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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박준규란 책을 읽다 - 3.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그 글에 대한 평가를 듣는다는 것 본문

연재/만남에 깃든 이야기

박준규란 책을 읽다 - 3.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그 글에 대한 평가를 듣는다는 것

건방진방랑자 2019. 5. 2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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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규쌤의 눈물 시리즈를 읽고 나서 그에 대해 말했다. “이번에 쓴 글은 저번에 썼던 야매 이야기에 버금가는 흡입력이 엄청난 글이던데요. 그리고 1부와 2부로 나누어 쓴 것은 오히려 신의 한 수였어요그러자 준규쌤은 한달음에 완성하고 싶었지만, 그때 하필 약속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두 편으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2차로 인사동의 여자만을 찾았으나, 1년 전에 문을 닫았단다. 이곳에서도 꼬막을 먹었는데, 금요일 밤임에도 우리 밖에 없었다.

 

 

 

서마가 강림하사, 눈물 시리즈를 쓰게 하셨네~ 할렐루야!

 

물론 쓰는 사람 입장에선 글이 써질 때 마무리 짓는 게 좋다. 글이란 게 내 맘대로 써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언가 내 안에 웅성거림이 있을 때 쓰면 1시간 만에도 몇 페이지를 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땐 한 줄도 쓰기 어렵다. 이런 상황이니 글이 잘 써질 때 마무리 짓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글을 쓴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흔히 글 쓰는 이의 능력이 출중하여 글을 쓴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우린 작가들을 대단한 사람인양 바라보며 인정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글이란 어찌 보면 나를 스쳐지나가는 흐름인지도 모른다. 그 흐름이 나를 타고 들어와 도저히 쓰지 않으면 안 돼~’라고 요동칠 때, 미친 듯이 써내려가게 된다. 그땐 좋아요를 만 개를 눌러도 부족하지 않은 글이 나온다. 하지만 의무적으로, 또는 어떤 부담에 의해서 억지로 쓰게 되면 진도도 잘 나가지 않을 뿐더러, 글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전 시인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시를 쓰게 만드는 요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여, ‘시마詩魔(시를 쓰게 만드는 악마)’라는 용어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은 서마書魔라고나 할까.

이때 준규쌤은 정말 미친 듯이 쓰고 싶었나 보다. 과음을 하고 집에 들어와 잠을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2부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명문은 쓰고 싶다는 그 마음에서 탄생했다.

 

 

 

1부의 흡입력, 2부의 가슴뭉클함

 

하지만 쓰는 사람의 입장 말고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가장 긴박감이 넘치는 순간에 한 번 정도 끊어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준규쌤에게 “1부와 2부를 나눈 건 신의 한 수라고 표현한 것이다.

드라마를 볼 때 가장 짜증나는 건, 뭔가 중요한 순간에, 갈등이 고조될 만한 순간에 끝나며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글을 드라마처럼 기계적으로 끊어서 기대감을 증폭시킬 필요는 없지만, 이번 눈물시리즈처럼 두 번의 눈물을 기록할 때는 한 편 한 편 따로 올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첫 번째 눈물을 읽고 그 눈물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다음 편엔 어떤 눈물에 관한 얘기일지 상상하며 기대하게 되니 말이다. 물론 페이스북의 성격 상, 1편을 봤다고 꼭 2편을 보란 보장은 없지만 나중에라도 1편을 본 사람은 2편을 찾아볼 것이고, 2편만 본 사람은 1편을 찾아볼 것이다.

 

 

 

내 글에 대한 평가를 듣다

 

준규쌤의 글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과하게 띄워준다고 생각하셨던지 나의 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신다.

나에게 글쓰기는 언제나 부담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2011년에 단재학교에 들어온 이후, 큰 일이 아니면 써야 한다는 부담만 가졌을 뿐 쓰진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더니, 단재학교 초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록이 없더라. 우치다 타츠루의 첫 강연에 대한 소감, 준규쌤이 추진한 Leel의 풍경들을 기록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도 못내 아쉽다. 어떤 감정이었는지, 그게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년부턴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도, 학교에서 놀러 간 일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아야만 그나마 기록을 남길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작년 기록이 여느 해의 기록보다도 많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부담을 내려놓으니, 실질적으로 글의 양도 대폭 늘어났다. 예전엔 한 편 적기도 버거웠던 것들이, 이젠 3편이나 4편까지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댓글이 달리거나 글에 대한 평가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어, 내 글이 어떤지 궁금하기만 했던 것이다.

이 날 준규쌤은 나의 글에 대해 처음에 단재학교에 왔을 때도 글을 잘 쓰긴 했는데, 요즘은 더 날카로워지고 명료해진 느낌이예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노래도 연습을 해서 잘 할 수 있기도 하지만, 타고난 것이 있으면 더 잘 부르는 것처럼 말이예요.”라고 평가해주셨다. 아무래도 정식으로 비평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비판보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주로 해준 것이다.

 

 

때론 아이들 중엔 이렇게 장난처럼 칭찬을 뿌려주고 가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기분은 좋다.

 

 

 

조회수, 좋아요가 뭐길래

 

글을 써서 올렸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너무 잰 채 하며 글을 썼나?’, ‘너무 자질구레하게 길게 쓰다 보니 사람들은 읽지 않는 건가?’,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거라 생각해서 지겨우니 보지 않나?’하는 갖가지 상상에 빠져든다. 열심히 쓴 만큼 제대로 된 평가도 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은 준규쌤도 있다고 이야기해주신다. 최근에 페친이 많이 늘어서 예전엔 좋아요10개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최근엔 무려 60개가 넘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주 페이스북을 들여다보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 말을 들으니 역시 글 쓰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가 보다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작년 11월에 브런치를 시작하며 무려 4년 전에 썼던 네셔널지오그래픽전 후기를 다시 올렸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올린 지 무려 4일이나 지났는데 그 날은 조회수가 4.247를 기록한 것이다. 그 글은 블로그에 이미 올려져 있었고, 브런치에도 4일 전에 올린 것인데, 왜 하필 그 날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봤던 것일까? 지금도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을 통해 조회수는 허상이라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됐다. 조회수가 높다고 좋은 글이라, 잘 쓴 글이라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저 글도 운명이 있는지 때를 만나면 사람들이 들어와서 보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묻히기도 한다. 아마도 페이스북의 좋아요조회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정리를 한들 뭐할 텐가? 한 번씩 글을 올릴 때마다 수시로 조회수를 확인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쳐다보게 되는 것을. ‘좋아요가 많아지면 기분도 좋아지고, ‘조회수가 높아지면 글의 완성도가 높다는 자부심이 드는 것을.

 

 

이런 식으로 글을 썼지만, 어떠한 반응도 없을 때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완벽한 글이 아닌, 나의 글을 쓸 수 있나?

 

그런 공감대를 이야기할 즈음 준규쌤은 지금 30대잖아요. 그래서 글에서 신선한 기운이 있는 건 장점이예요. 나의 경우 50대다 보니 아무래도 좀 그런 부분이 약하니까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건 가장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말이다.

글이란 게 삶이 밑바탕에 있다 보니, 나이가 들면서 경륜이 쌓이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앎의 폭이 넓어지면 더 좋은 글이 쓰여 진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좀 더 열심히 다듬어야겠다고 각오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때 그 얘길 하시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오덕 선생님은 아이들이 어른의 말투나 표준어를 따라 글을 쓰거나, 자신의 경험이 아닌 이상적인 얘기를 글로 쓰면 호되게 나무랐다고 한다. 그건 자신의 삶을 저주하고 허황된 것만을 추종하는 거짓된 글쓰기이니 말이다. 그래서 글말이 아닌 입말을,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를, 관념의 언어가 아닌 현실의 언어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다. 모르긴 해도 준규쌤의 그 말엔 이오덕 선생님의 그 마음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건 곧 어떤 완벽한 지식체계로 꾸미지 말고,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하지 말고 지금 나의 생각과 경험을 녹여내어 지금 내 나이 때 쓸 수 있는 글을 쓰면 된다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이오덕 선생님은 '진솔한 시가 최고의 시'라고 표현했는데, 아이들의 그 시선으로 풀어낸 시는 정말 정확하다. 그처럼 나다운 글도 필요하다.

 

 

 

남자에게 관대한 풍토, 그걸 잊지 마

 

그런데 상식을 파괴하는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준규쌤이 쓴 글이 호응을 얻고 내가 쓴 글이 호응을 얻는 데엔 남자라는 밑바탕이 작용하고 있다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최근엔 여성 작가들도 많이 늘어났으며, 작가가 남자라고 높게 쳐주고, 여자라고 깔보는 세상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자 준규쌤은 나와 같은 취지로 말하는 여성분들도 분명 많고, 건빵처럼 말하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이 모두 호평을 받는 건 아니잖아요. 거기엔 남자이기 때문에 대단해보이고, 믿을 만하다는 풍토가 작용하고 있는 거죠라고 부연설명을 해주신다.

이건 어떻게 생각한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말임에는 분명했다. 미처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을 뿐 분명히 남자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는 있으니 말이다. 그 덕에 나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고 편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리되니, 함부로 나 잘났다고 거만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겠더라. 내가 잘 났기에 서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서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남성의 경제활동은 당연한 것으로, 여성의 경제활동은 부차적으로 본다. 사회적으로 뿌리박힌 차별의 예.

 

 

인용

목차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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