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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한글역주, 등문공장구 상 - 4. 다스리는 이와 다스려지는 이의 차이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등문공장구 상 - 4. 다스리는 이와 다스려지는 이의 차이

건방진방랑자 2022. 12. 1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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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다스리는 이와 다스려지는 이의 차이

 

 

3a-4. 젊고 패기 있고 공손한 등문공은 맹자의 정전법 등 인정(仁政)의 구상을 등나라 운영에 실행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단기간 내에 나라가 안정되고 인민의 삶이 풍요로워졌으며 도덕적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타국에서 등나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농사의 신인 신농(神農)의 가르침을 존숭하는 허행(許行)이라는 사상가가 있었다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수인(燧人)을 삼황(三皇)이라 한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은 맹자가 요ㆍ순을 업듯이, 고대의 설화상의 인물을 업었다. 허행은 맹자보다 더 높게 올라가 신농을 업은 것이다. 전국시대 전란이 계속되자 사람들이 농경을 게을리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농가는 이런 풍조를 경계하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애류(愛類)편에 보면 신농지교(神農之敎)’가 나오고 있는데, 신농 본인이 스스로 농사를 지었고 그의 부인도 스스로 길쌈을 했다고 적혀있다. 친경(親耕)ㆍ친적(親績)의 사상인데, 여기 허행의 주장과 일치한다. 허행(許行)맹자이외의 문헌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상고할 길이 없다. 혹자는 묵가학파의 거장 금활희(禽滑釐) 동일인물이라고 비정하지만 와 별 신빙성이 없다. 허행은 초나라에서 등나라로 왔다. 등문공이 살고있는 대궐의 문 앞에까지 와서 문공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저는 원방(遠方)으로부터 온 사람이올시다. 임금님께서 인정(仁政)을 행하신다는 것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나이다. 원컨대 밭 한 뙈기라도 얻어 당신의 백 성이 되고자 하나이다.”
3a-4. 有爲神農之言者許行, 自楚之滕, 踵門而告文公曰: “遠方之人聞君行仁政, 願受一廛而爲氓.”
 
문공은 그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었다. 그가 데려온 도당은 수십 명 이 되었는데, 모두 거친 갈포를 입었고, 볏짚으로 짚세기를 삼고, 멍석을 짜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文公與之處, 其徒數十人, 皆衣褐, 捆屨, 織席以爲食.
 
또 초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유도(儒道)를 흠모하여 노나라의 공문(孔門)에 와서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고 다시 초나라에 가서 일가(一家)를 이룬 진량(陳良)이라는 유자가 있었다. 그 진량의 제자인 진상(陳相)과 그의 동생 진신(陳辛)이 생기와 보습을 걸머메고 송나라에서 등나라로 왔다. 그리고 등문공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는 성인의 정치[聖人之治]을 행하신다고 들었사옵나이다. 성인의 정치를 행하시는 임금님이야 말로 성인이 아니시고 무엇이겠나이까? 원컨대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하나이다
陳良之徒陳相與其弟辛, 負耒耜而自宋之滕, : “聞君行聖人之政, 是亦聖人也, 願爲聖人氓.”
 
이렇게 해서 등나라에 온 진상(陳相)은 때마침 등나라에 먼저 정착한 허행(許行)을 만나자 너무도 기뻐, 그의 학설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의 정통유학의 배움을 다 내팽개쳐버리고 허행을 따라 다시 배웠다. 진상은 맹자를 만나자, 농가(農家)의 학설에 관하여 잔뜩 노가리를 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등문공은 참으로 현군(賢君)이시옵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등문공께서는 신농씨(神農氏)의 위대한 가르침을 아직 접하지 못했습니다. 등문공과 같은 현군이시라면 반드시 백성과 더불어 같이 밭을 갈아 생계를 만들며, 아침저녁으로 손수 밥을 지어 식사를 하시면서 또한 정치를 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등나라에는 곡식창고와 재화의 부고(府庫)가 따로 있습니다. 이것은 곧 백성을 착취하여 자기를 불리는 꼴이올시다. 이러 하니 어찌 현군이라 말할 수 있겠나이까?”
陳相見許行而大悅, 盡棄其學而學焉. 陳相見孟子, 道許行之言曰: “滕君, 則誠賢君也; 雖然, 未聞道也. 賢者與民並耕而食, 饔飱而治. 今也滕有倉廩府庫, 則是厲民而以自養也, 惡得賢?”
 
맹자는 진상의 구라에 기가 찼다. 그러나 태연하게 물었다: “너희 허 선생은 반드시 자기 자신이 파종한 쌀로써만 밥을 지어 먹느냐?” 진상은 말한다: “그렇소이다.”
孟子曰: “許子必種粟而後食乎?” : “.”
 
그렇다면 너희 허 선생은 반드시 자기가 짠 포목으로만 옷을 손 수 지어 입느냐?’
許子必織布而後衣乎?”
 
진상은 말한다: “아니올시다. 허 선생께서는 아주 소략한 아무 갈 포나 걸치시옵니다.”
: “. 許子衣褐.”
 
너희 허 선생은 관을 쓰느냐?” “. 관을 쓰시옵니다.” “무슨 관을 쓰느냐?” “아무 장식이 없는 흰 비단의 관입니다.” “그럼 그 흰 비단을 손수 짜느냐?” “아니올시다. 수확한 곡식을 내다가 흰 비단과 바꿔옵니다.”
許子冠乎?” : “.” : “奚冠?” : “冠素.” : “自織之與?” : “. 以粟易之.”
 
너희 허 선생은 왜 그 흰 비단을 손수 짜지 않느냐?” “그런 것까지 다 하려면 경작할 시간이 없습니다. 경작에 방해가 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 “許子奚爲不自織?” : “害於耕.”
 
좋다. 그런데 너희 허 선생은 가마솥이나 도기그릇에 밥을 지어 잡숫고, 호미나 쟁기 같은 철기구로 밭을 갈지 아니 하느뇨?” “그렇습니다.”
: “許子以釜甑爨, 以鐵耕乎?” : “.”
 
가마솥이나 도기그릇, 호미나 쟁기를 모두 손수 만드시는가?” “아닙니다. 곡식으로 바꾸어 오지요.”
自爲之與?” : “. 以粟易之.”
 
맹자께서는 곧이어 말씀하시었다: “곡식으로 농기구를 바꿔온다고 해서 대장간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또 대장간 사람들이 농기구를 곡식과 바꾼다고 하는 것이 어찌 농부를 괴롭히는 일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너희 허 선생은 왜 대장장이 일은 손수 하지 않느냐? 왜 자기 집에서 다 만들어서 쓰지 않고, 구차스럽게 온갖 공인(工人)들과 교역(交易)하는 수고를 하느냐? 너희 위대한 허 선생 정도라면 교역하는 일도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뇨?”
以粟易械器者, 不爲厲陶冶; 陶冶亦以其械器易粟者, 豈爲厲農夫哉? 且許子何不爲陶冶. 舍皆取諸其宮中而用之? 何爲紛紛然與百工交易? 何許子之不憚煩?”
 
백공의 일[百工之事]은 전문적인 일들이라서 농사지으면서 곁다리로 틈틈이 할 수 있는 성격의 일들이 아닙니다.”
: “百工之事, 固不可耕且爲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좋다! 너희들의 말대로라면, 어찌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대업만이 농사를 지으면서 곁다리로 틈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게냐? 이 세상은 어차피 기능에 따른 분업이 없을 수 없다. 이 세상에는 대인(大人)다스리는 위를 가진 자의 일이 있는가 하면, 소인(小人)생업에 종사하는 자의 일이 같이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한 인간의 삶을 가지고 말해 보아도, 그 몸을 유지하는 데 쓰여지는 것은 백공(百工)이 만드는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든 인간이 스스로 다 만들어 써야만 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천하사람들을 모두 길거리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게 하여, 피폐하게 만드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然則治天下獨可耕且爲與? 有大人之事, 有小人之事. 且一人之身, 而百工之所爲備. 如必自爲而後用之, 是率天下而路也.
 
그래서 말하는 명언이 있다: 노심(勞心, 정신노동)이 있으면 노력(勞力, 육체노동) 또한 있게 마련이다. 노심자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고, 노력자는 사람에게 다스려짐으로써 삶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기에 사람에게 다스려지는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여 사람을 먹여살리고, 사람을 다스리는 자들은 사람에게 먹여진다생계수단을 제공받는다. 이것은 천하의 통의(通義)보편적 질서원칙이다.
故曰: ‘或勞心, 或勞力; 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治於人者食人, 治人者食於人: 天下之通義也.’
 
요임금의 시대를 이상향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천하가 아직 평온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미개한 시대였다. 끄떡하면 홍수가 사람 사는 곳으로 횡류(橫流)하여 천하가 다 범람하기 일쑤였고, 초목이 너무 많이 자라 사람 살기가 힘들 정도로 무성하여, 무서운 맹금ㆍ맹수가 번식하였고, 오히려 가장 중요한 생계의 수단인 오곡(五穀)은 잘 여물지 않는데 금수는 인간의 삶을 핍박하고 위해를 가하였다. 맹수의 발굽과 맹금의 발자국이 왕이 사는 도읍지 한가운데를 휘덮고 있었다.
當堯之時, 天下猶未平, 洪水橫流, 氾濫於天下. 草木暢茂, 禽獸繁殖, 五穀不登, 禽獸偪人. 獸蹄鳥跡之道, 交於中國.
 
요임금은 홀로 이런 지경을 근심하여[獨憂之], 순과 같은 특출난 인재를 발탁하여 이러한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스리게 명하였던 것이 다. 순은 자신의 명철한 신하인 익()【「만장6. ()와 쌍벽을 이루는 순임금의 신하으로 하여금 불을 활용하도록 하였다. 이 난국을 타개하는 데 불처럼 효율적인 것이 없었다. 이에 익()은 산과 늪지의 초목에 불을 지펴 확 태워버리니, 금수가 도망가 숨어버려 문명의 세계가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堯獨憂之, 擧舜而敷治焉. 舜使益掌火, 益烈山澤而焚之, 禽獸逃匿.
 
다음에는 물을 관리하는 난제가 있었다. 이에 순은 또 하나의 명신하인 우()로 하여금 황하의 지류 아홉 갈래를 소통시켜 수위를 조절케 하였다. 제수(濟水)하남성 제원현(濟源縣) (西) 왕옥산(王屋山)에서 발원하여 그 고도(故道)는 원래 황하를 지나 남하하여 산동성으로 동류하여 황하와 더 불어 같이 평행하여 바다로 들어 갔던 강이다. 지금은 하류가 황하에 의해 점령당했고 그 발원처만 남아있다와 탑수(漯水)옛날에 탑수는 산동성 조성현(朝城縣) 경계에서 발 원했던 강인데 송대에 황하를 상호(商胡)에서 결구(決口) 시키면서 조성의 흐름은 절류(絶流) 되었다를 준설하여 그 물이 황해로 흘러들어가게 만들고, 여수(汝水)와 한수(漢水)의 물길을 터서 잘 흐르게 하였고,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를 준설하고 제방을 쌓아 그 물이 양자강으로 흘러들어 가도록 만들었다. 이런 대치수사업이 완성된 연후에나 홍수의 위험이 사라지고 오곡이 잘 영글어 중원의 땅이 문명생활이 안정되고 사람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치수사업이 한창일 때 우는 8년 동안이나 정강이에 털이 날 틈도 없이 밖을 쏘아다녔다.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 문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가게 되었는데 한 번도 집안으로 들어가질 않았다. 이렇게 인민을 위하여 큰 정치를 행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개인적으로는 밭 갈면서 살고 싶다고 간원한들, 과연 너희 선생 처럼 밭 갈고 살 수가 있겠느냐?
禹疏九河, 瀹濟漯, 而注諸海; 決汝漢, 排淮泗, 而注之江, 然後中國可得而食也. 當是時也, 禹八年於外, 三過其門而不入, 雖欲耕, 得乎?
 
순의 또 하나의 신하 후직(后稷)이름을 기()라고 하는데 주()나라의 시조로 꼽 힌다. 요임금 시대의 농사(農師)였다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오곡(五穀)을 심어 잘 자라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오곡이 잘 영글었고 싶어 인민들은 배고플 걱정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났다.
后稷敎民稼穡. 樹藝五穀, 五穀熟而民人育.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경향성이 있다. 배부르고 옷을 따스하게 입고, 편하게 살기만 하고 사람됨의 도덕교육을 받지 못하면 곧 금수(禽獸)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께서도 더 한층 이런 면을 걱정하셔서, ()순의 명신하, 은나라의 시조을 명하여 사도(司徒)의 관()인민 교육을 담당하는 관으로 삼으셔서 사람이 사람된 도리(인륜人倫)를 가르치도록 하시었다. 부자는 친근감이 있게 되었고, 군신은 정의감이 있게 되었고, 부부는 구별감이 있게 되었고, 장유는 질서감이 있게 되었고, 붕우는 신뢰감이 있게 되었다. 방훈(放勳)요임금의 칭호은 말씀하시었다: ‘우리 인민들을 잘 독려하자! 그들을 광정케 하여 곧게 만들고, 보익하여 충분한 도움을 주고, 그리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자! 그런 연후에나 곤궁한 자들을 진휼하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성인이 인민을 우려함이 이토록 간곡하고 깊은 뜻이 있었으니, 언제 틈나는 대로 한가히 밭을 갈고 있을까보냐?
人之有道也, 飽食, 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聖人有憂之, 使契爲司徒, 敎以人倫: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放勳曰: ‘勞之來之, 匡之直之, 輔之翼之, 使自得之, 又從而振德之.’聖人之憂民如此, 而暇耕乎?
 
요임금께서는 순()과 같은 위대한 신하를 얻지 못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게 되는 것만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으셨고, 순임금께서는 우()나 고요(皐陶)순임금 시절의 사법장관와 같은 위대한 신하를 얻지 못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게 되는 것만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농부라는 것은 겨우 백묘의 땅이 잘 다스려지지 않을 것 만을 자기 근심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堯以不得舜爲己憂, 舜以不得禹皐陶爲己憂. 夫以百畝之不易爲己憂者, 農夫也.
 
정치는 이와는 다르다. 사람들에게 재화를 골고루 분배하는 것을 혜()라 말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이 선행인지를 가르치는 것을 충()이라 일컫고, 천하를 위하여 인재를 얻는 것을 인()이라 일컫는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앞의 혜()와 충()은 오히려 쉬울 수도 있는 것이나 인()은 진실로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 인민들에게 베푼다는 것천하를 선양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취하지 않는다은 오히려 쉬울 수 있으나, 천하를 위하여 인재를 얻는다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것이다.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 크시도다! 요의 임금되심이여! 하느님만이 그토록 크시거늘, 요임금만 이 그 하느님의 크심을 본받았다. 그 성덕이 너무 탕탕하여 백성들이 무어라 형용할 말을 찾지 못한다! ~ 위대하도다! 순의 임금되심이여! 그 덕성은 드높고도 또 드높도다. 천하를 지배하시면서도 천하를 소유함이 없이 위대한 신하들에게 맡길 줄 알았다.’논어(論語)8-18, 8-19에 비슷한 말이 있다. 요임금ㆍ순임금께서 천하를 다스리심에 어찌하여 그 우려하심이 없었을까보냐? 천하를 우려하시는 분이 어찌 단지 손수 밭 가는 데만 마음을 쓰실 수 있단 말인가!
分人以財謂之惠, 敎人以善謂之忠, 爲天下得人者謂之仁. 是故以天下與人易, 爲天下得人難. 孔子曰: ‘大哉堯之爲君! 惟天爲大, 惟堯則之, 蕩蕩乎民無能名焉! 君哉舜也! 巍巍乎有天下而不與焉!’ 堯舜之治天下, 豈無所用其心哉? 亦不用於耕耳.
 
나는 문명을 가지고 야만을 개변시킨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야만 을 가지고 문명을 개변시킨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당시 관념으 로는 추ㆍ노ㆍ등ㆍ제 지역은 문명이었고, 초는 야만이었다. 그대의 선생, 진량(陳良)은 남만(南蠻)의 땅인 초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주공(周公)과 중니(仲尼)의 도를 흠모하여 북으로 와서 천하의 중앙인 추로지역에 와서 제대로 배웠다여기 북학(北學)’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나라 조선 후기의 북학파라는 말이 유래됨. 북방(北方)의 학자들도 그를 뛰어넘는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대의 선생은 이른바 호걸지사(豪傑之士)였던 것이다. 자네 형제 둘이서 이 선생님께 배운 지가 수십 년, 이제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고 그를 배반하여 허행에게 따라붙다니!
吾聞用夏變夷者, 未聞變於夷者也. 陳良, 楚産也. 悅周公, 仲尼之道, 北學於中國. 北方之學者, 未能或之先也. 彼所謂豪傑之士也. 子之兄弟事之數十年, 師死而遂倍之.
 
예전에 공자께서 세상을 뜨시자, 문인들은 모두 당시로서는 예외적 이었던 삼년상을 하였다. 삼년상이 끝나자 각자 자기 물건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대선배인 자공의 방으로 들어가 절을 했는데, 서로를 향해 슬픔이 북받쳐 통곡을 하였다. 울다울다 목이 다 쉰 후에야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자공은 쓸쓸하게 혼자 남게 되었지만, 다시 묘지로 돌아가 그곳에 움막을 틀고, 홀로 거하기를 삼년을 더하였다. 결국 6년의 상을 치른 후에나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공자를 사모하는 정이 이토록 지극했던 것이다. 이후에 자하(子夏)ㆍ자장(子張)ㆍ자유(子游) 등 외면적 사유가 짙은 이들은 스승 공자를 사모한 나머지, 같은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용모나 말소리가 선사(先師)와 아주 비슷한 유약(有若)을 공자 모시듯이 모시고자 하여, 강력히 증자에게 동의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증자는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말하였다: ‘안될 말이요! 우리 선생의 고귀한 인품, 양자강과 한수(漢水)의 물을 다 흘려 빨아, 청명한 가을의 폭양으로 말려도 더 이 상 깨끗할 수 없는 하이얗고도 또 하이얀, 그 위에 더할 수 없는 그 인품에 누가 감히 비교될 수 있단 말이요!’
昔者孔子沒, 三年之外, 門人治任將歸, 入揖於子貢, 相嚮而哭, 皆失聲, 然後歸. 子貢反, 築室於場, 獨居三年, 然後歸. 他日, 子夏, 子張, 子游以有若似聖人, 欲以所事孔子事之, 彊曾子. 曾子曰: ‘不可. 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
 
지금 남만(南蠻)의 떼까치처럼 꽥꽥대는 허행이라는 자가 선왕지도(先王之道)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대가 그대의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허행에게 따라붙는다는 것은 진실로 증자의 충성스러운 마음과는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미물인 새들도 어둡고 음습한 유곡을 벗어나 저 우뚝 솟은 교목의 우듬지에 둥지를 튼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어도, 높은 언덕 교목의 우듬지 둥지를 벗어나 어둡고 음습한 유곡으로 내려간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노송(魯頌)시경노송 비궁(閟宮)에도 이런 가사가 있다: ‘아무리 깨우쳐도 깨닫지 못하는 서쪽의 오랑캐 융과 북쪽의 오랑캐 적()을 이제 쳐부수노라. 남쪽의 야만국 초()나라와 그의 동맹국 서() 나라를 이제 징벌 하노라이 가사로 보아도 위대한 주공(周公)조차도 가르쳐도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야만국 초나라를 징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대가 이제 와서 초나라의 똘마니에게 붙어 배운다는 것은 야만에게 개변당하는 것이며 야만을 개변하는 정당한 일이 아니다.”
今也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 子倍子之師而學之, 亦異於曾子矣. 吾聞出於幽谷遷于喬木者, 末聞下喬木而入於幽谷者. 魯頌曰: ‘戎狄是膺, 荊舒是懲.’周公方且膺之, 子是之學, 亦爲不善變矣.”
 
이에 진상(陳相)은 끈덕지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말하였다: “우리 허 선생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민들의 삶의 핵심을 이루는 시장의 가격이 일정하게 되어 에누리나 과장이 없어져서, 나라 전체에 속임수가 없어집니다. 오척의 동자를 시장에 내보내어 물건을 사도 사기 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포(麻布)든 견포(絹布)든 길이만 같으면 가격이 동일하고, 마사(麻絲)든 견사(絹絲)이든 무게가 같으면 가격이 동일하고, 오곡의 종류가 여럿 있어도 부피가 같으면 가격이 동일하고, 신발도 어떤 품질이라도 크기가 같으면 가격이 동일한 공평한 시장원리가 운용됩니다.”
從許子之道, 則市賈不貳, 國中無僞. 雖使五尺之童適市, 莫之或欺. 布帛長短同, 則賈相若; 麻縷絲絮輕重同, 則賈相若; 五穀多寡同, 則賈相若; 屨大小同, 則賈相若.”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도대체 물품이라는 것에는 질과 양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물품의 자연스러운 정황이다. 같은 종류의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 가격은 2, 5, 혹은 10, 100, 혹은 1,000, 10,000배의 차이가 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대가 그런 질적 우열을 무시하고 모든 물품을 한 가격으로 단일화한다면 이것은 실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거친 실로 아무렇게나 짠 신발과 고운 실로 고급스럽게 만든 신발이 동일가격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상등의 물건을 만들려고 하겠는가? 이렇게 되면 문명의 진보는 사라지고 만다. 그대가 모시는 허 선생의 도에 따르게 되면,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서로 사기를 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떻게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 “夫物之不齊, 物之情也; 或相倍蓰, 或相什伯, 或相千萬. 子比而同之, 是亂天下也. 巨屨小屨同賈, 人豈爲之哉? 從許子之道, 相率而爲僞者也, 惡能治國家?”

 

나 도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맞먹겠다고 기어오르는 놈들을 너무도 많이 만난다. 그런데 9급과 9단은 확실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객관적인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나 예술의 영역에 있어서까지 그것은 확실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두어보면아는 것이다. 장기나 바둑도 두어보면, 운동경기도 시합을 해보면 승부가 갈린 예술도 무대에 올려보면 그 다름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9급과 9단이 인간의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9급이나 9단이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는 동일한 만족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9급이 같은 룰의 게임을 하는 한에 있어서는 반드시 9단에게 배워야 한다. 계통을 밟아 겸손하게 배워 올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9급이 9단을 이길 수 있다고 뻥치는 것이다. 뻥치는 놈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맞붙지 않고 피해다니면서 말만 하는 놈이 있고, 하나는 맞붙겠다고 기어오르는 놈이 있다. 기어오르는 놈은 결국 아작 나게 마련이다. 맹자가 나나 지금 나이가 비슷한데 맹자가 상대방을 아작 내는 광경을 바라보면 나보다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다. 나는 평생 기어오르는 놈들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리고 그 놈들이 허행 수준도 안 되는 너무도 유치한 놈들이었기에 이제는 그런 기미가 보이면 침묵하고 상대를 안 해준다. 그런데 맹자는 정면으로 돌파 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의 인정 구상은 앞서 보았듯이 정전제(井田制) 경제적 구상결국 조세제도의 확립과 상서학교의 교육정책 국민의 문명화ㆍ도덕화으로 집약되는 것인데, 그것도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니고 대체적인 원칙에 따라 상황적 변수를 계산해가면서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었다. 사실 현대사회의 핵심도 조세와 교육에 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조세는 국가와 민중을 어떤 방식으로 구조 지우느냐에 관한 문제이며, 교육은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하여튼 맹자의 인정구상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기에 등나라에서 매우 효험을 보았다. 단기간 내에 국가가 안정되고 일 체감이 생겼으며 민중의 삶이 윤택해졌다. 그래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당시의 민중에게는 국적이 따로 없었다. 전국시대에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었다). 그런데 사상가들도 같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그래도 제나라 직하에는 당대의 A급 인사들이 모여들었지만, 아무래도 등나라와 같은 소국에는 좀 처지는 C급 인사들이 모여들 가능성이 없지 않다. 허행(許行)은 한마디로 촌놈이었다. 내가 여기 ‘C이라는 얘기는 일곡지사(一曲之士)’라는 의미이다. 인식의 범주가 너무 편협하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허행은 맑스가 말하는 원시공산주의(primitive communism)’의 사회를 지향하는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직경(直耕)을 주장하며, 소득의 분배를 균일하게 하며, 시장경제를 무시하는 사용가치 중심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기본적 자원의 공동권 리와 착취와 경제적 분업이나 신분의 분화가 부재하는 평등적 인간관계(egalitarian relationship)를 이상으로 하는 어떤 소박한 공동체주의를 꿈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허행의 사상이 크게 나쁠 것은 없다. 당시 계급분화와 착취가 너무 심했고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농사에 대한 절망감이 짙어져 농사 그 자체를 경시하는 상업주의가 판을 치자, 그런 트렌드에 대한 반동으로서는 가치있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일곡(一曲)은 일곡으로 만족하면 좋은데 전곡(全曲)을 주장하면 파탄이 일어나는 것이다. 맹자를 격분시킨 것은 농업공동체의 주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주장의 획일적 적용, 즉 맹자가 애써 이룩해놓은 등나라의 결실을, 그 결실의 혜택을 받는 자들이 그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사유였던 것이다. 그것은 왕도강설자로서의 맹자의 실존적 근거와 걸리는 문제였다. 그래서 그토록 장엄하게 진상을 야단친 것이다. 전곡을 담당하는 등문공에게 일곡의 당위성을 강요한다는 것은 심히 불쾌한 일이었던 것이다.

 

여기 가장 핵심적인 맹자사상의 요체와 왜곡이 동시에 걸려있다. 맹자사상의 중요한 측면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노심자(勞心, 화이트칼라)와 노력자(勞力者, 블루칼라)의 이분을 지적하면서 마치 맹자사상이 화이트칼라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유심주의처럼 비판하는데 바로 이것은 콘텍스트(context)를 무시한 텍스트(text)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맹자는 왕까지도 직경을 해야한다는 무차별적 제안에 대한 반동으로 이 말을 한 것일 뿐이며, 노심자와 노력자의 구분이 맹자사상의 핵심이 전혀 아니다. 상대방의 논리를 격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된 개념적 장치일 뿐이다. 그들의 주장은 마치 현대자동차의 회장이 공장 생산라인 벨트 앞에서 하급 노동자들과 같이 생산에 종사해야만 회사 전체가 단합되고 잘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다. 등문공에게 창름부고(倉廩府庫)가 따로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느냐가 인정(仁政)의 기준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자동차 대기업 회장은 회장 나름대로 분주히 해야할 생업이 따로 있다. 그리고 그가 획득하는 부는 반드시 회사 종업원 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와 여민동락하는 데 쓰여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문제는 그 부가 기껏해야 자동차회사 노조직원 자체의 달램에만 쓰 여지고, 하청업체에까지도 그 혜택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소비자의 공익과는 전혀 무관하게 돌아간다. 우리나라의 경우 30대 재벌그룹의 전체 자산은 14605000억원에 이른다. 국내총생산(GDP) 1172조 원보다 300조원 가까이 많다. 연간 매출은 1134조원으로 국내총생산의 96.7%에 이른다(2011년 기준, 한겨레2012213일 제1면 기사).

 

30대 기업이 한 나라 전체를 말아먹고 있는 이러한 실태를 감안해볼 때, 그들의 부가 오로지 국민 전체의 노동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 국민의 기억에 남는 공적 복지에 관한 유니크한 기록이 별로 없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많은 사업의 리스트를 들이댈 것이지만, 최소한 우리 기억에 남는 감동의 스토리는 하나도 없다. 내 기억에 없으니 누구 기억에 있으리오?

 

하여튼 이러한 문제는 긍정적인 측면이든 부정적인 측면이든 모두 거시적 담론과 체제의 변화를 통하여 개선되어야 할 문제이지, 100묘만 잘 운영하면 되는 농부의 비젼으로 달성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는 사회분업과 협업의 효율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에 나오고 있는 문제는 교육에 관한 문제이다. 요임금 치세 당시의 순 밑에 있었던 신하, ()과 우()와 후직(后稷)의 기능이 다 달랐다. 익은 불(문명의 정착)을 관장하였고, 우는 물(치수)을 관장하였고 후직은 농사법의 문제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또 설()로 하여금 인륜을 교육시키는 문제를 담당케 한 결과, 다음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부자에게 친()이 있게 되었고, 군신에게 의()가 있게 되었고, 부부에게 별()이 있게 되었고, 장유에게 서()가 있게 되었고, 붕우에게 신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 우리가 생각하는 오륜의 최초의 원형이 태어나는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륜이라는 말 자체는 명대의 선종이 편찬한 오륜서(五倫書)를 그 용례의 최초로 삼는 것이며, 이 책을 영종이 널리 보급하면서 일반화된 후대의 개념이지 맹자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는 인륜(人倫)’이라는 표현만을 썼다. 사람의 관계는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ㆍ붕우로서 총망라된다고 본 것일 뿐이다. 그리고 부자의 관계가 군신의 관계보다 앞서 있으며, 군신의 관계도 ()’로만 말했지 ()’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맹자는 오륜이라는 개념적 덕목의 카테고리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섯 가지 관계에 친ㆍ의ㆍ별ㆍ서ㆍ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술부로서 서술했을 뿐이다. 자사의 오달도(五達道)’가 맹자에게서 다섯 가지 인륜(人倫)’으로서 다시 서술된 것이다. 맹자의 사상을 너무 도덕주의적으로 개념화(moralistic categorization)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 장에는 등나라에서의 인정의 실현상황, 노심자ㆍ노력자의 문제, 다섯 가지 인륜의 문제 이외로도, 자공(子貢)6년상, 유약(有若) 섬기기와 증자의 반발, 그리고 당대에 철기가 농기구로서까지 쓰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철기보편화의 전국생활상 등등의 매우 생생하고도 구체적인 정보가 드러나고 있다. 전국시대의 르뽀로서도 가치가 드높은 기록이라 할 것이다.

 

다음 장 또한 맹자가 등나라에서 타학파와 부닥치는 논쟁의 기록인데 맹자의 주장의 순수성과 깊이가 잘 드러나는 멋있는 파편이다. 모든 장에 일관된 논점이지만, 맹자의 출발은 문명 속의 인간이며, 상식 속에서 보편적으로 전제되는 인간이다. 인간에 대한 원초적 본질이나 문명의 논리를 거부하는 역설적 매력을 탐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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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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