之歌曲最多, 特唱江湖曲何歟? 意者老眼能遠記無心子, 而諷之以不可忘君臣之義者歟!]”이 구절을 통해 이기발이 해당 시 조의 장르를 가곡으로, 그 제목을 강호곡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서술태도는 가창되는 국문시가에 대한 그의 식견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하여 원래 알던 이 노래를 귀담아 들었으며, 결국 이 시조가 강호로 돌아온 자신에게 사대부의 책무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다가왔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조는 한역(漢譯)의 형태로 제시되었다. ‘江湖’, ‘期約’, ‘十年’, ‘奔走’, ‘白鷗’, ‘聖恩’, ‘至重등 원래의 노랫말에 사용된 어휘를 가급 적 그대로 쓰고 있는 것에서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으며, 아울러 초장, 중장, 종장이 저마다 5자와 4자가 더해진 형식으로 규칙성을 추구한 것을 통해 번역자의 전문성을 엿볼 수 있다. 기실 이기발이 시조를 한역한 것이 이번 한 번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무신(武臣) 이덕일(李德一, 1561~1622)의 시조 우국가(憂國歌) 28장을 모두 한역하여 전하도록 한 공로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덕일의 문집 칠실유고(漆室遺稿)에 수록된 우국가에는 西歸居士李起渤이름이 李起渤로 표기되어 있으나 과 동의자이고 서귀거사라는 호가 일치하므로 동일인으로 간주한다. 이기발의 이름자가 李起渤로 표기된 예가 이외에도 간혹 있다.飜辭및 번역 취지를 표명한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이기발은 이덕일의 노래에 나타난 깊은 슬픔이 시대에 아파하는 굴원의 강직한 진심을 연상시키는바 곡조를 찾아 읽어가노라면 저도 모르게 감발되어 지극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고 했으며, 이에 초사체(楚辭體)를 본떠 구말(句末)를 붙여 한역했다고 그 글에서 밝혔다盖聞長歌之哀甚於慟哭, 歌闋之數多至二十有八則, 公之哀亦甚矣. 余觀其歌也, 鬱悒慷慨, 有屈太夫傷時耿介之忱, 尋其調閱其章, 不覺令人感發嗟惜之至耳. 于以效楚辭, 係之以些.”(이덕일, 칠실유고1 憂國歌二十八章) 이기발의 이 글은 學文을 후리티오 反武으로 시작되는 우국가1수 앞 제하(題下)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이래 국문시가가 다양한 방식으로 한역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특히 시조의 한역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시기 동안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보고되었다조해숙, 시조 한역의 사적 전개양상과 그 시조사적 의미, 한국시가연구15, 2004. 189~227.. 정구(1543~1620)가 지은 시조를 그보다 약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전문 악사가 17세기 중엽에 가창하며 향유한바, 그 광경을 목격하고 노래에 공감한 이기발(1602~1662)이 능숙하게 한역한 결과가 담긴 이 장면은 시조 한역이 보편화되는 시기를 조금 올려 잡을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또한 이 장면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다수의 시조를 접하고 한역한 작가로서 이기발을 학계에 알릴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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