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5. 통하는 혈기론과 귀신론
혈관은 파이프가 아니라 관개수로이다
한 마디만 더 하지요. 전번에 동맥이니 정맥이니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우리 몸은 어디나 실핏줄, 모세혈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심(心)이라는 것은 가운데 심장만 심(心)이 아니라 모세혈관들도 다 심(心)이라고 했지요? 결국은 심(心)이라는 건 일종의 저수지로 생각하라는 것이고 혈관들은 다 관개수로입니다. 저수지가 있고 댐이 있고 그 주위의 대평원에 관개된 논들이 펼쳐져 있는 것을 인체에 비교해 봅시다.
인체는 혈(血)의 체계입니다. 이 혈이라는 것은 천지론으로 보면 땅이예요. 우리의 혈(血)을 구성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땅으로부터 왔습니다. 혈(血)은 곧 땅이에요. 땅을 흘러가는 관개용 수로가 곧 피인 것입니다. 땅에 대해서 하늘이 있는 것처럼, 논에 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기가 있는 거지요. 혈기왕성하다 ‘혈기미정하다’라는 말처럼 혈기라는 말을 쓰는데, 혈기를 귀신론적으로 말하면, 혈(血)이 음(陰)이고 기(氣)가 양(陽)이고, 혈(血)이 백(魄)이고 기(氣)가 혼(魂)입니다. 기(氣)라는 것은 관개수로를 지나가는 혈(穴)의 조건에 따라서 상호영향을 주고받겠지요. 혈(血)은 기(氣)에 영향을 주고 기(氣)는 혈(血)에 영향을 줍니다. 왜냐하면 수로에서 물이 공급되지만 이것이 위로 떠올라서 증발되면 습한 기운이 되고 청명한 날에는 물이 빨리 흐르고 습기가 꽉 찬 날이면 물이 천천히 흐릅니다. 이러한 혈(血)과 기(氣)의 상호작용이 발현되고 있는 실체가 바로 인체인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은 혈관이라는 것을 파이프개념으로 생각해서, 이걸 ‘고립계(closed system)’로 생각했단 말이지요. 그러나 인체 내의 혈관은 고립계가 아니라 ‘열려있는 체계(open system)’입니다. 관개수로와 같은 거예요. 이런 개념을 가지고 혈관을 생각해야 합니다. 서양의 개념은 오류예요.
기는 혈이라는 수로의 아지랑이이다.
『장자(莊子)』의 처음인 「소요유(逍遙遊)」를 보면 ‘야마(野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야마(野馬)란 ‘들의 말’이란 것이죠. 이것은 장자가 대붕(大鵬)이 되어 구만리 장천을 날아가면서 보는 것인데, 여기서의 야마(野馬)란 아지랑이 같은 것으로 봄에 산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기(氣)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혈(血)에 대한 아지랑이예요. 혈(血)의 조건이 기(氣)의 조건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기(氣)는 혈(血)로부터 생겨나지만(emerge), 기(氣)는 혈(血)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아지랑이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입니다. 혈(血)처럼, 물처럼 고착되어 있지가 않아요.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모여서 인간의 정신작용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신(神)’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신세계를 현대의학에서 신경이라고 하던 말든 그건 상관이 없어요. 우리의 정신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논두렁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같은 것인데, 신경이라는 것도 결국 혈관에 다 분포되어 있고, 신경세포는 또 피에 의해서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혈(血)이라는 것에서부터 신경세포가 다 모이기 시작해서 대가리에 집중되어 있는 그 체계가 인간의 심지(心志) 작용을 결정한다고 해도 결국 같은 이야기예요. 한의학에서의 기혈론이나 현대의학의 정신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심(心)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혈(血)입니다. 그러나 혈(血)이라는 것은 다시 기(氣)를 낳는 것입니다. 이 기(氣)라는 것은 신묘한 정신작용이 있다는 것으로서 이게 바로 귀신입니다. 산에 혈맥이 있고 물이 있고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산의 기가 되고 산의 귀신이 됩니다. 산에도 신경이 있고 이것이 모여서 신경시냅스를 연결하듯 산귀신이 있다는 것이 동양인들의 사고예요.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어디에나 신령스러운 것이 있는 것입니다.
중용론=귀신론=혈기론
여러분들이 쓰는 책상도 여기서 계속 갈고 닦고 쓰면 어떻게 됩니까? 책상 개개가 다 귀신이 있는 것이 됩니다. 옛날에 며느리들이 부엌에서 매일 고생고생하고 밥하면서 솥뚜껑 문지르고 사니까 그들에게는 부뚜막이 최고의 귀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엌에서 조왕신이 생겨나는 거예요. 몇 대씩 여자들, 과부들의 한이 부엌에 맺히니 귀신이 안 될 수가 있습니까? 그 옆에 커다란 항아리가 몇 백 년씩 된 게 있는데, 우리 시어머니는 불을 못 내서 여기에 빠져 자살을 하셨다고 하면 쳐다보면서 눈물이 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아리 신도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마당놀이 할 때는 조왕신, 항아리 신에게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겁니다. 다 이런 식으로 신의 세계, 신령한 기운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세계입니다. 인간에게서 심지(心志)작용이 나는 것이나 항아리에게서 심지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이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인(人)이든 물(物)이든 같은 세계관의 법칙적 문제입니다. 그런데 존재하는 사물에 내재하는 영험한 이 세계의 생명적 세계에 대한 존엄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 물질문명의 최대의 오류입니다. 중용(中庸)의 귀신론이 망가지면서 현대인들은 신령한 모든 기운을 상실한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전부 자신이 피의 산소교환체계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예요.
우리의 인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氣)의 문제입니다. 인체의 기의 문제란 것은 칠정,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문제입니다. 스트레스의 문제예요. 이건 천지론으로 말하면 여러분들의 몸의 하늘에 구름이 끼는 것입니다. 스트레스 받아서 구름이 콱 낀 거예요. 그럼 피가 잘 안 돌아요. 그러면 우리는 하늘의 구름을 걷어내는 약을 쓰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귤껍질-진피 같은 것이 우리 동양인이 생각하는 하늘의 구름을 걷어내는 약입니다. 구름이 걷어지면 다시 피가 빨리빨리 도는 것이죠. 행기(行氣)ㆍ활혈(活血) 이런 말들이 그래서 생겨난 것입니다.
중용(中庸)이 처음부터 말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산다고 하는 조건, 인간의 몸의 하늘의 조건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잘 조절할 줄 알아야 여러분들의 귀신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예요. 그걸 모르고 스트레스를 받았다하고 정신분석 의사에게 아무리 분석을 받은들, 물론 그렇게 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지론적 세계관에 의해서 나의 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지금 이게 한의학이랑 중용(中庸)이랑 마구 짬뽕이 되어서 여러분들로서는 전체적인 언어를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울 텐데, 이 혈기론과 천지론과 귀신론과 만물의 영험, 이런 것들이 전부 하나로 연결된 세계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한의학의 기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끝나지를 않아요. 일본 사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이런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 없이 소라이를 분석하고 그렇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을 비판합니다. 이번 동경대학에 쓴 글에도 그런 것을 조금 비판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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