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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불모의 땅에 핀 꽃②: 토지 개혁론의 한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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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불모의 땅에 핀 꽃②: 토지 개혁론의 한계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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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의 땅에 핀 꽃

 

 

그러나 여기서 정약용(丁若鏞)은 그 전까지 다양한 전제 개혁론을 주장한 다른 실학자들과 같은 착각을 범하고 있다. 토지의 실제 경작자와 명목상 소유자가 다르다는 게 토지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라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 문제를 개선하려면 조선의 체제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아니면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거나).

 

조선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 나아가 중국의 역대 왕조들까지 중화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들은 예외없이 모든 토지가 왕 또는 국가의 소유라는 왕토(王土)의 이념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토지만이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게 왕의 소유였으므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비록 그것은 형식적인 규정이었고 언제나 토지의 실소유자는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공식과 비공식이 크게 다르다는 점은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 그 때문에 전시과(田柴科)과전법(科田法)에서도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수조권(收租權)이라는 애매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이에 반해 중세 유럽의 봉건제에서는 상위 영주가 하위 영주에게 토지의 소유권 자체를 양도하거나 계약을 통해 빌려주는 식이었으므로 일찍부터 사유지estate와 지대rent개념이 발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국체와 정체를 인정하는 한 농민들은 결코 토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비록 제한적이나마 경자유전의 원칙이 현실에 적용되려면 최소한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결국 실학자들과 정약용(丁若鏞)이 토지 개혁론의 골간으로 삼았던 경자유전이란 단지 개혁 정도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체제 자체를 바꾸는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이념이었던 것이다.

 

이런 한계는 토지 개혁론에 비해 더 고전적인 가치를 지니는 분야, 즉 정약용의 정치 사상에서도 드러난다. 앞서 실학도 유학의 한 갈래라는 것을 보았듯이 그의 모든 학문 역시 유학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도 군주의 자질과 덕목으로서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은 역대 사대부(士大夫)들이 늘 국왕에게 요구했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자세다. 군 주도 먼저 스스로를 바르게 닦고 나서 남을 다스려야 한다는 이념, 바로 그것이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이념적 족쇄가 아니던가?

 

그러나 정약용(丁若鏞)이 수기치인을 말하는 근거는 약간 다르다. 그는 놀랍게도 백성이 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군주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군주가 참되게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먼저 수기치인을 해야 한다는 참신한왕도론(王道論)을 전개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같은 시대에 서유럽에서 성장하고 있던 자유주의 사상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정약용은 과연 근대적 국민주권 개념을 주장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사실 그 전까지 조선의 사대부들이 군주에게 그런 덕목을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가지 암묵적인 전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국왕 역시 중국 천자와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제후, 사대부(士大夫)와 같은 입장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천하의 주인인 중국의 황제 이외에는 그 누구도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천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약용(丁若鏞)은 국왕에게 수기치인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백성으로 새롭게 설정했을 뿐이다그 결과 정약용의 왕도론은 국민주권의 개념과 얼추 비슷해졌지만, 실은 크게 다르다. 우선 그의 사상은 순수한 이념적 산물이지만, 서유럽의 자유주의는 시민 계급이라는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성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비교적 동양식 왕조와 비슷한 왕국이 생겨났던 서유럽의 절대주의 시대에는 절대 군주와 관료 세력만이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이 상업과 산업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면서 장차 미래 사회를 주도할 세력으로 떠올랐다(아마 절대군주도 동양의 유학을 알았더라면 몹시 부러워했으리라. 유학만큼 군주의 절대적인 지위와 권력을 보장해주는 이념은 없을 테니까). 이들이 주창하고 나선 게 바로 자유주의 사상이며, 정치적으로는 참정권과 국민주권의 개념이다. 물론 동양의 역사에서는 일찍부터 군주가 백성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념이 있었으나, 그것은 군주가 만백성의 주인으로서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국민주권의 개념과는 비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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