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박장(薄葬)과 후장(厚葬), 그리고 매장(埋葬)
3a-5. 묵자(墨子)【묵가(墨家)의 창시자인 묵적(墨翟)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는 뜻. 묵적의 주장은 겸애(兼愛)와 절용(節用)으로 압축된다. 「등문공」 하9 참고】의 한 사람으로서 등나라에서 활약하던 이지(夷之)【성이 이(夷)고, 명이 지(之)이다】라는 사람이, 맹자의 제자인 통하여 맹자의 면회를 요청하여 왔다. 이에 맹자는, ‘나 또한 만나기를 원하는 바이나, 지금 내 몸이 불편하니, 병이 쾌차하게 되면, 그때는 내가 직접 이지(夷之)에게로 가서 만나겠다. 이지는 지금 오지 마시오!’라고 말하였다. 3a-5. 墨者夷之, 因徐辟而求見孟子. 孟子曰: “吾固願見, 今吾尙病, 病愈, 我且往見, 夷子不來!” 그랬더니 얼마 안 있다가 이지(夷之)가 또다시 맹자의 면회를 요청하였다. 그러니까 이지는 맹자를 매우 적극적으로 만나려 하였던 것이다. 이에 맹자는 말하였다: “지금은 물론 내가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우선 내 말부터 전해라! 학술적 토론은 상대방 눈치를 보지 않고 정직하게 직언하지 않으면 진리는 드러날 길이 없다. 나는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다. 나는 이자(夷子)가 묵적(墨翟)을 숭상하는 학파의 사람이라 들었다. 그런데 묵자의 사람들은 상례(喪禮)를 행하는 데 있어서 박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들었다. 이자(夷子)는 이러한 박장주의(薄葬主義)로써 이 세상을 개변하겠다고 덤벼드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자(夷子) 자신이 이 박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중요한 실행원칙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 어찌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이지는 최근 자기 친어버이의 장례를 후하게 치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기가 천하게 여기는 것(유가의 후장 주의)으로써 자기 어버이를 섬긴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모순된 이야기인가?” 他日又求見孟子. 孟子曰: “吾今則可以見矣. 不直, 則道不見; 我且直之. 吾聞夷子墨者. 墨之治喪也, 以薄爲其道也. 夷子思以易天下, 豈以爲非是而不貴也? 然而夷子葬其親厚, 則是以所賤事親也.” 서자(徐子)는 이것을 이자(夷子)에게 고하였다. 이자는 맹자에게 보기좋게 한 방 얻어맞은 셈이다. 그런데 이자(夷子)는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돌파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 애매하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려 했다. 이자(夷子)는 말하였다: “『서경』【주서(周書) 「강고(康誥)」】에 쓰여져 있는 유자의 도[儒者之道]【沃案: 공자학파의 사람을 ‘유자’라고 부른 가장 초기의 문헌적 전거라고 생각된다】에 옛 성현들께서 백성을 사랑하기를 ‘어미가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하였다[若保赤子]’라고 하였다. 이 말인즉슨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 이지가 생각하건대, 이것은 유자도 역시 애(愛)에는 차등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며【만백성을 똑같이 적자처럼 사랑하니까】, 단지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에게 가까운 어버이 같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일 뿐이라는 방편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친소후박(親疏厚薄)이 없는 묵가의 겸애(兼愛)의 주장도 맞는 것이며 내가 나의 부모를 후장한 것도 또한 맞는 것이다.” 徐子以告夷子. 夷子曰: “儒者之道, 古之人, ‘若保赤子’, 此言何謂也? 之則以爲愛無差等, 施由親始.” 맹자의 제자 서자(徐子)는 이 이야기를 다시 맹자에게 고하였다. 徐子以告孟子.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면 이자(夷子)는 진실로 자기 형의 아들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똑같이 이웃의 적자를 사랑한단 말인가? 정말로 완전히 동일한 심정으로 완벽하게 무차별적으로 사랑한단 말인가? 그는 아마도 내 말의 이러한 측면에 집착했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 갈 때는 누구든지 누구의 애인지를 불문하고 구해준다는 이 말을 들어 사랑에 친소가 없다는 주장을 할지도 모르겠다. 적자(赤子)가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것은 적자가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이 구해주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적자의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경』의 말도, 적자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적자의 죄가 아니라 부모의 책임이듯이,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백성의 보호와 감독의 책임이 있는 군주의 잘못이므로, 군주는 인민을 부모가 적자를 보호하듯이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인간의 사랑이 무차별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또한 하늘이 만물을 생성할 때, 그 생명의 근원은 친부모 한 뿌리밖에는 없다. 그런데 이자가 무차별 사랑을 주장한다면 우리 생명의 근원이 두 뿌리ㆍ세 뿌리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어찌 부모가 두세 뿌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孟子曰: “夫夷子, 信以爲人之親其兄之子爲若親其鄰之赤子乎? 彼有取爾也. 赤子匍匐將入井, 非赤子之罪也. 且天之生物也, 使之一本, 而夷子二本故也. 아주 옛날 태고의 시대에는 부모가 돌아가셔도 그 부모의 시신을 묻지 않는 풍습이 보편적이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시면, 그 시신을 들 것에 운반하여 동구 밖 계곡에 그냥 내던져 버렸다. 그런데 어느날 자식이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그랬더니 여우새끼 살쾡이가 그렇게도 생전에 귀하게 모시던 부모의 살점을 뜯어먹으며, 파리와 등에와 땅강아지가 새카맣게 모여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이마에 식은땀이 비질비질 쏟아졌다. 그리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솟은 것은 누군가 남 이 보기 때문이 아니요, 깊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정감이 얼굴에 솟구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얼른 집으로 돌아와 삼태기와 삽을 가지고 가서 흙을 퍼서 두툼하게 유해를 덮었다. 이것이 매장의 시작이었다. 매장하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마음에 편한 바른 일이었다고 한다면, 효자로서 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어버이를 장례 지내는 데도 반드시 도리가 있게 마련이다. 후장이야말로 너무도 정당한 도리일 수밖에 없다.” 蓋上世嘗有不葬其親者. 其親死, 則擧而委之於壑. 他日過之, 狐狸食之, 蠅蚋姑嘬之. 其顙有泚, 睨而不視. 夫泚也, 非爲人泚, 中心達於面目. 蓋歸反虆梩而掩之. 掩之誠是也, 則孝子ㆍ仁人之掩其親, 亦必有道矣.” 서자(徐子)가 이 맹자의 말씀을 이자에게 전했다. 이 말을 전해들 은 이자는 한참동안 망연하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맹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었나이다.” 徐子以告夷子. 夷子憮然爲閒曰: “命之矣.” |
여기 벌어진 묵가와의 논쟁 사건도 앞의 농가와의 대결 이후에 등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분명하다. 묵가는 당대의 현학(顯學)이었기에 어디서나 성세(盛世)가 있었다. 그만큼 묵가의 주장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고 도 말할 수 있다. 묵가의 겸애(兼愛)와 율법주의에 쩔어 사상은 버린 바리새이즘을 비판하고 나온 예수의 사랑의 구원론이 팔레스타인 민중의 지지를 얻었듯이, 전국시대의 민중 속에서 어떤 종교적 지지를 얻었던 것 같다. 묵가는 일종의 용병집단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존립 기반을 가진 어떤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용병집단이라는 성격과는 달리 평화주의적 사상과 극단의 민중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전란에 시달리던 민중에게는 어떤 메시아니즘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유가의 후장주의와 묵가의 박장주의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전국시대의 이데올로기화된 개념적 대립일 뿐, 그 사상의 본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양자가 그렇게 상충하는 것만도 아니다.
공자도 자기 아들 백어의 장례를 박하게 지냈고(『논어(論語)』 11-7), 자기 수제자 안회의 장례도 소박하게 치르기를 원했고 후장에 반대했다(11-10), 그리고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물었을 때도,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하고, 상(喪)도 형식적인 화려함보다는 슬픔의 진정성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논어』 3-4). 박장에 대하여 후장이 이념화된 것은 전국시대의 사건이다. 그러나 맹자의 후장의 주장의 본질도, 장례라는 것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소박한 감정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지, 장례가 꼭 형식적으로 화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박장의 배경에 깔린 것은 인간관계의 무차별성이다. 그러나 유가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은 거짓이다. 인간관계는 무차별적일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유추해서 확대해나가는 것이 인간의 실제적 보편적 가치일 뿐이다. 자기 자식이 잘났든 못났든 자식을 키워보지 않는 사람은 남의 자식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유가의 입장이다. 즉 나의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특별한 것이며, 그러한 마음으로부터 유추해나 가는 것이 타인의 부모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갖게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부모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유가는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부모에 대한 장례는 나의 있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후장론의 궁극적 의미이다.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무차별적 기준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후장의 폐해는 극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묵가의 박장론(薄葬論)은 민중에게 하나의 구원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유가의 후장(厚葬)과 국가의 박장(薄葬)은 절충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후장 덕분에 인류의 문화유산이 많이 보존되었다는 아이러니도 기억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다.
여기 등장하는 이지(夷之)라는 인물은 앞에 등장한 진상(陳相)과는 달리 융통성이 있었고 반성도 있는 폭넓은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맹자에 대해서도 예의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지는 맹자를 직접 만나려 했지만 그 면담은 결코 성사되지 않았다. 중간에 맹자의 제자인 서벽(徐辟)을 통해서만 이야기가 오갔을 뿐이다. 그러니까 맹자 입장에서는 굳이 이지를 만날 필요성을 안 느꼈을지도 모른다. 서벽의 전언을 통하여 이지가 승복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있는데, 이지의 자세가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이지와 서벽이 모두 이자(夷子), 서자(徐子)로 기술되는 것을 보면 이 대화의 기록자는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서벽의 제자 중 한 사람에 의하여 기록된 파편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맹자의 장례에 관한 인류학적 고찰은 맹자의 역사인식의 깊이를 보여 준다. 현재도 티벳이나 중앙아시아, 인도 지역에 조장(鳥葬)의 풍습이 남아 있고, 에스키모사회에도 노부모를 곰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맹자의 논의는 결코 허황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맹자는 그런 논의를 통하여 장례풍습의 인류학적 발전사를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감정적 호소를 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이 그러한 인간다움을 지향하게 된 정감적 배경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세의 도덕성을 풍요롭게 만들자는 데 그 본의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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