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상적인 토지제도 정전법과 이상적인 교육제도
3a-3. 등나라의 문공은 정식으로 즉위한 후에 예를 두텁게 하여 맹자를 초빙하였기에 맹자는 등나라로 갔다. 등문공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관하여 물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성의 생업에 관한 일은【당대에는 농사(農事) 일 수밖에 없었다】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시급한 개혁이 필요합니다. 시(詩)【『시경』 빈풍(豳風) 「칠월」】에 농사일이 얼마나 긴박하게 돌아가는지를 말해주는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낮이면 들에 나가 띠풀을 베어오고, 밤이면 집에서 새끼를 꼬아, 빨리 지붕을 해 이어야, 내년에 비로소 다시 백곡을 파종할 수 있도다.’ 3a-3. 滕文公問爲國. 孟子曰: “民事不可緩也. 『詩』云: ‘晝爾于茅, 宵爾索綯; 亟其乘屋, 其始播百穀.’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법에는 일정한 경향성이 있습니다. 항산(恒産)이 있는 자는 항심(恒心)이 있으나, 항산이 없는 자는 항심 또한 없습니다. 항심이 없게 되면 방탕해지고 편벽해지고 사악해지고 사치스럽게 되어 못하는 짓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국민이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연후에나 비로소 죄질에 따라 형벌을 가한다면, 이것은 국민이 죄를 범하도록 기다렸다가 그물질하는 셈이니, 인(仁)을 구현해야만 하는 사람이 군주의 지위에 있으면서 자기 백성을 그물질한다는 것이 있을 법한 얘기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현군(賢君)은 반드시 공손하고 검약하여 거만하지 아니 하고 모든 아랫사람들을 예로 대하며, 인민에게서 세금을 취하는 것도 매우 절도 있는 제도에 따라해야합니다. 공자와 동시대의 노 나라 사상가인 양호(陽虎)【공문에서는 양호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나, 공자 의 평생 라이벌로서, 높은 교양을 가진 인물이었다. 맹자는 양호에 대한 편견이 없는 듯이 보인다. 양화(陽貨)는 동일인물】는 이렇게 말했지요: ‘부를 얻으려고 발버둥 치는 자는 인(仁)하지 못하고, 인(仁)을 실천하는 자는 부를 얻기 어렵다.’ 民之爲道也, 有恆産者有恆心, 無恆産者無恆心. 苟無恆心, 放辟邪侈, 無不爲已. 及陷乎罪, 然後從而刑之, 是罔民也. 焉有仁人在位, 罔民而可爲也? 是故賢君必恭儉禮下, 取於民有制. 陽虎曰: ‘爲富不仁矣, 爲仁不富矣.’ 이제, 하ㆍ은ㆍ주 삼대의 조세제도에 관하여 한번 알아보기로 합시다. 하나라의 경우는 한세대당 50묘(畝)【주나라에서는 1묘의 한 변이 100보(步) 정도, 우리나라에서는 1묘=30평. 역사적으로 일정치 않다】의 전지를 주고 공(貢)이라는 세법(稅法)을 행하였고, 은나라의 경우는 한 세대당 70묘를 주고 조(助)라는 세법을 행하였고, 주나라의 경우는 한 세대당 100묘를 주 고 철(徹)이라는 세법을 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3대의 세법은 공ㆍ조ㆍ철이라 하여 그 토지면적과 이름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실내용인즉슨 모두 동일하게 소출의 10분의 1을 조세로 거두어간 것입니다. ‘철(徹)’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철수(수거)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사전(私田)의 매년 그때그때의 수확고(收穫高)에 따라 유동적으로 세금을 거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조(助)’라는 것은 빌린다는 뜻이니 이것은 공전(公田)을 인민의 힘을 빌어 수확한다는 뜻입니다. 옛 현인 용자(龍子)【『상서대전(尙書大傳)』 「보형(甫刑)」편에 나오는 ‘자룡자(子龍子)’라는 사람과 동일인일 것이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토지를 다스리는 데는 공전을 수확해가는 조(助)의 세법이 가장 좋고, 공(貢)의 세법이 가장 나쁘다.’ 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其實皆什一也. 徹者, 徹也; 助者, 藉也. 龍子曰: ‘治地莫善於助, 莫不善於貢.’ 저는 이 말에 적극 찬동합니다. 공ㆍ조ㆍ철, 이 세 가지 세법 중에서 하나라의 세법인 공(貢)은 여러 해의 수확을 평균하여 고정적인 양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10분의 1 조세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10분의 1이라고는 하지만 인민에게 피해를 줄 때가 많습니다. 풍년에는 낟알이 낭자할 정도로 많이 쌓여 많이 징수해가도 가학(苛虐)하다 생각치 않을 텐데 오히려 적게 징수해가고, 흉년에는 그 밭에 비료를 주어 공을 들여도 한 가족 입에 풀칠할 것도 모자라는 판인데 반드시 세액 정량을 다 채워 징수해 갑니다. 일국의 군주는 백성의 부모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백성들이 악착같이 쉬지도 못하고 일년 내내 쐬빠지게 일해도 자기 부모조차 공양할 수가 없게 만들고, 게다가 나라가 구제책을 쓰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빌미로 더 많은 이자를 붙여서 갈취해가니 백성들의 삶은 점점 힘들어지고 급기야는 노인과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도랑과 계곡에서 뒹굴고 있으니 도대체 어디에 군주의 백성 부모됨이 있다 말할 것입니까? 貢者校數歲之中以爲常. 樂歲, 粒米狼戾, 多取之而不爲虐, 則寡取之; 凶年, 糞其田而不足, 則必取盈焉. 爲民父母, 使民盻盻然, 將終歲勤動, 不得以養其父母, 又稱貸而益之. 使老稚轉乎溝壑, 惡在其爲民父母也? 문왕의 정치적으로 꼽히는 것으로 관리들이 일정한 녹을 세습하는 세록(世祿)과 정전(井田)의 조법(助法)이 있습니다만, 등나라에서는 세록만을 행하고 있고 정전의 조법을 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詩)【『시경』 소아(小雅) 북산지십(北山之什) 「대전」】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공전에 비를 먼저 내려주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사전(私田)에도 미치게 하소서.’ 이 노래는 분명 주나라의 노래입니다. 앞서 주나라는 철(徹法)을 썼다고 했습니다만 이 노래 속에 공전(公田)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주나라도 정전제도의 조법(助法)이 병용되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주나라 역시 조법을 썼으므로 등나라에서도 정전의 조법의 유연한 제도를 활용하여 민중의 삶을 편안케 하는 것이 좋겠지요. 夫世祿, 滕固行之矣. 『詩』云: ‘雨我公田, 遂及我私.’惟助爲有公田. 由此觀之, 雖周亦助也. 다음으로 간요(肝要)한 것은 교육정책입니다. 상(庠)ㆍ서(序)ㆍ학교(學校)와 같은 서민교육을 위한 지방학교를 세워 인민대중을 가르쳐야 합니다. 상(庠)이라는 것은 교양을 기른다, 어른을 봉양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교(校)라는 것은 가르쳐 바로잡는다는 의미입니다. 서(序)라는 것은 활쏘기를 통해 서열을 매겨 인재를 발탁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라 때에는 교(校)라 말했고, 은나라 때는 서(序)라 말했고, 주나라 때에는 상(庠)이라 말했습니다. 교ㆍ서ㆍ상이 제각기 이름은 다릅니다만 배우는 곳이라는 의미에서는 하ㆍ은ㆍ주 삼대가 공통됩니다. 그 배우는 내용인즉슨 사람의 도리인 인륜을 밝히는 것입니다【‘학(學)’을 서민교육과 대비되는 귀족자제를 가르치는 국학(태학, 太學)으로 보는 주희의 견해를 취하지 않는다. 전체맥락이 어디까지나 서민대중교육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위에 있는 사람들이 교육의 힘에 의하여 인간의 바른 도리인 인륜을 밝혀 나가면, 아래에 있는 서민들이 서로 친밀감을 느끼게 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단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하를 통일하려는 왕자(王者)가 흥기한다 해도 반드시 등나라에 와서 이러한 사회질서의 법도를 배우려고 할 것이니, 등문공께서는 왕자의 사표가 되시는 것입니다【등나라는 왕도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沃案: 등나라 자체로써 천하통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왕자사(王者師)’ 말한 것은 등나라 같은 소국의 현실적 기능을 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設爲庠序學校以敎之: 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 有王者起, 必來取法, 是爲王者師也. 시(詩)【『시경』 대아 「문왕(文王)」】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날로 새롭도다.’ 이것은 문왕을 찬양한 노래이지만, 그대가 만약 내가 말한 도【주로 경제정책과 교육정책】를 힘써 실천한다면, 그대는 등나라의 국운을 일신(一新)케 하는 대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오.” 『詩』云: ‘周雖舊邦, 其命惟新,’文王之謂也. 子力行之, 亦以新子之國.” 등문공은 이 맹자의 말씀을 듣고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그의 총애하는 신하 필전(畢戰)을 다시 맹자에게 보내어 정전제도에 관해 상세히 묻도록 했다【沃案: 사실 여기서부터 독립된 하나의 장일 수도 있다)】. 使畢戰問井地.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대의 군주가 지금 인정(仁政)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욕에 차서, 그 많은 신하들 중에 특별히 자네를 선발하여 자네에게 소임을 맡겼으니, 그대는 반드시 힘써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대저 인정(仁政)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전지(田地) 바로잡는 경계(境界)를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경계가 바르지 아니 하면 정전(井田)의 균등 한 구획도 망가지고 관리들의 봉록도 공평하게 되지 아니 한다. 그러므로 폭군이나 탐관오리들은 반드시 전지의 균등한 구획을 망가뜨려 사리사욕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경계가 바로잡히면 인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하고 토지로부터 얻어지는 관리들의 봉록을 조절하는 것이 별 어려움이 없이 스스로 결정된다. 孟子曰: “子之君將行仁政, 選擇而使子, 子必勉之! 夫仁政, 必自經界始. 經界不正, 井地不鈞, 穀祿不平. 是故暴君汙吏必慢其經界. 經界旣正, 分田制祿可坐而定也. 등나라는 토지가 협소한 작은 나라이지만, 이 나라 안에는 다스리는 일만에 종사하는 지배계급의 군자(君子)도 있고 또 동시에 생업에 종사하는 피지배계급의 야인(野人)도 공존하고 있다. 군자가 없으면 야인을 다스릴 수 없고,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먹여살릴 수가 없다. 이러한 정황을 전제로 한 나의 제안은 이러하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너른 들은 900묘의 정전을 구획 짓기가 수월하다. 이것은 9등분하여 각 호가 100묘씩을 경작하고 가운데 공전(公田) 하나만 공동경작하여 조법(助法)으로 내면 된다. 조법은 담당관리가 있다. 그러나 성안의 좁은 들이나 수도에 근접한 땅 들은 정전(井田)의 구획이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한 가호당 100묘씩 분배하여 그 수확량의 10분의 1을 법으로 경작자들이 각자 스스로 내도록 하게 한다. 그리고 경(卿) 이하 대부ㆍ사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의 사람들에게는 세록(世祿) 이외로, 정전과 무관하게 특별구획된 땅을 제사비용으로 50묘를 지급하는데 이것을 규전(圭田)이라고 한다. 이 규전은 세금이 면제된다. 그리고 귀족자제로서 지위를 계승하지 못한 여부(餘夫)【우리나라로 치면 향반(鄕班) 비슷한 것】에게도 25묘짜리 규전을 지급한다. 이 규전도 세금이 면제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을 골고루 대접하는 것이며 서민들에게도 최소한의 세율을 적용하는 것이다. 夫滕壤地褊小, 將爲君子焉, 將爲野人焉. 無君子莫治野人, 無野人莫養君子. 請野九一而助, 國中什一使自賦. 卿以下必有圭田, 圭田五十畝. 餘夫二十五畝. 이렇게 되면 인민들이 등나라 땅에 대한 애착이 생겨서, 집안의 동량 같은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내거나, 이사를 가야하는 형편이 생겨도 자기의 본향을 떠나는 법이 없고, 향리의 땅은 모두 정전제도 속에서 8가호 공동체로서 묶여지며, 해가 떠서 밭에 나아갈 때, 해가 져서 귀가할 때 서로 친구가 되어 줄지어 출입하고, 도적을 방비하고 망보는 것도 상조체계를 갖추고, 질병에도 서로 돕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한 향의 전체백성들이 서로 한 몸이 되어 친목하게 되는 것이다. 死徙無出鄕, 鄕田同井. 出入相友, 守望相助, 疾病相扶持, 則百姓親睦. 정전제를 다시 한 번 정리하여 보자! 정전이라는 것은 일리사방(一里四方)을 우물 정 자로 구획 짓는 것이며 한정이 900묘가 되는데, 그 가운데 100묘가 공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8가호가 모두 사전(私田) 100묘씩을 경작하고, 가운데 공전은 공동경작하여 나라에 바치는 것이다. 공전(公田)의 농사를 우선으로 하고 그 후에 사전의 농사를 짓게 한다. 이것은 군자(君子)와 야인(野人) 사이에 최소한의 상하질서 감각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정전제도의 대략이다. 이러한 제도를 가감하여 현실에 맞게 윤택(潤澤)하게 적용하는 것은 곧 등문공과 신하인 그대의 책임에 속하는 것이다.” 方里而井, 井九百畝, 其中爲公田. 八家皆私百畝, 同養公田. 公事畢, 然後敢治私事, 所以別野人也. 此其大略也. 若夫潤澤之, 則在君與子矣.” |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정전제도가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모든 제도에 대한 역사학적인 탐구, 학자들의 갑론을박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맹자가 이런 발상을 한 그 근본에는 역사적 사례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지만 여기서 피력하는 맹자의 견해는 맹자가 재구성한 그의 현실 처방일 뿐이며, 그것이 역사적인 모범이 있었기 때문에 실행해야 한다는 복고적 주장을 일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맹자의 생각은 정전(井田)이라는 경직된 획일적 토지세제 운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원칙이며, 그 원칙의 현실적 적용에 있어서는 무한한 가변적 함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매우 자상하고 설득력 있게 피력하고 있다. 정전은 역사적 픽션이 아닌 현실국가경제, 즉 경세제민의 방법론이다. 그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즈음 말로 한다면 일종의 집단농장체제이며 상부상조의 복 지체계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토지의 균등분배와 사유를 허용한다 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도전(鄭道傳)이 꿈꾸었던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자작농의 유토피아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과도한 착취를 없앤다는 것이다. 공전의 경작이 9분의 1의 조세에 해당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9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자기 땅을 온전히 가지고 있고 여분의 노동력을 공전에 투입하면 되기 때문에 농민에 대한 징세는 실제로 최소한의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다. 여기에 깔린 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풍ㆍ흉에 따라 공전의 수확도 결정되므로 획일적 징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시중(時中)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10분의 1인 철(澈)이나 9분의 1인 조(助)나, 우리나라의 소작농이 50%를 뜯기는 현실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후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을 예로 든다면, 자작농의 경우 10%의 조세가 있었지만, 관리들이 수조권을 직접 행사하게 되어 있었고 그 수조권이 관리의 전직(轉職)과 무관하게 계속되었고 세습되었다. 그렇게 되면 한 땅에 수조권을 행사하는 지배계급이 7. 8인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면 농민은 1년 내내 농사짓고 수확물의 7ㆍ80%를 다 빼앗기는 처참한 상황이 된다. 정도전(鄭道傳)은 『맹자』를 읽고 토지공개념과 계민수전(計民授田)의 균산주의(均産主義)의 혁명적 발상을 하게 된다. 조준(趙浚, 1346~1405)은 수조권만을 없애자고 주장했으나 정도전은 모든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여 실제로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균분하여 모든 농민을 자영농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 정도전의 발상이 얼마나 극렬한 반대에 봉착했는지는 여기 그 시말을 상술할 것까지도 없다. 이 정도전의 발상은 김일성시대에 내려와서 북한에서 비로소 구현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이 선군정치를 내걸고 토지의 사적 소유와 다양한 인센티브제도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의 질곡에 빠져 또다시 국민을 기아로 휘몬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맹자의 정전(井田)의 구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약자보호의 사상이며, 평등주의적 분배의 사상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구상은 하부구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교육이라는 상부구조의 도덕질서에까지 평등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은 동시적 교육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항산도 교육되어야 하며, 항심도 교육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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