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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14장 - 5. 존 듀이와 중용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14장 - 5. 존 듀이와 중용

건방진방랑자 2021. 9. 18.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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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존 듀이와 중용

 

 

: “, 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활쏘기는 군자의 자세와 같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자기 몸에서 구한다.
 
畫布曰正; 棲皮曰鵠, 皆侯之中, 射之的也. 子思, 引此孔子之言, 以結上文之意.
右第十四章, 子思之言也. 凡章首, 無子曰字者, 放此.
비단에 과녁의 원이 그려져 있는 것을 정()이라하고, 가죽에 과녁의 원이 그려져 있는 것을 곡()이라고 하니, 모두 과녁의 중앙이며, 활쏘기의 목표점을 말한다. 자사는 여기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윗문장의 뜻을 결론지었다.
오른쪽은 제14장이니, 자사의 말이다. 장이 시작될 때 자왈(子曰)’이 없으면, 자사의 말이라고 보면 된다.

 

이 구절은 군자의 도()를 활쏘기에 비유한 것인데, 예로부터 그런 비유들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요번에 야회에 가지만, 옛날 선비들이 모여서 야회를 가면 반드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가 있었거든요. 활쏘기라는 것은 옛날 사람의 풍습에 있었던 거니까, 자기들이 가까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비유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옛날 교육이라는 게 ()’만 가르친 것이 아니고 ()’도 함께 배우게 했다는 거지. 지금도 동경대학에 가면 궁술부의 활동이 매우 활발한데, 그것이 옛날 교육의 전통을 잘 지켜 나가고 있는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구절은, 군자라면 활을 잘 쏠 줄 알아야 하고, 이 활쏘기는 자기들이 보기에 매우 군자의 도()에 가까운 것 같다는 뜻이예요.

 

실저정곡(失諸正鵠).’ 주자 주를 보면, ()과 곡()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삼베에 <표적을> 그려놓은 것을 정()이라 하고, 가죽을 붙여 놓은 것을 곡()이라고 한다[畵佈曰正 棲皮曰鵠].” ()을 정곡이라고 해도 되죠. 대화 중에 핵심을 찌르는 말을 뭐라고 해요? 정곡을 찌른다고 하죠? 그런 의미예요. 활을 쏠 때, 과녁의 가장 가운데에 있는 목표의 센터(Center)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저정곡(失諸正鵠)’ 그런데, 이게 군자의 도()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여러분 잘 모르겠죠? 여기에 옛날 사람들의 굉장한 생각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 죤 듀이(John Dewey: 1859-1952) 아시죠? 교육에 있어서 목적론의 중요성을 말한 사람으로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에 보면 그의 생각이 잘 나와 있는데, 이게 우리의 논의와 같은 맥락입니다.

 

흔히 우리는 마치 어떤 목적이라는 게 과녁으로 있는 걸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교육할 적에 보통 목적이 저 바깥에 있는 걸로 알아요. 예를 들면, 축구를 할 때 축구하는 목적이 뭡니까? 골대가 목적은 아니죠. 그런데 일반적으로 골대를 목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축구의 목적은 골대로 골을 차 넣는 거예요. 그리고 공을 차 넣는 것은 그 순간까지는 사람의 발의 기예죠. 행위자는 사람의 발이고,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발의 기술이라고. 그런데 축구의 목적을 마치 골대에 공이 들어가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활을 쏠 적에 활을 쏘는 목적이 그 과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손이 활을 튕겼을 때에 그 명중 여부가 결정된다는 거지. 그리고 그 튕기는 것은 전부 나의 행위라고. 그러니까 교육의 목적은 저 밖의 과녁에 있는 게 아니고, 바로 그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내 몸의 순간적 상황을 콘트롤하는 모든 요소들에 내재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존 듀이의 교육론에 있어서 굉장히 획기적인 사상이거든. 그런데 이게 동양 사상으로부터, 즉 듀이의 동양적인 생성론에서 부터 나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몰라요. 존 듀이가 왜 존 듀이인지 모르고, 그가 근세 서구라파 교육론을 왜 만들었는지를 몰라. 잘 들어 보세요. 그 사람은 20세기 초반에 들어서 미국의 교육질서를 개편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포부를 가진 사람이 주장했던 교육론이 바로 다이내믹 프로세스(Dynamic process, 역동적 과정)를 창조한 교육론이었고, 그게 바로 그 사람의 유명한 이론인 도구주의라는 겁니다. 마치 우리는 목적이라는 말을 쓸 때에, ()’이라는 것을 과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용론(中庸論)에 의하면 과녁은 목적이 될 수가 없어요. 정곡이 그대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목적은 어디 있는 것이냐 하면 바로 내 몸 안에 있다는 겁니다. , ‘반구저기신(反求諸其身)’ 왜 실패했느냐, 왜 저 과녁에 들어맞질 않았느냐 하는 것을 나에게서 구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군자지도이고, 이게 바로 중용(中庸)이예요. 이것은 엄청난 겁니다. 존 듀이의 사상이 중용(中庸)에 다 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교육의 목적하면,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것, 박사 따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박사를 따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얻었느냐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다들 기억하겠지만, 내가 중용(中庸)의 정의를 처음부터 다이나믹 프로세스라고 다이내믹 이퀼리브리엄(Dynamic Equilibrium, 역동적 평형)이라고, 그리고 끊임없는 시중(時中)’이라고 했죠? 이 말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향방이 달려 있는 문제란 말입니다. 인류의 미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런 모든 것에서 사고의 전향이 일어나야 됩니다. 과녁은 애쓰지 않아도 눈에 쉽게 보이니까, “! 저기 과녁이 보인다. 저걸 목표로 향해 쏘자!”라고 하는데 넌센스죠, 넌센스. 명심하십시오. 그런 식의 목적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내 몸 밖에 있는 그런 과녁은 목적도 아니고 결과도 아닌 나이 몸의 역동적 과정을 유도하는 방편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항상 내 몸에서 확인하고 반추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쏘기는 군자지도에 가까운 것이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군자라고 한 것이죠. 아시겠습니까?

 

존 듀이 교육론의 핵심은 모든 에임(Aim)은 프로세스(Process)에 내재한다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나중에 화이트헤드(Whitehead)의 교육론과 연결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맨날 바깥에서 교육의 목표를 구하고 있어요. 교육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부 과녁의 형태가 무엇이냐?’하는 것만이 주요 관심사입니다. 교육론이란 게 과녁이 어떻게 생겼느냐, 잘 보이게 해라, 형광색으로 해라, 네모로 해라, 동그랗게 해라이런 것이나 이야기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껏 이야기해 왔지만, 교육론에 있어서 반구저기신(反求諸其身)하는 것, 이게 핵심적인,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중용(中庸)이란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위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씹고 씹어도 이것은 끝이 없는 책이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면서 중용(中庸)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하시고, 살면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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