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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송시열 - 매월당화상발梅月堂畵像跋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송시열 - 매월당화상발梅月堂畵像跋

건방진방랑자 2019. 5. 2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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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月堂畵像跋

 

공자는 태백을 문왕과 같이 칭찬했다

孔子序列先世聖賢多矣 而惟以斷髮文身之泰伯 並稱至德於三分天下以服事殷之文王 先儒以爲其指微矣

 

매월당이 유생-승려-유생-승려로 변했음에도 승려복장을 남겨놓았다

東俗好古 其藏古聖賢遺像者亦多矣 而今延之獨摹梅月公之眞 將結茅於公所遊春川之山谷而掛置之 余竊諦審之 其髭鬚雖在 而冠服則正緇流所著也 余嘗按栗谷先生奉敎所撰公傳 公少爲儒生 中爲緇流 晩嘗長髮歸正 臨終時更爲頭陀像 蓋三變其形矣 獨乃留此緇像而自贊焉者 豈亦有意存乎其間耶

 

김시습은 승려였음에도 유자들이 기리는 데엔 이유가 있을 거다

蓋公出家放迹 實欲藏晦其身 然百世之下 見其氣象精神於片幅之上者 猶知 其爲梅月公矣 今年夏 成公三問神主忽出於仁王山斷麓下 京外士夫奉安於洪州地魯恩洞 後之君子其有並稱二公 如孔聖之言者耶 其不落莫否耶 延之旣爲其大王考石室先生 刻置淵明 醉石 孤松 五柳等名號於陶山 復繼以此擧 其所感者深矣 嗚呼 雖使公生存 不過七尺之軀矣 今乃輸在七八寸矮絹 而論者謂其顯晦之所關 在於世道者何也 壬子十一月日 恩津宋時烈跋

 

화폭에 써야 하기에 줄였으며, 여기에 좀 더 길게 남겨 놓는다

右梅月公眞像 安東金延之所摸寫而傳於世者也 嗚呼 使公而生存 不過七尺之軀矣 今乃輸在七八 寸矮絹 而論者謂其顯晦之所關 在於世道者何也 年月日 恩津宋時烈觀於華陽之洞而題其左方 (初欲略備其事實 故有前作矣 旋以片幅之餘 難於排寫 故改之如此 只在財處耳) -宋子大全

 

 

해석

 

공자는 태백을 문왕과 같이 칭찬했다

 

孔子序列先世聖賢多矣

공자가 선세(先世)의 성현(聖賢)을 서열(序列)한 것이 많으나,

 

而惟以斷髮文身之泰伯

오직 단발 문신(斷髮文身)으로 왕위(王位)를 양보하였던 태백(泰伯 주 태왕(周太王)의 장자(長子)),

 

並稱至德於三分天下以服事殷之文王

천하를 삼분(三分)으로 나누어서 그 이분(二分)을 가지고도 은() 나라를 끝내 섬긴 문왕(文王)과 아울러 지덕(至德)’으로 일컬었으므로

 

先儒以爲其指微矣

선유(先儒)들이, 그 뜻이 정미(精微)하다고 하였다.

 

 

 

매월당이 유생-승려-유생-승려로 변했음에도 승려복장을 남겨놓았다

 

東俗好古 其藏古聖賢遺像者亦多矣

우리나라의 풍속도 옛것을 좋아하여 옛 성현의 유상(遺像)을 간직한 이가 많은데,

 

而今延之獨摹梅月公之眞

이제 김연지(金延之)가 유독 매월공(梅月公)의 진영(眞影)을 모사(摸寫),

 

將結茅於公所遊春川之山谷而掛置之

공이 놀았던 춘천(春川)의 산골짜기에 띳집을 짓고 걸어 두었다.

 

余竊諦審之 其髭鬚雖在 而冠服則正緇流所著也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그 콧수염과 턱수염은 있었으나 관복(冠服)은 곧 승려(僧侶)가 착용하는 것이었다.

 

余嘗按栗谷先生奉敎所撰公傳

내가 일찍이, 율곡 선생이 성교(聖敎)를 받들어 찬술(撰述)한 공의 전기(傳記)를 상고하였는데,

 

公少爲儒生 中爲緇流

공은 소시(少時)에는 유생(儒生)이 되고 중년에는 승려가 되고

 

晩嘗長髮歸正 臨終時更爲頭陀像

만년(晩年)에는 머리를 길러서 정도(正道)로 돌아왔다가 임종할 때는 다시 두타(頭陀)가 되었다.’ 하였으니,

 

蓋三變其形矣

이는 그 모양이 세 번이나 변한 것인데,

 

獨乃留此緇像而自贊焉者

유독 이 치상(緇像 승려의 모양으로 된 화상)을 남겨 놓고 스스로 찬()을 지었음은

 

豈亦有意存乎其間耶

혹 그사이에 깊은 뜻이 있음이 아닌지.

 

 

 

김시습은 승려였음에도 유자들이 기리는 데엔 이유가 있을 거다

 

蓋公出家放迹 實欲藏晦其身

공이 출가(出家)하여 방종한 생활을 한 것은 실로 그 몸을 숨기기 위해서이다.

 

然百世之下 見其氣象精神於片幅之上者

그러나 백세(百世) 이후에 그 기상과 정신을 한 조각 화폭(畫幅) 위에서

 

猶知其爲梅月公矣

보아도 그것이 매월공임을 알 수 있다.

 

今年夏 成公三問神主忽出於仁王山斷麓下

올여름에 성공 삼문(成公三問)의 신주(神主)가 인왕산(仁旺山) 절벽 밑에서 나오자,

 

京外士夫奉安於洪州地魯恩洞

경외(京外)의 사부(士夫)가 홍주(洪州)의 노은동(魯恩洞 ()은 은() 자로도 되어 있음)에 봉안(奉安)하였으니,

 

後之君子其有並稱二公 如孔聖之言者耶 其不落莫否耶

뒤의 군자가 이 두 분을 나란히 일컫기를 공성(孔聖)의 말과 같이 한다면 어찌 쓸쓸하겠는가.

 

延之旣爲其大王考石室先生

연지가 이미 그 대왕고(大王考)인 석실 선생(石室先生)을 위하여,

 

刻置淵明 醉石 孤松 五柳等名號於陶山

도연명(陶淵明)의 취석(醉石)ㆍ고송(孤松)ㆍ오류(五柳) 등의 명호(名號)를 도산(陶山)에 새겨 두고,

 

復繼以此擧 其所感者深矣

다시 이번의 일로써 그 뒤를 이었으니, 그 느낀 바가 깊다.

 

嗚呼 雖使公生存 不過七尺之軀矣

, 공이 생존해 있을 적에는 7()의 몸에 불과하였고,

 

今乃輸在七八寸矮絹

이제는 7, 8()의 짧은 비단폭에 옮겨졌지만,

 

而論者謂其顯晦之所關 在於世道者何也

논하는 이가 공의 현회(顯晦)는 바로 세도(世道)에 관계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壬子十一月日 恩津宋時烈跋

임자년(1672, 현종13) 11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화폭에 써야 하기에 줄였으며, 여기에 좀 더 길게 남겨 놓는다

 

右梅月公眞像 安東金延之所摸寫而傳於世者也

위는 매월공의 진상(眞像)으로 안동 사람 김연지가 모사(摸寫)하여 세상에 전한 것이다.

 

嗚呼 使公而生存 不過七尺之軀矣

, 공이 생존해 있을 적에는 7척의 몸에 불과하였고

 

今乃輸在七八 寸矮絹

이제는 7, 8촌의 짧은 비단폭에 옮겨졌지만,

 

而論者謂其顯晦之所關 在於世道者何也

논하는 이가 공의 현회는 바로 세도에 관계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年月日 恩津宋時烈觀於華陽之洞而題其左方

연 월 일에 은진 송시열이 화양동(華陽洞)에서 보고, 그 왼쪽에 제()한다.

 

(初欲略備其事實 故有前作矣

처음에는 이사실을 어느 정도 서술하려 하였으므로 전작(前作)이 있었으나,

 

旋以片幅之餘 難於排寫

비단폭의 여백(餘白)에 이를 배열(排列)하여 쓰기 어려우므로 이와 같이 고쳤으니,

 

故改之如此 只在財處耳) -宋子大全

김연지(金延之)는 재량해서 사용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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